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92)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17화
* * *
“무슨 바람인가? 아틀리에, 자네는.”
“몰라.”
“얼마 전에 시간의 신에게 다녀오더니 뭐 재미없는 미래라도 봤나? 아무리 자네가 아끼는 아이라고 한들 인간에게 미래를 보여 주는 건 금기에 해당한다는 걸 알 텐데.”
“…….”
턱을 괸 예술의 신 아틀리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봐, 결국 운명이 완전히 뒤틀렸지 않나. 내 아이까지도 말이다.”
전쟁의 신이 왜 그 무거운 걸음을 떼고 제 영역까지 넘어왔나 했더니 자신의 아이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불만스러운 건 도리어 이쪽이다.
‘정확히는 시간을 돌린 거지만.’
미래를 겪고 나서 한동안 충격에 시름시름 앓던 아틀리에는 결국 시간의 신을 찾아가 그가 원하는 대가를 내주고 시간의 신이 가진 권능을 이용해서 시간을 되돌리기에 이르렀다.
아마 주신에게 들키면 크게 혼이 나고 꽤 긴 시간 근신형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을 감안하고 벌인 짓이었다.
‘내 아이를 두 번이나 잃는 것보다는 낫지.’
되지도 않는 책을 써서 내려보낸 것이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는 과거에 저질렀던 멍청한 짓을 이제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대대손손 축복을 내리는 게 아니었지.’
그것을 악용해서 저렇게까지 뿌리가 썩게 될 줄은 몰랐다. 카틀란을 처음 건국했던 그 녀석이 보면 아마 크게 슬퍼했을 것이다.
“이봐 듣고 있나?”
“시끄러워, 전쟁의 신이면 가서 전쟁이나 하던가. 귀찮으니까 옆에서 왱왱거리지 마.”
곱슬머리 소년의 형상을 한 아틀리에가 귀를 후비며 침상에 대충 누워 버렸다. 벌꿀색 눈동자에선 권태감이 짙게 묻어났다.
무게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가벼운 그의 행동에 전쟁의 신의 고지식한 표정이 한층 굳었다. 전쟁의 신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아틀리에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여성체이면서 왜 그 모습을 고집하는지 알 수가 없군.”
“내가 무슨 모습을 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잔소리꾼 새끼가 왁왁 시끄럽게 우네.”
“네놈은 체통이라는 게 없나?”
소년이 이를 악물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이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침상에서 내려오는 순간 소년의 형상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황금빛 월계관을 쓴 연두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되었다.
“시끄럽고, 나가. 곧 시간의 신 녀석이 올 거니까.”
“……시간의 신? 크로노스 놈이 여긴 왜 오지?”
“내가 그것도 알려줘야 해? 짜증나게 굴지 말고 좀…….”
“왜 오냐고 물었는데.”
전쟁의 신, 카일론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름다운 얼굴에 그녀가 가볍게 그를 밀었다.
‘내 아이에게 멱살 잡힌 것에 충격을 받아 뭐든 해 줄 테니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했다고 어떻게 말해? 그리고 그 대가가 시간의 신 놈의 시중을 드는 거라니.
그러나 제 아이에게 잡힌 것은 멱살뿐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영혼까지 탈탈 털려 버렸다. 한동안 재기불능이 된 제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네가 알 게 뭐야?”
“나도 있을 거다. 그 미친 사이코 같은 놈이 뭘 할 줄 알고. 자네는 상대를 봐 가면서 사귀는 걸 추천하지.”
“아, 모르겠다.”
여인이 다시 소년의 형상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카리나라는 그릇은 아틀리에가 최초의 아이 다음으로 눈여겨보고 보듬었던 인간의 아이였다. 이번 아이는 죽으면 언젠가 제 곁에 두려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권능을 듬뿍 주었다. 영혼이 부서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애도 썼다. 혼자서 단단해지기를 바랐다.
그뿐이랴, 어릴 때부터 정성을 다해 보듬었고 축복을 내리기도 했다. 그의 바람에 보답하듯 아이는 혼자서도 웅장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부쩍 늘어가는 실력을 보며 그는 제법 놀랐다. 물론, 혼자 뿌듯해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아이는 그 안에서 고통스러웠다고 하니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실력은 대단했다. 죽을 날이 가까워졌을 때 아이는 마치 자신처럼 권능을 사용했다. 그림을 매개체로 하지 않아도 상상으로 움직이고 만들었으며 눈앞에 펼쳤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뒤에 드러난 진실은 정말 가관이었다. 그가 쓸데없이 재판을 건 이유는 망할 드래곤을 핑계 삼아서 아이를 제 곁에 데리고 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이 열리기는커녕 설마 재판장에서 멱살을 잡혀서 욕을 먹을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아이에게 멱살을 잡히고 욕설을 듣다니 아직도 그 일이 꿈만 같았다.
