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81)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6화
그가 북부를 비우고 잠을 자는 것도 아껴 가며 보름 넘게 달려온 이유가 이곳에는 없었다.
그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당황스러움보다 분노가 먼저 치솟았다.
“레오폴드 백작께선 내게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렇습니다만.”
“내 눈에는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레오폴드 백작은 순식간에 서슬 퍼런 분위기로 날 선 목소리를 내는 밀라이언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방금까지는 뭐 마려운 개처럼 굴더니 지금은 마치 광견처럼 보였으니까.
“한 사람이라니……. 아, 카리나는 방에 있을 겁니다. 카리나를 보러 오신 겁니까?”
“왜 저녁 식사 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고?”
“……그거야 뭐, 본인 마음이지요. 카리나가 식사를 거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애는 내성적인 편이라서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엔 잘 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쓰레기 같은 점은 변하지 않았군.”
그가 낮게 읊조리곤 몸을 홱 돌려 식당을 벗어났다. 애초에 카리나가 없으면 밀라이언이 굳이 이 식당에 꾸역꾸역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선명하고 또 선명한 꿈을. 그 꿈은 그가 살아가지 않았던 미래까지 보여주었다.
그 안에서 그는 밀라이언 페스텔리오였다.
카리나 레오폴드를 사랑하고 또 그녀를 일찍 만나지 못하고 지켜 주지 못한 것에 후회하고 절망하는, 무엇 하나 대단치 않은 남자였다.
카리나 앞에서 그는 한없이 무력했고 무능력했으며 언제나 절망했다. 그가 할 줄 아는 건 그녀를 살리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돈도, 명예도, 그가 가진 수많은 건물과 대지도, 권력조차도 그녀 앞에선 한낱 종이 부스러기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긴 꿈을 꾸고 일어난 자신의 얼굴은 누구에게 보여 주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눈물 범벅이었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하나뿐인 반려를 잃어버린 자신의 감정이 전부 스며 들어서 심장이 조여들고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는 기분을 실감했다.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찝찝한 기분에 산맥을 방문했을 때 드래곤의 무덤을 발견하고 드래곤의 형체를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밀라이언 페스텔리오는 그 즉시 말을 챙겨 단신으로 수도로 향했다. 마지막 기억이 너무나도 깊게 뇌리에 박혀서 쉽게 떠나가지 않았으니까.
“미안해요.”
약혼식에서 처음 봤을 땐 참으로 무신경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지루한 눈빛으로 질질 끌려다니는 것이 퍽 마뜩잖게 여겨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밀라이언은 지금 그때의 자신을 주먹으로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제발, 카리나……. 내게 미안해하지 마. 그대는 내게 미안할 거 없어. 내가…… 전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꿈속의 자신은 울고 있었다.
울면서 빌고 있었다. 제발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살아 달라고. 죽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임을 알면서도 차마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내가 조금만 더 그대를 빨리 만났어도, 내가, 약혼식 때 그대에게 관심만 있었어도……!”
그러나 밀라이언은 이번 약혼식에서도 그녀에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조차도 후회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랬어. 괜찮냐고 물어볼 걸 그랬어. 그때, 그대에게 손을 내밀어 주면 좋았을 텐데. 조금 더 빨리 그대를 만나서……. 그래서…… ,그대를 보듬어 줄 것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그랬으면……! 그대가 그렇게 스스로를 죽기 직전까지 목숨을 깎아 먹을 일도, 우리가 함께할 시간도, 방법도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데!”
서럽게 울면서 제 후회를 곱씹으며 고백하는 남자는 참으로 멋없고 작고 무력하게만 보였다. 그때 느꼈던 기억과 감정이 몇 번이고 그의 머릿속을 더듬거렸다.
“나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때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해 줘야지. 저렇게 해 줬으면 좋았을 거야. 그러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거라고.”
“밀라이언, 나는…….”
“근데, 눈을 뜨면 꿈이고 내 상상이야. 나는 시간을 되돌리지도 못하고 그대를 살리지도 못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살릴 수 없다.
그 사실만큼은 결코 변하질 않았다. 그가 이후로 아무리 울고 아무리 버둥거려도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늦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북부까지 찾아오기가 겨우 3년이 남았다. 꿈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수명은 여전히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밀라이언은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그녀가 언제나 말했던 복도의 가장 끝에 있는 어두컴컴한 방문 앞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한 채 주먹을 쥐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몇 차례 더 두드렸지만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가 급히 문고리를 잡았다. 언제나 작은 소음에도 예민한 그녀가 이렇게까지 반응을 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그녀가 그림을 그릴 때뿐이다.
