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9)
>19 화>
기억이 흐릿했다. 정확히는 카리나의 이미지가 흐릿했다.
달칵거리는 소리에 상념에 빠져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레오폴드 백작 부인이 방으로 들어오려다 말고 카시스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카시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냥, 잠시 생각나서. 당신은 무슨 일이오?”
“아침에 식사할 때 문득 카리나의 빈자리가 보인 게 자꾸 신경쓰여서 와 봤어요.”
백작 부인, 달리아가 조금 멋쩍은 듯 말했다.
이곳에 오는 길이 어찌나 익숙하지 않던지 그녀도 몇 차례나 멈췄다가 뒤를 돌아보길 반복한 끝에 도착한 곳이었다.
“그건 뭐예요?”
“아, 카리나가 그리던 그림인 것 같아.”
카시스가 종이를 달리아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림을 살폈다.
끝에서 끝을 훑는 그녀의 시선 이 점점 커졌다. 이윽고 오른쪽 아래에 다다른 달리아의 시선이 떨렸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실력? 카리나가 원래부터 그림을 그렸나?”
“어릴 땐 종종 가져와서 보여 주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부끄러운지 보여 주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질렸다고 생각했는데…….”
달리아의 시선이 다시 그림에 꽂혔다. 설마 아직도 그리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카리나는 잘 있으려나요?”
“똑똑한 애니 어떻게든 잘하고 있겠지. 일단 친한 귀족들에게 전보를 띄워 보긴 하겠소.”
“하아, 한 번도 속 썩인 적이 없는데 대체 왜…….”
달리아가 가만히 그림을 내려다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차라리 매번 사고를 치고 천방지축이던 페르던이 집을 나갔다고 하면 조금 덜 놀랐을 거다. 그런데 뜬금없이 카리나라니.
“리아도 제 언니가 언제 오냐고 자꾸 묻고 페르던도 찾으러 다녀오면 안 되겠냐고 해서 고민이 많아요.”
“그 아이가 없으니 당신이 리아를 좀 잘 돌봐 줘. 괜히 걱정하고 잠 못 자다가 더 몸 상태가 나빠지면 안 되니까.”
“혹시 모르니 공작에게도 전보를 보내 봐요.”
“페스텔리오 공작에게 말인가? 설마 거기까지 갔기야 하겠소.”
카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힛웃음을 내뱉곤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부 끝에서 북부 끝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힘든가. 개인 마차를 빌렸어도 피곤하고 괴로울 텐데 그 돈으로 갈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겁도 많고 소심한 아이야. 기껏해야 수도 어딘가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해.”
카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도 걱정은 덜어 놓으시오. 수도 쪽에 있는 지인과 그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 전보를 쓰겠소.”
“…….”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내지 않겠다고 하면 그녀가 몰래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달리아는 가만히 그림을 내려다 보았다. 완성되지 않은 그림 속에 담긴 것은 지독한 쓸쓸함과 외로움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불안함이 그녀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 * *
“왜 그런 표정입니까, 리아?”
“……으음, 티 났어?”
아벨리아가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윽고 힘없이 웃고 말았다.
아벨리아는 인형을 무척 좋아하는 터라 그녀의 방 안은 언제나 인형으로 가득했다.
그 가득한 인형 중 가장 아끼는 곰 인형을 꽉 끌어안으며 아벨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언니가 신경 쓰여서. 벌써 집을 나간 지 두 달째잖아.”
녹턴의 물음에 아벨리아가 대답했다.
최근 아벨리아의 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홀연히 떠난 카리나 때문이라고 백작 부부는 추측한 듯했다. 백작 부부는 외로워하고 쓸쓸해하는 아벨리아를 위해 카리나 대신 녹턴을 붙여 줬다.
그래서 그는 의원이 쉬는 날이나 일이 끝나면 이렇게 백작저에 와서 아벨리아의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아벨리아의 말에 녹턴이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카리나에 관한 것은 그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었다.
망설이던 녹턴이 이윽고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카리나 레오폴드.
