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82)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7화
카리나는 물끄러미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날, 나랑…… 세렌을 두고 가지 마……. 제발…… 제발……. 제발, 카리나……. 다시 못 만나는 건 싫어…….”
“미안…… 미안해요…….”
“내가 날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그래. 내가, 내가…….”
카리나는 꿈을 꾸면서 ‘후회’에 대해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꿈속의 자신이 얼마나 후회를 했고 스스로의 선택에 얼마나 절망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했는지를 알았다.
그녀가 절망적인 기분에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펜을 들어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시는 과거를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는, 타인을 위해 나를 경시하고 싶지 않아서.
“죽기, 싫어요. 사실…… 세렌도 당신도 더 많이 보고 싶어.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두고 가는 게 무서워요. 죽는 게 무서워…….”
“……카리나.”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이 사라지는 게 무서워요. 세렌이 날 기억 못 하면 어떡해요? 난, 나는…….”
“잊지 않아. 잊지 않을 거야. 잊을 리가 있겠어? 내가…… 세렌이, 당신을…… 어떻게 잊어.”
기어코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죽기 직전에 내뱉었던 진심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 기억은 결코 그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녀를 옭아맬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카리나는 이 생각지도 못한 미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이상 불행한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 채 나라는 존재를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있잖아요.”
“응.”
“이거 고백이에요?”
카리나의 물음에 밀라이언의 눈이 커졌다. 그의 귓불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그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주먹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랑 평생 함께 해달라는 고백이야.”
“……우와, 멋없는 거 알죠?”
“다음엔 더 성대하게 해 줄게.”
카리나는 그가 내민 손 위에 조심스럽게 제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짐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한 밀라이언은 어디선가 마차를 구해 왔고 그 안에 그녀를 태우고 스스로 마차를 운전하기 위해 마부석까지 차지했다.
“대체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닥치고 꺼져.”
그가 달려드는 인프릭을 가볍게 발로 밀어 내동댕이치곤 그대로 떠났다.
이후로 그들의 항의가 밀어닥칠 것은 불 보듯 뻔했지만, 밀라이언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었고 북부는 그의 영역이었다.
그곳에서는 감히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걸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었고.
“혹시 그대 아픈 곳은 없나?”
“아픈 곳이요?”
“그래, 그대는 피부도 새하얗고 마른 데다가 척 보기에도 비실비실해서 딱 어디 아프게 생겨서 말이야. 있다면 말해 줘. 필요한 의원이 있다면 어디서든 끌어올 테니까.”
카리나는 상당히 직설적인 그의 말투에 눈을 몇 차례 끔벅거리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투가 이렇게나 적나라한데다가 직설적인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물씬 느껴져서인 걸까?
“솔직하게 말해야 해. 그대는 앞으로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테니까.”
밀라이언은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이유를 붙이려고 애를 썼다.
사실 꿈속에서 네가 죽는 미래를 봤다, 라고 말을 한들 그녀가 믿어 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
그녀에게서 대답이 쉽게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주치의가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지.’
마음 놓고 검진을 받았을 리가 없지. 밀라이언은 제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검진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으면 페스텔리오령으로 가서 검진을 받아보면 되니까 걱정하진 말고.”
“검진은 받아 봤어요. 지금 당장 아픈 곳은 없는데 병은 있어요.”
카리나가 담담하게 대답하면서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제게 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꺼림칙하게 여기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그녀는 늦든 빠르든 북부로 갈 생각이었고 밀라이언을 만나서 그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네.”
“그렇군.”
그녀가 제 병에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지만, 사실 상정 내의 일이었다.
예술병은 대단히 까다롭고 불치병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병의 진행을 늦추고 싶다면 늦추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꿈속의 밀라이언은 그녀를 만난 시기가 너무나도 늦었을 뿐이다.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었을 테니까.
“무슨 병이지?”
“아실진 모르겠는데, 예술병이라는 거예요.”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밀라이언은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짧게 숨을 뱉었다.
“……그렇군. 그 병에 대해서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예가 깊진 않아. 내 오랜 지인 중에 그런 쪽으로 능통한 이가 있으니 그쪽에 도움을 청해 보도록 하지.”
