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83)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8화
* * *
“불편한 건 없나?”
출발한 지 이틀째쯤 되었을 때 카리나는 그의 이 물음을 한 열 번쯤 들었다고 생각했다.
“네, 정말로 불편한 거 없어요. 솔직히 너무 편해서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어요.”
“다행이군, 식사는 주어지는 거 최대한 다 먹도록 해. 혹시나 속이 안 좋을 것 같으면 꼭 미리미리 말하고. 아픈 곳이 있으면 절대로 참지 말도록 하고. 알았나?”
“……네에.”
카리나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밀라이언은 정말 잔소리 광이었다. 얼마나 잔소리가 심한지 모른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의 컨디션을 살폈고 상태를 확인했다. 곧 깨질 유리구슬을 대하는 것처럼.
특히나 그는 식사에 무척이나 예민하게 굴었는데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남기는 것을 보고 넘기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밀라이언이 주는 식사의 양은 평소 카리나가 먹던 식사의 양과 제법 비슷해서 먹는 것이 그렇게 곤란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윈스턴이라는 의원도 온다는 얘기를 했었나?”
“……어, 정말요?”
“그래, 사정을 얘기했더니 흔쾌히 따라오겠다고 했어. 다만 준비할 것이 있어서 우리보다는 늦게 도착할 예정이야.”
윈스턴이 오겠다고 했다니 조금 놀랐다. 그는 과거의 인연이었고 그녀는 당장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와의 인연이 이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여길 떠나기 전에 페리얼 칼로스에게도 전령을 띄웠다. 칼로스 가문은 예술에 조예가 깊은 가문이니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아마 그가 북부로 오면서 윈스턴을 데리고 올 예정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에서만 봤던 인연들이 속속들이 북부로 모인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꿈속의 카리나 레오폴드는 자신이지만 동시에 타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재의 그녀는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다행히 시한부 판정을 받지도 않았으며, 죽을 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는 꿈속의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기하네요.”
“뭐가?”
“절 위해서 누군가가 와 준다는 사실이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저는 늘 아플 때마다 이불을 덮고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리고 양을 세곤 했거든요. 그렇게 하면 얼른 잠이 들고 잠이 들면 아프지 않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렇게 이겨 낸 적이 많이 있었다.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아무리 혼자 앓아도 누구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혼자 이겨 내는 법을 배우려고 했다.
“올 거야.”
“네, 오겠죠. 각하께서 부탁했잖아요.”
당연히 올 것이 분명하지.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인망이 두텁고 자신감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대가 아프거나 힘들 때마다 앞으론 내가 갈 거야. 앞으론 참을 필요 없어, 참지 않아도 돼. 언제든 말해도 좋아.”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입술이 푸스스 무너져 내리며 이윽고 호선을 그렸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각하 말고 밀라이언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군. 어쨌든 그대와 나는 약혼한 사이고 그대는 내 저택으로 가고 있는 거니까.”
그의 제안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요, 밀라이언.”
“……내가 할 말이야.”
* * *
“……지금 뭐라고 했지?”
“……기적을 일으키는 걸 누군가한테 들킨 것 같다고 했어요.”
카리나가 바짝 움츠러든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도 그녀가 지은 죄를 잘 알고 있었다. 드러나서 좋지도 않은 일이 수면으로 드러났으니 밀라이언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기적을 일으켰나?”
“네……. 제가 창조의 예술병이라는 건 일전에 말씀드렸죠……?”
“그래.”
“그게, 오늘 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림을 그리다가 나비 한 마리를 완성했어요.”
밀라이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웬만하면 능력을 쓰지 말라고 말한 것이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충동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건 그녀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참아 낼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어느 순간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최근에는 어느 정도 이성을 부여잡고 있을 수가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맹세해요. 정말로 나비 한 마리뿐이었어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마뜩잖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숨을 뱉었다. 성마른 손길로 얼굴을 문지른 밀라이언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봤는지는 기억하나?”
“잘 모르겠어요. 사람이 있었다는 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도망치는 소리로 알았는데…… 상대가 누구인진 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에 밀라이언이 짧게 침음을 흘렸다.
