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85)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10화
“……아.”
그녀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북부로 가는 길 위에 있었는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푹 자도록 해, 카리나. 눈을 뜨면 내 아름다운 나라를 구경시켜 줄 테니.”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그녀가 몸을 홱 돌리자 때맞춰 밖에서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일어났군, 카리나.”
“…….”
눈에 익은 인물이었다.
자신을 ‘카산’이라고 소개했던 남자는 저번과는 다르게 화려한 장식을 온몸에 걸친 채 상반신을 탈의하고 있었다.
그뿐이면 말문이 차라리 덜 막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반쯤 헐벗은 것처럼 보이는 가벼운 차림의 화려한 여자들도 가득했다. 몸을 감싼 천은 안이 비칠 듯 말 듯 아주 얇았고 가슴골과 허벅지가 확 파여 드러나 있었다.
“그대에게 거친 약물을 쓰게 돼서 미안할 따름이야. 사정이 조금 급했거든.”
“……진짜 별 미친 새끼를 다 보겠네.”
카리나가 헛웃음을 삼켰다. 밀라이언이 종종 쓰던 어투가 옮기라도 한 것인지 내뱉어지는 말은 그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카리나의 말에 여자들이 얼굴을 확 구겼다.
“계집이 감히 샤께 무슨 말버릇이냐!”
“아아, 됐다. 내가 실례를 범한 건 맞으니 말이야. 갑자기 데려와서 화가 났을 건 이해해.”
카산이 호쾌한 듯 손을 가볍게 흔들더니 그 손을 그대로 힘껏 휘둘렀다.
짜악-!
살결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들리더니 이윽고 카리나에게 언성을 높였던 여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녀는 너 같은 것이 범접할 수 없는 귀한 존재다, 함부로 말을 낮추지 말도록 해. 주제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무릎걸음으로 몸을 돌려 카리나의 앞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됐, 어요. 난 괜찮으니까 일어나세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카산이 손을 까딱하자 그녀가 다시 일어나 뒤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카리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후궁이 무례를 범한 건 사과하도록 할게. 부디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후궁?’
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후궁을 때린 거야? ‘너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행태였다.
애초에 카리나가 기분이 나쁜 이유는 여자가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막말을 하면 한두 마디 정도 할 수도 있는 거지.
“무례를 범한 건 저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야. 이건 데려온 게 아니라 납치고!”
카리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 날 돌려보내 줘. 밀라이언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미안하지만, 그럴 마음은 없어. 예술의 ‘예’ 자도 모르는 제국, 그것도 북부의 야만인 따위에게 그대 같은 보석을 넘겨줄 수 있을 리가.”
카산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카리나가 입을 벌렸다가 이윽고 얼굴을 확 구겼다.
“나는 보석이 아니고 밀라이언도 야만인이 아니야. 당신이 바라는 게 무엇이든 나는 이뤄 줄 마음이 전혀 없어.”
가녀리고 약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카리나가 으르렁거리는 것을 본 카산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정말 그대는 재밌어. 하지만, 북부로 가면 그대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어차피 죽음뿐이야.”
카산의 말에 카리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단호한 말이 퍽 기분 나쁘면서도 문득 떠오른 꿈속에서 본 제 미래에 차마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장담하건대 그대는 내 곁에 있어야 해. 창조의 기적은 나나 내 국민들처럼 예술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마땅한 거니까.”
“…….”
“그런 곳에 있어 봐야 마음은 썩어 문드러질 거고 그대는 망가지기만 할 뿐이야. 그러다 결국 광기에 먹혀 스스로의 몸을 불사르겠지.”
카산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마치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봐 온 사람처럼.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내 나라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예술가들이 아주 많아. 창조의 예술가는 없지만 말이야. 우리는 예술의 신에게 선택받은 거야. 그대와 나는 아주 귀한 존재야.”
그는 나르시즘에 빠진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가슴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시시각각 꺼져 가는 생명이 뭐가 저렇게 즐겁다고 그러는 걸까.
“나는 귀하지도 않고 예술의 신 따위에게 선택받고 싶지도 않았어. 궤변을 늘어놓을 거라면 날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기나 해.”
카리나의 말에 카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 외인데.’
조금 강압적으로 나가면 쉽게 굽힐 거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에 그녀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가녀린 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생각보다 단단한 나무였다. 게다가 17살 답지 않은 분위기나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런 위대한 힘을 내려준 신을 부정하는 말을 정면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그대는 이 힘이 얼마나 위대한 힘인지 모르는군.”