존재감 없고 조용한 사람.
외모가 뛰어난 가족들 사이에서 칙칙한 다갈색 머리카락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푸른 눈동자만큼은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헤헤, 언니가 잡아 줄 걸 믿고 있었어요.”
“……믿지 마.”
하지만 그때 스치듯 작게 중얼거렸던 말은 무척 음울하고 어두웠다. 다정함을 연기하던 여인의 얼굴이 깨어져 차갑게 굳은 것을 녹턴은 보았다.
“있잖아. 옛날부터 내가 아플 땐 언제나 언니가 옆에 있어 줬거든. 그래서 친구가 없어도 외롭지 않았어.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해도 읽어 주고 함께 자 달라고 하면 함께 자주기도 했 어!”
“그랬군요.”
“내가 외롭다고 하면 친구도 안 만나고 곁에 있어 줬어! 사실 어릴 땐 언니만 자유롭다는 게 조금 질투 나서 일부러 맨날 외롭다고 해서 만나지 못하게 한 것 도 있지만.”
“카리나 아가씨는 좋은 언니였나 보네요.”
녹턴이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어쩌면, 카리나는 당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을 해 주려다가 녹턴은 몇 차례 그것을 목 뒤로 삼켜 냈다.
그것은 괜히 아벨리아에게 상처가 될 거다. 녹턴은 제 여동생을 닮은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응, 당연하지. ……그러니까 곧 돌아오겠지?”
“당신을 생각한다면 그러겠죠.”
“그랬으면 좋겠다.”
생글생글 웃는 아벨리아의 웃음에 녹턴도 마주 미소 지었다.
최근 레오폴드 백작가의 분위기는 초상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론 밝은 듯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곳저곳 수소문을 하지 않는 곳이 없는 듯했다.
심지어 사교계에도 알음알음 소문이 나는 것도 모자라, 알만한 사람들은 레오폴드 가문 둘째 여식의 가출 소식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까발려진 것에 비해 그녀의 소식은 거의 전무 했다는 것이다.
들어온 정보라곤 기껏해야 수도에서 묵었던 여관을 알아낸 정도였다. 흔한 머리카락 색에 심지어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다닌 모양이니 찾기 힘들 법도 했다. 사실 수도는 작정하고 몸을 숨기면 얼마든지 숨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무사하다면 연락 한 번 할 법 한데.’
녹턴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픈 동생이 걱정할 걸 생각한다면 무사하다는 내용의 편지 한 통 정도는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제 언니를 걱정하느라 눈에 띄게 우울해져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는 아벨리아를 보며 녹턴은 속이 쓰렸다.
“아니면 얼른 건강해지셔서 찾으러 가 보시면 되지요.”
녹턴이 부드러운 말투로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의 시선이 아벨리아를 천천히 훑었다. 그래도 예전보다 혈색이 좋아진 아벨리아는 입술도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름다운 금발이 허리께에서 흔들리며 금색의 속눈썹이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그럴까?”
아벨리아가 키득거리며 맞장구쳤다.
“아! 그리고 언니가 얼마나 용감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벌레도 대신 잡아 줬고, 산책하러 가달라고 조르면 못 이기는 척 들어주기도 했어.”
녹턴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재잘재잘 떠드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언제나 언니로 시작해서 다른 곳으로 빠졌다가 또 언니에 관한 얘기로 돌아오곤 했다. 최근 카리나가 없어진 후론 더욱 그랬다.
그가 아벨리아를 처음 만났던 것은 대략 3년 전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녹턴이 만난 병약한 아가씨는 아픈 와중에도 무척 잘 웃는 소녀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제 여동생을 닮았다.
늘 아파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지켜 주지 못한 제 동생과 닮아 있었다.
녹턴은 아벨리아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녹턴이 보기에 카리나는 대단한 구석 따윈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발견한 언니의 대단한 점은 언니가 그리는 그림이야.”
“그림?”
아벨리아의 뜬금없는 얘기에 녹턴이 눈을 크게 떴다.
