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84)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9화
무척이나 수려하고 화려하게 생긴 사내였다. 이국의 옷인 듯 보이는 펄럭거리는 가벼운 옷자락 사이사이로 비치는 근육은 제법 단단해 보였고 휘어지는 눈꼬리는 장난스럽고 가볍게 보였다.
“제국은 신기하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초면인 남녀를 같은 테이블에 앉히고 말이야.”
“……그러게요, 저도 조금 당황했어요.”
상대가 하필이면 또 남자일 건 뭔지. 별 의미가 없는 우연한 만남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밀라이언이 있으니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다.
‘얼른 식사 마치고 올라가야겠다.’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애꿎은 식기를 느리게 매만졌다.
“손에 굳은살이 있네. 혹시 뭔가 펜을 잡는 일을 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구나.”
“…….”
상대의 말에 카리나의 눈이 확 커졌다.
그녀가 바짝 긴장한 낯으로 목을 움츠리곤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예민한 초식동물이 날을 세우는 것 같은 모습에 상대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게서 유화 냄새가 나.”
사내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가볍게 몇 차례 제 콧등을 문지른 그가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중지 손가락을 가볍게 손끝으로 쓸었다. 카리나가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뺐다.
“그리고 손의 이 부분에 굳은살이 생겼다는 건 펜을 오래 쥔다는 거지. 유화 냄새와 펜을 쥔다는 걸 합치면 그림을 그린다는 결론이 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마.”
“……초면에 남의 손을 만지고 반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경계하지 말라는 거죠?”
“아, 반가워서 그랬어. 나도 예술을 하거든.”
그가 손바닥을 펼쳐 그녀에게 보였다. 손바닥 가득 단단한 굳은살이 보였다. 그야말로 엉망인 손을 보며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카틀란이라고 들어봤어?”
“카틀란……? 아, 이름 정도는 들어본 것 같네요, 동쪽에 있는 나라 아닌가요?”
“맞아, 나는 그 나라에서 왔어. 세 개의 녹주(綠州:오아시스)를 품은 아름다운 사막의 나라지.”
제국인들은 카틀란이 죽기 전에 반드시 가야 할 여행지 중의 하나라고도 했고 유명한 조각들은 전부 카틀란 출신의 조각가들이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가기는 어렵지만, 한번 가면 헤어나올 수도 없다고 할 정도로 비밀스럽고 조용한 나라라고 들었다.
수많은 모래의 산 사이에 자리 잡고 있고 거대한 녹주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시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한다고 한다. 비가 잘 내리진 않지만, 세 개의 녹주에는 언제나 물이 풍부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들었다.
아주 먼 타국의 나라라서 그녀가 아는 거라곤 그 정도였다.
“카틀란에서 온 사람은 처음 봐요.”
“그래? 흔하진 않지. 카틀란에 들어오려고 하든 나가려고 하든 반드시 사막을 거쳐야 하는데 사막에는 수많은 마물이 살거든.”
“……사막에 마물이 살아요?”
“맞아, 제국에도 북부 쪽엔 마물이 많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네, 북부의 대공 각하께서 수문장을 맡고 계시죠.”
최후의 방어선이 그이기 때문에 수도를 비롯해서 북부 바깥에 있는 이들이 전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제국의 모든 영지는 매일매일 방비를 하고 마물과의 싸움을 각오해야만 했을 테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야! 사막을 지나는 건 오로지 용맹한 자만이 가능하지. 마물을 헤치고 나가야만 하니까 말이야. 본국이 타국과 교류를 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나라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식사 나왔습니다!”
여자 종업원이 잔뜩 상기된 낯으로 뛰어와 식사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사내를 힐끗거리느라 바빠 보였는데, 그 행동을 눈치챈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고마워.”
“아, 아. 네! 맛있게 드세요!”
카리나는 제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식단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뭐부터 먹어야 맛이 있을까?’
이곳 음식은 무척이나 맛있어서 기왕이면 순서를 잘 지켜서 먹고 싶었다. 그녀가 고민 끝에 포근포근한 감자 샐러드를 먼저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바삭한 식빵에 계란을 올려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야금야금 식사를 하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아 커피와 후식을 먹고 있던 그가 웃었다.
“있잖아, 이름이 뭐야?”
“알려 줄 필요는 없잖아요.”
“흐음, 그럼 네가 그린 그림 보여 줄 수 있어?”
“아뇨.”
카리나가 그의 호기심을 가볍게 쳐냈다. 그렇지않아도 밀라이언이 예민한 시기에 괜히 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턱을 괸 그의 귀에 달린 황금빛의 긴 일자형 귀걸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내가 사실 냄새를 좀 잘 맡거든.”
“……네?”
“난 너한테서 동류의 냄새를 맡았어.”
“무슨 소리를…….”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토끼 모양의 조각이었다.
유려하게 떨어지는 선이나 질감, 그리고 꼿꼿하게 선 귀와 눈빛이 마치 살아있는 토끼를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가 끌을 꺼내 가볍게 한쪽을 긁어내리는 순간이었다.
“내 이름은 카산. 카산 에르하 카틀란이야.”
돌에 불과했던 토끼가 귀를 쫑긋 움직이더니 이윽고 붉은눈을 빛내며 폴짝폴짝 테이블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기적을 일으켜.”
“…….”
카리나의 눈이 한껏 커졌다.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채 멍하니 상대를 보았다. 자신과 같은 기적을 가진 예술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기적의 대가는 생명이야. 예술병을 앓고 있거든.”