그가 급히 문을 열어 젖혔다.
“카리나!”
다급한 목소리에는 아무리 집중한 그녀라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인지,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어.”
그가 급히 손을 뻗어 종이를 가져와 내용을 살폈다. 다행히 그림이 완성된 흔적은 없다. 스케치 중이었던 모양이다.
“……페스텔리오 공작 각하?”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당황함이 물씬 느껴졌다. 그가 그때서야 제가 한 짓을 깨닫고 아차한 표정을 했다.
“그, 미안하군. 밖에서 문을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어서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
밀라이언이 허리를 숙여 카리나에게 종이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녀의 방은 크기가 넓은 데에 비해 가구나 소품들이 아주 작았다. 침대도 제법 작았고 책상도 작았다. 마치 아직 작은 어린아이를 위한 방처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카리나가 제 그림을 조심스럽게 돌돌 말며 물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백작가에 왔는데 식사 자리에 그대가 없기에…….”
차마 그녀의 아버지에게 패륜적인 말을 하고 왔다곤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밀라이언이 끝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서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지만, 아마 아직까지 그녀에게 레오폴드 백작은 사랑을 받고 싶은 아버지가 분명했다.
“급한 일이요…….”
카리나가 작게 읊조렸다.
‘이맘때에 공작이 오는 일이 있었나?’
꿈속 과거를 뒤져봐도 이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 그대가 보고 싶어서.”
“……제가요? 그, 왜요?”
밀라이언의 돌직구에 카리나가 벙찐 표정으로 멍청하게 더듬거렸다. 밀라이언이 물끄러미 꿈속 기억보다 한층 작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내 약혼자니까. 그 이유론 부족한가?”
“……어, 아뇨. 그건 아닌데.”
지금까지 교류가 전혀 없었으니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이런 행동을 하는 그의 본의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오자마자 이런 말을 해서 좀 미안하지만, 혹시 나와 북부로 갈 생각은 없나? 그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준비를 해 줄 테니.”
“……네?”
“내가 보기에 이 저택은 완전히 엉망이야. 사용인들의 수준도 낮고 무엇보다 레오폴드 백작을 비롯해서 가족들이 전혀 그대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
카리나 레오폴드는 기어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더니 이번에는 가족 비하를 하고 있는 제 약혼자를 보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게다가 그의 말은 조금 어폐가 있었다.
“저택은 수준급으로 관리되고 있고…… 제가 알기로 사용인들도 전부 교육을 수료한 엘리트들이라고…….”
“그러면 뭐 하나, 정작 주인의 손발이 되어야 할 것들이 저녁 식사 시간에 그대를 이렇게 방치해 두고 있는 것을.”
“아…….”
물론, 사용인들이 수준급인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카리나를 제외한 것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가족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카리나를 사용인들이라고 제대로 대우해 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는 그냥…….”
“뜬금없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내 사람이 불행해지는 건 절대 참지 못해. 그대는 나와 약혼을 했으니 내 사람이지.”
“여태 관심 없으셨잖아요……?”
카리나가 정확히 정곡을 찔렀다. 그는 편지 한 통 보낸 적이 없고 딱히 선물을 보낸 기억도 없었다. 정말 그야말로 교류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었다. 밀라이언이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고 한들 변명거리로 삼을 말이 없을 정도로 명백한 이유였다.
“그, 불현듯 깨달았다. 아버지께서 평생을 함께할 반려는 몸을 바쳐서라도 지키라고 했었고, 그리고…… 나도 외로운 게 싫다.”
주먹구구식의 어설픈 변명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밀라이언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꿈을 꾸고 난 이후로 그녀를 갈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나와 가자. 카리나. 이번에는 내가 그대를 지킬 테니까.”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는 꿈속의 밀라이언 페스텔리오가 아니었다. 그는 상상을 하고 있지도 꿈을 꾸고 있지도 않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카리나는 살아 있다.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것보다 훨씬 더 일찍 만나서 그녀를 끌어안아 주고 괜찮으냐고 물어봐 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겨우 3년.
그녀와의 만남을 앞당긴 것은 겨우 3년이었다.
“행복해지자.”
그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미친놈 취급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앞으로 5년, 10년, 2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도 함께 행복해지고 또 행복해져서 우리가 앞으로 수십 년을 더 함께 있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