“응, 우연히 언니 방에서 발견 했는데 엄청 잘 그려. 얼마나 멋있는데. 내가 발견하니까 부끄러웠는지 조금 화를 내긴 했지만…….”
말간 아벨리아의 웃음에 녹턴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금시초문의 이야기였다.
덮은 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녹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 아가씨가 그림을 그리시나요?”
“응, 엄청 대단해! 막 진짜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어. 녹턴도 궁금해? 언니 몰래 한장 가지고 왔는데 한번 봐 볼래?”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는 아벨리아를 보며 녹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고 싶네요. 대신 흥분하지 말고 진정한 후에 부탁드려요.”
“아, 흥분하지 않았어. 녹턴은 잔소리꾼이야.”
“진정하셨으면 보여 주시죠, 아가씨.”
녹턴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침대 옆에 있는 서랍을 뒤적거린 아벨리아가 녹턴의 손에 종이 한 장을 올려 뒀다. 새하얀 도화지 한가득 연필로 스 케치해 둔 것이 가장 먼저 보였다.
“미완성이네요?”
“응, 이유는 모르겠는데 완성된 건 하나도 없더라고. 그나마 제일 완성도 높은 걸 가져왔어. 이건 최근에 그린 밤하늘인가 봐.”
아벨리아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져온 건 언니가 돌아와도 비밀이야.”
검지를 제 입술을 꾹 누르며 쉬잇 소리를 내곤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는 아벨리아를 보며 녹턴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기대감이 전혀 없던 녹턴의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이걸 정말 카리나 아가씨가 그렸습니까?”
“응, 근데 나도 언니가 그림을 그렸다는 건 최근에 알았어. 언니는 원래 자기 얘기를 잘 안해서.”
입술을 쭉 내민 아벨리아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불만이 그득 느껴지는 표정 너머로 걱정이 느껴졌다.
“이렇게 대단한 걸 그렸는데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걸까? 나 같으면 어머니께 달려가서 분명히 칭찬해 달라고 방방 뛰었을 거야.”
카리나의 행동을 떠올리던 아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잘 그렸으니까 분명히 엄청 칭찬을 받았을 텐데.’
아벨리아는 카리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데, 왜 꼭꼭 숨긴 걸까?
‘언니는 신기해. 혼자서도 뭐든 다 잘하고.’
겁도 없고 힘들 때 늘 다른 사람을 부르는 자신과는 다르게 언제나 혼자서 해결하려고 한다.
이번에도 또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나간 것이 분명하겠지. 아벨리아는 언제나 그런 카리나의 용기가 무척 부러웠다.
아벨리아를 앞에 둔 채 녹턴이 한참 동안 말없이 그림을 살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가씨가 하나 있네. ……가 봐야 할 것 같아. 북부에는 예술병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의원이 없을 테니.”
“그 아가씨 제법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 같았는데…….”
“뭐더라. 무슨 리나였는데…… 일단 잘 부탁한다.”
윈스턴과의 대화가 녹턴의 머릿 속을 휑하니 스치고 지나갔다.
물끄러미 그림을 내려다보던 녹턴은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턴? 가려고?”
“네, 끝내지 못한 일이 있는 걸 방금 떠올려서요.”
부드럽게 웃은 녹턴이 그림을 아벨리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아벨리아가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녹턴에게 인사를 건넸다.
곧장 의원으로 돌아온 녹턴이 의료 차트를 뒤적거렸다.
윈스턴이 떠난 후 지난 한 달간 받은 환자들을 제외하고 그 이전의 환자들을 차트를 넘기며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한참이나 뒤로 넘겼을 때 비로소 종이를 넘기던 녹턴의 손이 멈췄다.
[이름: 카리나병명: 예술병으로 추정…… 남은 수명 길어야 1년.
기타: 그림, 생존 확률은 희박함…….]
차트에 떡하니 적힌 글자에 녹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윈스턴도 답답했던 듯 흘려 적은 글자 끝에 온점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말도 안 돼.”
녹턴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