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91)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16화
* * *
“그러면 아마도 이 일은 해결이 될 거예요. 거절하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요. 제가 다 설득하고 다니기에는 너무 많아서요.”
“그래, 사람을 시키도록 하지.”
“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강제로나마 먼저 권능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이 검을 두고 간다면 어떻게든 수를 쓸 것이다.
카리나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사라지지 않고 있던 문에서 손이 뻗어 나와 그녀를 잡아챘다.
“……아!”
“카리나!”
“네가, 한 거냐.”
카산이었다.
한껏 험악해진 얼굴로 살벌한 낯을 한 그는 더이상 자유분방한 사내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교육받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철창에 갇힌 가여운 짐승처럼 보였다.
“네가 뭔데 내 나라를 어지럽히지? 네가 뭔데…… 그들의 권능을 멋대로 빼앗아 가냐.”
“미쳤군, 감히 어디에 손을 대.”
검을 뽑으려던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방패막이로 삼는 카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카리나가 조용히 눈짓을 하자 밀라이언이 그녀에게 받았던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뭔데! 내 나라는 이대로도 좋아. 너 같은 계집 따위가 멋대로 헤집어도 되는 게 아니라고! 어디에 가서도 불행한 삶이잖아? 누구도 널 이해해 주지 않을 테고 누구도 네 고독을 알아 주지 않을 텐데. 남들보다 특출나고 뛰어난 우리를 이해해 줄 사람은 서로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르지?”
카리나의 낯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군주의 자격이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는 이미 곪고 곪아서 엉망진창이었다.
“고독한 사람들끼리 만나 봐야 고독함이 한층 더 배가될 뿐이야. 우리는 사랑받는 법도 모르고 사랑하는 법도 모르니까, 결국 서로를 또 갉아먹을 테야.”
카리나는 카산에 대해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무척이나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으리라는 것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이러는 것도 결국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라는 것 또한.
“당신은 조각하는 걸 정말로 좋아하지?”
“……뭐?”
“그런 것 같아서. 당신이 조각한 걸 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러니까, 미리 사과할게. 미안해. 나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한들, 당신의 의견만큼은 존중할 수가 없어.”
카산의 예술병은 반드시 그의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가 조각하고 그가 사랑한 것들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그리고 타인을 멋대로 휘두르려고 한 죗값이기도 했다.
“나는 당신이 차라리 세상을 보고 다양한 걸 조각했으면 해.”
카리나가 밀라이언에게서 순식간에 단검을 건네 받아서 그대로 몸을 돌려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카산의 눈이 커졌다.
“권능 없이도 분명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새하얀 빛이 퍼져나오며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카산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끔찍하다는 듯 비명을 내지르는 그 표정에 카리나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마아아아!”
절규와도 가까운 목소리에 카리나가 숨을 삼켰다.
“신경 쓰지 마. 그대에게 손을 댄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니까.”
밀라이언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헤어지기 전보다 한층 자연스러워진 스킨십에 그녀가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당신이 한 나라의 주군이라면, ‘내 나라’라고 칭하지 마요. 여자들은 당신 도구가 아니에요. 보필해 주는 후궁들도 모두 뛰어난 여인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무시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도 애정을 받으려면 충분히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무너지는 카산을 보며 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난 이제 쓸모없는 존재가 됐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절망감이 가득 담겼다.
하지만, 이제부턴 그녀가 신경을 쓸 일은 아니었다. 나라는 바뀔 것이다. 작든 크든 바뀔 수밖에 없겠지. 이 검으로 해결을 해 버린다면 더는 강제적인 권능이 생겨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당신이 바뀌고자 하면 바뀔 수 있어요. 나도, 그러려고 그 작은 집안을 벗어난 거니까.”
카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녀는 꿈속의 자신처럼 아프고 아픈 계절을 모두 지내고 상처를 받으며 죽기 직전에나 그 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카리나는 곁에 밀라이언이 있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이 먼 사막을 건너와 준 사람이. 그리고 그로부터 받은 애정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도 변할 것이다. 꿈속에서와 같이 목숨을 걸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공존하며 살 것이다.
그의 말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돌아가자, 카리나.”
“네.”
결국,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일 것이다. 사실 그녀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이런 나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살아갔겠지.
신의 권능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도 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정말 예술의 도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예술의 신이 사랑한 첫 번째 신도가 만든 제국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어쩌면 결국 신이 개입해서 문제가 생긴 거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기적은 없어도 좋았을 텐데.”
그저 축복을 내려준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감사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뭐든지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언젠가 당신의 작품을 어딘가에서 보면 좋겠네요. 카산.”
“……!”
무너진 카산을 내려다 보던 카리나가 몸을 돌렸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요, 밀라이언.”
“천만에.”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볼수록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여인은 왜 이렇게 눈에 담을 때마다 제 품에 힘껏 끌어안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기왕이면 꼭꼭 숨겨서 누구도 볼 수 없게 해 버리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카리나. 처음 뵙겠습니다. 페리얼 칼로스라고 합니다.”
“……아, 네!”
카리나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반가워요, 페리얼.”
그녀의 친근한 부름에 페리얼 칼로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윽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부드럽게 웃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도와 드리려고 왔는데요.”
“그거 어쩌면 해결이 된 것 같기도 해요. 드릴 것도 있어요. 보면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그런가요?”
의아한 낯으로 페리얼 칼로스가 물었다.
“네, 가면서 얘기해 드릴게요.”
“저야 좋죠, 밀라이언이 하도 말을 안 하기에 어떤 분인가 했는데 아주 유쾌한 분이셨군요.”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별거 아니네, 북부까지 길이 멀군. 빨리 가도록 하지.”
페리얼이 두 사람을 재촉했다.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페리얼 칼로스를 보며 그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옆을 걷던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밀라이언이 어깨를 움찔 떨더니 흘긋 그녀를 보았다. 카리나가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밀라이언.”
“그래.”
“사실은요, 저 꿈을 꿨어요. 아주 서글프고, 가슴 아프고, 그렇지만 분명히 마지막엔 행복했던 꿈을요. 미련이 가득 남아서 어떻게든 살고 싶었지만, 살지 못했던 꿈이요. 기적만이 오로지 제 세계였던 삶에 어느 날 태양이 찾아온 꿈을요.”
“…….”
밀라이언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아서.
“밀라이언, 우리 언젠가 겨울 산맥에 가요. 둘이서도 가고 아이가 생기면 아이랑도 가고요.”
밀라이언의 동공이 크기를 키웠다. 꿈속에서 보았던 서럽게 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밀라이언이 놀란 듯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응. 응, 물론이지. 가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자.”
“좋아요.”
카리나가 웃으며 밀라이언의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천천히 웃으며 그의 뺨에 수줍게 입을 맞추곤 훌쩍 멀어졌다.
“우리 결국 겨울 산맥 못 간 거 알아요?”
“……그러게. 가 볼 걸 그랬어.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볼걸.”
후회로 가득 찼던 어느 봄날, 과거의 기억 하나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흩어졌다.
“밀라이언, 우리 행복해져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제게 그런 말을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할 말이야. 잊지 마, 그대는…… 아마도 내가 평생 사랑하게 될 유일한 사람일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나 두고 떠나지 마.”
“네, 그러도록 노력할게요.”
불어오는 바람결 위로 서로에게 속삭인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 느리게 정원을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