“그래 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나저나 예술병이라는 건 검진을 받아서 알게 된 건가?”
밀라이언이 적당해 보이는 여관에 마차를 세우며 물었다.
바로 출발한다고 생각했던 카리나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그가 순식간에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마차 밖으로 안내했다.
“아, 어…… 네. 맞아요.”
“내가 알기로 예술병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드물고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발병을 눈치채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던데.”
“아, 네. 아무래도 흔한 질병은 아니라서…….”
밀라이언은 무척 익숙하게 여관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생전 가본 적 없는 여관이었던 탓에 그녀가 당황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의 뒤에 바싹 붙었다.
“제법 실력이 있는 의원 같은데 누군지 알려 주면 그도 스카웃해 가고 싶군. 알려 줄 수 있겠나?”
밀라이언은 정말 황소 같다. 오로지 붉은 깃발을 보고 뛰어드는 황소처럼 앞만 보고 결정한 것을 밀고 나간다.
카리나는 평생 해 보지도 못했고 할 수도 없었던 행동이었다.
“윈스턴이라는 의원님이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여관의 카운터에 선 밀라이언이 익숙한 듯 종업원에게 입을 열었다.
“가장 좋은 방으로 한 개 이틀 정도 묵을 예정이다.”
그가 결제를 끝내고 돌아오자 결국 카리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근데 각하, 저희 북부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이 밤에 가긴 어딜 가겠어. 그대를 무리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 가는 길에 먹을 식량이나 필요한 것도 비축해야 해. 그리고 사람도 좀 고용해야 할 것 같군. 그대를 도와줄 시녀나 식사 당번 같은 자들로.”
뭔가 점점 화려해지고 있는 것은 제 착각일까? 그녀가 당황한 듯 잘게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북부는 아주 멀고 긴 여정일 텐데, 인원수가 너무 많아지면 힘들지 않을까요?”
“돈이면 돼.”
“……그건, 그런데요.”
정말로 사람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녀가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한 채 눈동자를 굴리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식량은 괜찮아요. 육포나 가벼운 건식이면 되는데요.”
“쯧, 그 몸으로 그런 걸 먹으며 갔다간 도착하기 전에 뼈만 남아서 아사하겠군.”
“네? 아니, 그 정도까지는…….”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없어. 이틀 뒤 아침에는 예정대로 출발할 테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해.”
아니,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겠어.
……그리고 그는 정말로 겨우 하루 만에 그가 말한 모든 인원을 다 구해왔다.
“……이게 다 뭐예요?”
“북부까지 가는데 필요한 인원이지.”
카리나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대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최소한으로 줄였어.”
“예?”
“본래는 조금 더 제대로 된 침구도 챙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러면 인원이 너무 늘어날 것 같고 빠른 이동에도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차라리 마차를 좀 더 괜찮은 걸로 업그레이드했지.”
저기 저 화려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거대한 마차가 그들의 마차였다니 예상하지도 못했다.
‘장식물인 줄 알았지.’
보통 마차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안을 열어보니 간이 침대와 이불이 있었다. 정말 안에서 잠만 자도 행복할 것처럼 보이는 수준이다. 여관방보다 크기가 조금 좁을 뿐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바닥은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복슬복슬했고 내부는 따뜻했으며 간식들도 가득했다. 그야말로 호사였다.
그 덕분에 그녀는 이틀 동안 여관에서 전혀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여관의 방은 상당히 넓고 화려한데다가 심심할 틈이 없을 정도였다. 때가 되면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심심할 만하면 밀라이언이 찾아와 그녀와 시간을 보내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틀이 지났다는 사실도 오늘 아침에서야 문득 깨달았을 정도니까 말이다.
“……과한데요.”
“전혀, 그대를 모시기엔 부족할 뿐이지.”
여전히 불만스러운 것이 많은지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린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 말에 훌쩍 올라타 버렸다.
‘아니, 왜 이런 화려한 마차를 두고 혼자서 말을 타는 거야?’
고생은 그가 했는데 누리는 것은 왜 자신뿐인지 모를 일이다.
“출발한다.”
단 두 명뿐이었던 조촐한 인원에서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의 대행렬이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