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94)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19화
* * *
지잉.
자기 전에 맞춰 놨던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비몽사몽 잠을 자던 그녀가 느리게 눈을 떴다. 아까 차에서 잠들어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휘청거리며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옷만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와 다시 잠을 자던 참이었다.
“뭐야……?”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제게 연락을 줄 사람이 딱히 많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 대부분은 그녀가 재벌가의 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또한 오늘 결혼을 한다는 사실도 몰랐으니 말이다.
[미안합니다, 퇴사한 직원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조금 더 늦어질 것 같습니다. 자정까지는 반드시 들어가겠습니다. 혹시 피곤하다면 먼저 주무십시오.]꽤 거침없던 말투와는 상반되는 굉장히 정돈되고 정갈한 문자였다. 이모티콘 하나 없이 띄어쓰기 하나 쉼표 하나까지 완벽하게 찍은 것이 그가 완벽주의자는 아닐까 고민하게 했다.
“정말 괜찮은데.”
굳이 이렇게 사과 문자까지 보내지 않아도 되는데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픽 웃었다. 그래도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한 것치고는 생각보다 상대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배불뚝이 아저씨나 허세에 찌든 남자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과묵하고 생각보다도 다정했다. 사실은 조금 그에게 압도되기는 했었으나 그가 직설적으로 위협하려는 건 아니라고 말도 해줬고.
‘잘생기긴 했었지.’
그녀가 지금껏 봐온 남자 누구보다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한국인이라는데도 그렇게 이목구비가 또렷한 남자는 처음이었다. 분위기만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 것도 처음이고.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말이 적고 소심한 편이기도 해서 직설적인 그와 성격이 얼마나 맞을지 걱정스럽기는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밖에서부터 부산스러운 걸음 소리가 들렸다. 뭔가 조금 조급한 것처럼 들리는 게 무슨 일이 나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였다.
밖에서 들릴 듯 말듯 아주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던 사내와 그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직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 시간이었네요. 낮에 낮잠을 자기도 했고요.”
“……그렇군요, 늦어서 미안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퇴사한 직원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문자 주셨잖아요.”
그녀가 말하자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신혼 첫날밤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도 무슨 준비가 된 것은 아니기도 했고 첫 만남인 사내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간단히 서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떻습니까? 서로 갑작스러운 결혼이었으니까요.”
“네, 근데 청혼은 그쪽에서 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절 어떻게 아시고…….”
“……우연히 당신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작가가 궁금해졌고 작가에 대해 알아보다가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네?”
“실례인 줄은 알지만, 관심이 생겨서 깊게 알아보니 작품 활동에 있어서 가족들의 반대가 심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일을 급하게 진행하게 됐습니다.”
사내의 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도 못한 고백에 연이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제 집안 사정을 알아봤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전혀 실례라거나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살짝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에게 가볍게 사과를 건넸다.
“제가 당황스러울 걸 압니다. 그러니 당장 뭘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의무로 뭘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께선 그저 제집에서 하고 싶은 작품 활동을 하시면 됩니다.”
“…….”
“단, 마지막엔 반드시 이 방으로 돌아오겠다고만 약속해 주십시오. 다른 곳에서 자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소유욕인지 질투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인지 영 알 수가 없는 사내였다.
새까만 눈동자 안쪽에서 일렁거리는 감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근데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아까도 그랬었고……. 저는 사후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건, 실례했습니다. 아까는 조금 흥분해서 그만.”
그가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간신히 만난 그녀가 쥐죽은 듯 조용히 살 테니 각자 할 일 하고 살자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흥분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름은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저도 미국 이름이 하나 있으니 그쪽을 불러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미국 이름이요?”
“네, 밀라이언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독특한 이름이었다.
“밀라이언…….”
그런데도 어딘가 입에 달라붙는 듯한 이름이다. 그녀의 작은 읊조림에 그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얼굴에 무거운 음영이 졌다.
“특이한데 좋은 이름이네요.”
“다행입니다, 일단 너무 늦었으니 자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부턴 한동안 여기에 둘만 있을 테고요. 말은 저도 편하게 할 테니 리나 씨도 편하게 하세요.”
“그래요…… 아니, 그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녀를 한쪽 팔로 번쩍 들더니 침대에 앉혔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보던 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매만졌다.
“그, 원래 이렇게 사람을 덥석덥석…… 잘 안으세요?”
“그래 보이나?”
“아뇨…….”
“맞아, 아니야. 너 한정이지.”
그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숨결이 섞이는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다가와 읊조렸다. 그 순간 리나의 눈이 확 커졌다.
그가 훅 치고 들어올 때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가볍게 얼굴을 문지른 그녀는 그가 이불을 덮어 주는 것을 보고 순순히 몸을 뉘었다.
“그대는, 생각보다 겁이 없는 모양이야. 첫날 밤인데도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군. 내가 그렇게 남자 구실을 못할 것처럼 보이나?”
그가 협탁 옆에 있는 스탠드를 끄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괜히 이불에 스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침대가 분명히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바싹 붙어오니 열기가 느껴졌다.
“……당장 뭘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남자를 너무 가볍게 믿는군.”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당신이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요. 사후 씨는 나쁜 사람 같지 않거든요.”
그녀의 말에 백사후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느리게 그녀에게 닿았다. 온몸에 오르는 열기를 애써 갈무리하며 그가 이불 속에서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안 나쁘네.’
지금껏 타인의 손길은, 특히나 남자의 손길은 무척이나 불편했었다. 몇 차례 누군가와 사귄 적도 있었지만 제일 오랫동안 간 것이 3개월 정도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불편하지도 않고 거북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네.’
겉만 보면 그동안 봐 왔던 어떤 사람보다 냉정하고 과묵하고 무서운 데다가 쌀쌀맞기까지 한데 말이다. 물론, 실제로 대화를 나눠 보니 그렇게까지 쌀쌀맞지는 않은 것 같지만.
특히나 훅훅 치고 들어오는 플러팅은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지금 이 스킨십도 마찬가지고.
“그대는 모를 거야. 내가 너를 얼마나 만나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그렇게 정보 찾기가 어려웠어요? 생각보다 제 정보가 그렇게 없진 않았을 텐데요.”
“없었어. 어디에도 없었어. 어디에도 그대가 없었지.”
그가 그녀를 끌어당겨 느리게 품에 가뒀다. 너른 품에 안기는 것이 썩 익숙하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처연하게만 들려서 리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늘 침대에 누워서 두세 시간은 뒤척이곤 했었는데 오늘따라 눈이 가물가물했다. 심지어 오늘은 낮에 낮잠까지 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잘 자, 카리나.”
“…….”
멀어지는 현실 사이로 애정이 듬뿍 담긴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