“일정을 당기는 게 좋겠어. 오늘내일 중으로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북부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지.”
본래라면 느긋하게 가는 길 구경도 하고 휴식도 취하며 북부에 닿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기적 중에서도 창조의 기적은 그동안 가장 말이 많았던 기적이다.
밀라이언 역시 꿈을 꾸고 난 뒤 창조의 기적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다. 그들은 그들 삶이 불행하기도 했지만, 주변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했다. 평생을 이용당하다가 광기에 미쳐 죽어 버린 창조의 예술가도 있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만으로 실현할 수 있는 그들이 권력자들에게 얼마나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였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북부로 돌아가야겠어.”
단신으로 왔던 터라 기사단이 없어서 제법 실력이 좋고 쓸 만한 용병을 구하기는 했지만 미덥지 못했다.
돈으로 구한 용병들은 더 큰 돈에 얼마든지 굴복하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실력도 북부의 기사단에 비해서는 떨어지니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미안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대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카리나는 밀라이언이 하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한 것을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걱정 말고 웬만하면 이 여관에서 벗어나지 말고 있어.”
“그럴게요.”
“한동안 그림 그리는 것도 조금만 참아 주면 좋겠어. 스케치라면 상관없지만.”
“……알겠어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리나의 모습에 밀라이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잔뜩 풀이 죽어 버린 그녀를 어떤 식으로 달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꿈속의 밀라이언 페스텔리오처럼 그 방면으로 그다지 요령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대 잘못이 아니야.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지. 그대는 지금까지 꾹꾹 참아오다가 한 번 터뜨린 것뿐이잖아.”
“…….”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스스로를 책망할 필요는 없어. 겨우 나비 한 마리였잖아.”
겨우 나비 한 마리였다.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다가 결국은 제 생명까지 바치고 말았던 그녀가 그를 위해서 여기까지 참아 준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차마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 그대는 내가 지킬 테니까.”
밀라이언이 그녀의 손을 살짝 붙잡으며 말했다. 카리나의 눈이 한껏 벌어졌다.
“……그럴게요.”
“나는 목격자를 좀 알아보고 이틀 내로 출발할 채비를 끝내야겠어. 쉬고 있어.”
“네.”
카리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자연스럽게 상체를 숙이다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숨을 삼켰다.
“아, 그…… 먼지가 있어서.”
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 네…….”
고개를 푹 숙인 카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밀라이언이 급히 모습을 감췄다.
* * *
카리나가 방에서 벗어난 것은 제법 늦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제법 허기가 졌는데 언제나처럼 식사가 나오지 않아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방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니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정신없는 여관 식당이 보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그녀가 익숙한 낯의 여관 주인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지금 바쁜데 왜…… 아, VIP룸의 손님이시군요. 어쩐 일이신가요?”
“시간이 지났는데 식사가 아직 나오질 않아서요. 미안하지만, 식사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아, 세상에. 너무 죄송합니다. 물론이죠! 근데 지금 보시다시피 너무 바쁜 터라 인력이 없어서…… 혹시 오늘 하루만 식당에서 드시고 가실 수 있을까요?”
카리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난감함이 가득 묻어나는 여관 주인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마 주방에 있다가 홀이 바빠서 뛰쳐나온 도중에 그녀를 마주친 것이 분명했다. 바쁜 기색이 역력한 주인에게 따지고 들 정도로 카리나는 그리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선 혼자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주변이 어찌나 시끄러운지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 즐거운 낯으로 웃고 있어서 그다지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이것도 나름 좋은 경험이겠지.’
여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 나가서 식사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고 말이다.
한참을 고민한 카리나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지금 빈자리가 이쪽 합석 자리밖에 없어서요. 이쪽 자리 괜찮으시죠? 식사는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저기…….”
자신을 의자에 앉히곤 순식간에 사라지는 주인을 보며 카리나가 눈을 몇 차례 끔뻑였다. 솔직히 생판 모르는 타인이랑 합석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앞을 보자 조금 놀란 낯의 사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하, 안녕?”
가무잡잡한 피부의 남자는 이국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피부색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쪽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