“…….”
“너도 그렇지? 카리나.”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카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대체 누구…… 윽…….”
몸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에 그녀가 급히 탁자를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꺼풀도 무거운 것이 느낌이 이상했다. 바로 서려고 하면 할 수록 눈앞이 핑 도는 느낌에 그녀가 숨을 삼켰다.
“……설마.”
고개를 힘껏 내젓고 눈을 여러 차례 끔뻑였지만 정신은 점점 혼미해지기만 했다.
“조금 무례한 방법을 쓰게 돼서 미안해. 눈을 뜨면 다 끝나 있을 거야. 내겐 뛰어난 능력의 반려가 필요하거든. 너라면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친…… 놈…….”
카리나는 생전 써 보지 않은 욕을 잇새 사이로 꾸역꾸역 내뱉었다.
진심으로 단언컨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여관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해서 여관에서 벗어나지 않고 밥을 먹었더니 이런 봉변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밀라……이…….”
언제든지 달려와서 구해 주겠다고 했던 사내의 이름을 불렀지만, 멍청하게도 몸은 앞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언제나처럼 잠깐 놀러 왔을 뿐인데, 네 능력을 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 세상에 나와 같은 존재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
“……이거, 싫…….”
“푹 자도록 해, 카리나. 눈을 뜨면 내 아름다운 나라를 구경시켜 줄 테니.”
쪽. 카산이 카리나의 이마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고 완전히 무너진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저기, 약속은…….”
“아, 그래. 돈을 줘야지. 여기까지 잘 유인했다.”
카산이 품에서 금화를 넉넉히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여관 주인이 헤벌쭉 입을 벌리며 누가 볼새라 황급히 금화를 제 품에 쑥 밀어 넣었다. 이 돈만 있으면 이 사업을 더욱 확장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준 돈은 빨리 쓰는 걸 추천하지.”
어차피 얼마 가지 못하고 죽을 게 뻔하니까 말이야.
카산은 비릿한 웃음과 함께 뒷말을 삼켰다. 여관 주인에게서 짙은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겨 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 일 때문에 카리나의 약혼자인 대공인지 뭔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건 카산이 신경을 쓸 바는 아니었다.
“가자.”
그녀의 주변으로 왁자지껄 떠들던 손님들 몇몇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조용한 곳에서 그녀에게 로브를 씌우고 품에 끌어안은 카산이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앞으로 나온 사내 하나가 문처럼 생긴 조각을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산산조각난 파편들이 바닥에 스며들며 환한 빛을 뿜는 문이 생겨났다.
“쿨럭.”
문을 만든 사내가 쿨럭쿨럭 바닥에 피를 토했다. 카산이 그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흠, 슬슬 효용을 다했나? 뭐 좋아. 이건 전부 나라를 위한 일이니 네겐 영관인 일이겠지.”
이윽고 카산과 일행들이 모두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빛과 함께 이윽고 문이 사라졌다. 자리에는 검붉은 핏자국만이 적막과 함께 남아 있었다.
* * *
‘머리, 아파…….’
당장에라도 머리가 산산이 깨질 것만 같았다. 마치 끊임없이 입에 술을 콸콸 쏟아붓고 부은 다음 날 아침의 기분이었다. 물론 그녀는 숙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대개 사람들의 묘사대로라면 지금 자신의 상태와 비슷할 것이다.
“아…….”
깨질 듯 아픈 머리에 차마 눈조차도 뜰 수가 없어서 그녀가 손에 닿는 이불을 부여잡고 몸을 버둥거렸다.
“일어나셨습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리나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어색한 제국어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카리나는 베개에 연신 이마를 부비며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콰탄’의 해독제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콰탄은 또 뭔데?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리나의 몸이 강제로 일으켜졌다. 부드러운 손을 가진 여인이 카리나의 손에 물잔을, 다른 손에는 작은 종이를 쥐여 주었다.
“가루약과 물입니다. 알약보다는 가루약이 흡수력이 더 빠르니 가루약을 물과 함께 드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
“콰탄은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일주일은 더 괴로우실 겁니다.”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며 카리나가 어깨를 흠칫 굳혔다.
이 고통이 일주일을 더 간다고?
뭔가를 의심할 여유도 없었다. 두통이 너무나도 끔찍했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아주 담담하고 차분했으며 흥분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카리나가 재빨리 가루를 입에 털어넣고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욱…….”
끔찍한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어찌나 쓴지 역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물을 마저 마시자 입에 동그란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뱉어 내려고 했던 그녀는 입 안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에 움직임을 멈췄다.
‘사탕?’
카리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 삼십 분만 누워계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샤께서 아가씨가 깨어나시길 기다리셨으니 불러오겠습니다.”
카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을 파악하고 싶어도 무슨 생각이라도 할 것만 같으면 머리속을 누군가 계속 때리는 것 같았다.
20분쯤 지나니 카리나도 서서히 잦아드는 두통을 느낄 수 있었다. 간신히 눈을 뜨니 난생처음 보는 이국의 장식이 눈앞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가볍게 눈가를 쓸고 뺨을 문질렀다. 자신이 지금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볼을 꼬집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대체…….”
여기는 어디야?
정신이 어느 정도 드니 머리가 아픈 것도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그녀가 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긴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창문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그대로 말문을 잃고 말았다.
처음 보는 풍경은 그렇다고 치고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산은 전혀 푸릇푸릇하지도, 그렇다고 앙상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그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산이었다.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광활하고 또 광활한, 열기가 느껴지는 사막이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