“마음에 안 들어, 내 아이가 뭐가 아쉬워서 네 아이 따위에게 매여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아틀리에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정한 일에 또 손을 쓰고 싶진 않았다. 괜히 손을 썼다가 아이가 죽었을 때 멱살이 잡히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너는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하는군.”
“맘에 안 들면 꺼지던가. 남의 영역에 들어와서 난리야.”
아틀리에는 허공에 비치는 인간계를 보았다.
손을 붙잡고 거니는 카리나와 밀라이언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을 푹푹 흘렀다. 솔직히 여러모로 불만스럽지만 제 아이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좋다는데 자신이 져 줄 수밖에.
‘나도 다 죽었군.’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해 보이는 두 아이를 보며 아틀리에가 픽 웃었다.
행복하게 생을 마치고 오면 그때 다시 제 곁에 있으라고 권해 봐도 될 일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전쟁의 신도 제 아이를 쉽게 만드는 편은 아니고 만들면 항상 자신을 보필하게 만들었으니 저 인간도 언젠가 신계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제 아이도 곁에 있어 주겠지.
“이봐, 아틀리에. 그놈은 언제 와서 뭘 하고 언제 간다고 하나?”
“닥쳐, 좀.”
오랜만에 분위기 잡는데 다 망친다. 이래서 전쟁에 미친 놈들은.
아틀리에가 툴툴대며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아, 날 좋네.”
짜증을 억누르며 낮게 중얼거린 아틀리에가 손을 휘저어 허공에 비치는 카리나와 밀라이언의 모습을 없앴다.
내리쬐는 햇볕이 퍽 따뜻한 하루였다.
Side Story 3. Modern
“자, 신부님. 정면을 봐 주세요. 자꾸 움직이시면 안 되세요.”
“아, 네…….”
그녀가 작게 대답하며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남편과의 정략결혼이라니 말문이 턱 막혀서 할 말이 없었다. 이게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고 말이다.
‘어차피 무심한 사람이라고 들었으니까.’
듣자 하니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여자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으니 가서 조용히 그 집안에 누를 끼치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강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결벽증이 심한 사람이라는 얘기도 있어서 방도 따로 쓰게 될 확률도 높다고 들었다.
그녀는 신부 대기실에 앉아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받는 제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고.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가 유독 튀었다. 먼 핏줄 중에 외국인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옅어졌을 DNA가 하필이면 이 세대에 와서 제게 또렷하게 나타날 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오죽하면 자신이 태어났을 때 유전자 검사를 했다는 얘기까지 있다.
상대도 외국계 기업을 운영하는 한국인이라고 들었다. 이름이 백사후라고 했던가. 이름에 ‘사자’를 뜻하는 한자가 들어가 있어서 제법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다.
리나는 이런 제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바빠서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결혼식장에서 영원을 맹세해야 한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그동안 신경이 쓰여서 작품 작업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들어와 있는 주문도 몇 개 있었는데 전부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아틀리에도 오픈하려고 했었는데 갑작스럽게 정해진 결혼식에 다 뒤로 일정을 밀어야 했고.
상대의 무례함에 짜증이 일었다.
‘그래도 이걸로 더는 시끄러운 소리 듣지 않아도 될 테니까.’
상대가 웬만한 정신이상자 변태가 아닌 이상 웬만한 건 감내할 마음이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 누군가에게 정략결혼을 가야 하는 건 정해진 일이었다.
“자, 이제 입장하시면 됩니다.”
속전속결로 끝난 세팅에 결혼식도 빠르게 시작되었다.
최소한의 하객으로만 진행되는 작은 결혼식인 탓에 오히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더 좋은 것 같았다.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인데 아쉬움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아니지만, 딱히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터라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단상 위에 남자가 올라가 있었다. 키가 제법 큰 사내였다.
흘긋 보기만 했는데도 몸의 비율이 아주 좋았고 자잘한 근육도 있어 보였다. 딱 달라붙는 검은색 예복은 그에게 상당히 잘 어울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턱선이 무척 단정하고 수려했는데 눈매는 살짝 날카로웠다.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데다가 근육 탓인지 몸도 상당해서 그 앞에 서면 자신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를 건넸다.
가벼운 웃음기를 머금은 채 건넨 듯한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있었으며 귀에 쏙쏙 박혔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솔직히 사진조차 받아보지 못한 탓에 외모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포기를 했었는데, 그는 정말 그녀가 봤던 어떤 남자보다도 외모가 출중했다.
‘……스물일곱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거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네.”
그녀가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맹수를 눈앞에 마주한 듯한 기분을 차마 감출 수가 없다.
다행히 그는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주례가 시키는 대로 행동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건네고 퇴장을 하는 내내 그녀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빨리 끝나고 쉬고 싶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 때문에 발은 아프고 조일 대로 조이는 코르셋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그리고 옆의 사내는 조금 무섭고 부담스럽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