“알아, 대단하다는 것. 하지만 쓸 때마다 생명을 가져가는 기적 따위가 왜 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이 신의 힘을 빌려 쓰는 데엔 어쩔 수 없이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하지만, 대가를 다른 거로 치를 수도 있지. 굳이 우리의 생명력을 쓸 필요는 없어.”
카산의 말에 카리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다른 대가를 지불하는 방법이 있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꿈속의 자신은 그렇게도 억울하고 허망하게 죽어 가야 했던 것일까?
“무슨 방법이 있는데?”
“당장 알려 줄 순 없으니, 차차 알려 주도록 하지. 그대는 내 반려가 되어 주었으면 하거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근본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카리나는 말문을 잃어버린 채 그저 멍청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에 대단한 이유가 있기라도 한 건가 했더니 이유는 무슨.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방금 상대하고 싶은 마지막 이유도 잃었으니까 이만 돌려보내 주세요.”
심지어 화를 내고 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찮기 짝이 없는 이유였으니까.
“‘샤’라면 왕이라는 뜻이죠? 당신이 진짜 왕이고 나라를 위한다면 저 같은 걸 왕비 자리에 올리면 안 될 텐데요.”
“왜지? 카리나, 그대가 제국 따위에 갇혀 있어서 몰랐겠지만 우린 남들과 다르다. 우리는 후대를 생산할 의무가 있어. 알고 있나?”
“아뇨.”
카리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예 고개도 돌린 것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보이지도 않았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카산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지,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지 모르는군.”
“관심 없다고 몇 번 말해야 그 귀는 내 얘기를 들어줄 건데요?”
그림을 그려서 당장에라도 밀라이언에게로 통하는 문을 만들고 싶었다.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까지 능력을 아끼면 무엇이 되겠는가. 다행히 그녀가 부리는 기적은 펜과 종이만 있으면 가능한 기적이었다.
‘능력을 그렇게 욕하면서도 이럴 때 능력에 기댄다는 게 우습긴 하네.’
그러나 카리나는 약한 스스로를 인정했다. 강인한 무력도, 대단히 뛰어난 두뇌도 없는 그녀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우리 같은 선택받은 이들만이 서로 노력해서 더 위대한 후대를 생산할 수 있는 거야. 그대도 이 나라를 돌아보면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 거다.”
“…….”
“일단 쉬도록 해. 아직 약 기운이 덜 풀렸을 테니 식사는 저녁에 하도록 하지. 간단히 요깃거리를 보내라고 해 두지.”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대체 무엇을 보고 자신에게 매달리는지 그녀로선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나비 한 마리가 만들어지는 그 장면이 그토록 탐이 났던 걸까?
“그리고 카리나, 이들 중에 마음에 드는 이를 골라보지 않겠어? 앞으로 네 시중을 들 사람이야.”
“필요 없어, 날 내보내 줘.”
“흠……. 그대는 의외로 고집이 세군. 하지만 나도 제법 고집이 센 편이야.”
카리나가 이마를 짚었다. 진짜 말이 통하질 않았다. 지금 누가 누가 더 오래오래 고집을 부리나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 상황을 저렇게까지 가볍게 여기는 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븐과 란으로 하는 게 좋겠군.”
“당신 내 말을 듣고는 있어요?”
“듣고는 있지만, 그대도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니까 말이야.”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는 데 대체 어떻게 들어주라는 건가요? 그리고 시중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카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젛었다. 마치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그 표정에 말문이 막힌 것은 도리어 카리나였다.
카산이 손을 들어 까딱하자 두 여인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깊게 숙였다. 화려한 차림의 두 여인이었다.
한 사람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새하얀 살결이 유독 눈에 띄었고 또 한 사람은 살짝 탄듯한 피부색에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그녀들도 다른 여자들처럼 살결이 비치고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얇은 실크로 된 옷이 망토처럼 펄럭거렸다. 카리나는 눈을 둘 곳을 모르고 얼굴을 붉혔다.
“후궁 중에서도 제일 뛰어난 아이들이야. 눈치도 빠르고 내가 가장 믿는 이들이지.”
카리나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그냥 대화를 포기했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토록 짜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럼 쉬도록 해.”
“당신은 후궁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를 또 당신 여자로 들이겠다는 거예요?”
“그들은 후궁이지, 왕비와는 다르잖나?”
그냥 상식이 안 통하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저 마지막 대답으로 대화하기를 완전히 포기했다.
“아,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기적을 만들어. 그러니 펜과 종이 같은 건 물론 물감이나 붓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절대로 주지 말도록 해.”
“네, 샤.”
두 여인이 허리를 숙였다. 완전히 카리나의 말은 배제된 채로.
‘밀라이언.’
카리나는 한숨을 쉬며 갑자기 사라져 당황하고 있을 그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