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95)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특별 외전 20화
* * *
“좋은 아침, 카리나.”
며칠째 눈을 뜨면 그가 웃는 낯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첫날에는 화들짝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솔직히 너무 익숙해져서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무덤덤했느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고.
“네…….”
그녀가 푹신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듣자 하니 침대 가격만 1억 가까이한다고 들었는데, 정확히 알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푹신함을 즐기기만 하기로 했다.
“아까부터 핸드폰이 울렸어, 연락이 올 곳이 있었나?”
“아, 글쎄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뻗었다. 학과에서 온 문자였다. 단톡방에 쌓인 연락이 산더미였다. 리나는 단톡방을 대충 훑곤 개중에 눈에 띄는 제 친구의 문자를 확인했다.
[야, 강리나! 오늘 12시 오리엔테이션 오지? 끝나고 뭐 먹을래? 떡볶이 어때? 새로 생겼대.]한참이나 문자를 보던 그녀가 슬쩍 시선을 들어 화면 상단에 있는 시간을 보았다.
‘11시 15분?’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시퍼레진 그녀의 얼굴을 보던 백사후가 당황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카리나?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학교 오리엔테이션 까먹었어요. 12시까진데! 으악! 나가 주세요!”
“……학교? 학교를 아직 다녔다는 건가? 하지만 이미 졸업을…….”
“네! 이번이 마지막 학기예요. 일 년 휴학했었거든요. 저 12시까지 가야 해서.”
강리나가 정신없는 얼굴로 백사후의 등을 떠밀어 그를 방에서 내쫓았다.
졸지에 같이 쓰는 방에서 쫓겨난 사내가 픽 웃음을 흘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차량을 준비해 두라고 문자를 한 그가 옷방으로 들어가 가볍게 옷을 갈아입었다.
정신없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15분 만에 방에서 뛰어나왔다.
“내려왔군, 차를 대기시켜 놨으니 바로 타고 가지.”
“어…… 고마워요. 근데 밀라이언도 어디 가요?”
“그래.”
“어딜요?”
“그대를 데려다주러 가야지. 오늘은 내가 그대의 운전기사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도 면허는 있었고 굳이 그의 시간을 빼앗을 만큼 운전을 못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급하면 사실 택시를 타면 그만인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난 괜찮은데요. 기왕 쉬는 날일 텐데 푹 쉬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아니, 외출도 하고 싶었어. 대학교 구경은 오랜만에 가네. 어느 대학으로 가면 되지?”
그는 이미 그녀의 짐을 대신 들고 뒷자리에 넣어 버렸다. 그러더니 강리나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고 조심스럽게 보조석에 태우기까지 했다.
당황한 얼굴의 그녀에게 안전벨트까지 손수 매어 준 그가 운전석에 앉았다.
“어디?”
“아, 그…… A대학교요.”
“교실까지 들어가는 걸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겠군.”
조금 지각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지각은 어쩔 수 없죠. 잠깐 민망하면 될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애초에 미리 체크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고 말이다.
그가 엑셀을 밟으며 빙긋 웃었다.
“널 민망하게 만들 순 없지. 미안하지만, 조금 운전이 거칠 수 있어. 그리고 근처에서 기다릴 테니 끝나고 연락해.”
그가 연락처 하나를 종이에 적어 그녀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네? 돌아갈 때는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대와 식사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 나랑 밥 먹기는 싫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녀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꺼내 떡볶이를 권해준 친구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답변을 하며 제안에 대해서는 좋게 거절의 말을 전했다.
차마 방학 동안 남편이 생겨서 이제 예전처럼은 돌아다닐 수 없단 얘기는 할 수가 없었다. 카리나가 이제 겨우 24살임을 생각하면, 무척 이른 결혼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고 말이다.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차가 무섭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 날, 그녀는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조심히 다녀와, 카리나.”
“아, 아…… 아……. 네…….”
그가 고개를 밖으로 내밀자 어딘가 정신이 멍해 보이는 그녀가 허리를 숙여 가볍게 뺨 인사를 받았다. 외국에서 자랐던 때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이런 소소한 스킨십에는 제법 관대한 편이었다.
‘……슬슬 다음 단계로 나가도 될 것 같기는 한데.’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의외로 카리나는 그에게 그리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전생의 기억 같은 것이 아직도 몸에 있는 것은 아닌가, 괜한 기대감이 들 정도였다.
“미치겠군.”
그녀를 볼 때마다 반응하는 제 온몸의 기관들을 가끔은 조금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반신은 정말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세게 내리쳤다.
“천천히, 차분히.”
그가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낮게 읊조렸다. 천천히, 차분하게 가지 않으면 그녀에게 실망을 줄지도 몰랐다. 그런 것은 사절이었다.
“사랑스러워서 미치겠군.”
볼 때마다 입을 맞추고 싶고 품에 끌어안고 싶고 온몸을 쓰다듬고 싶고 뽀얀 살결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같은 방을 쓰고 일을 쉬는 최근에는 대화를 많이 나눈 탓인지 처음보다는 거리감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기는 했다.
“오늘은 분위기를 좀 만들어 봐야겠군.”
집에만 있는 것보단 아예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밀라이언은 제게 연락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둔 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몇 번 지나가고 전화가 금세 연결되었다.
-네, 열흘 동안 연락이 한 번이라도 오면 죽인다는 협박을 당해서 혼자서 과중한 업무를 떠맡은 채 하루에 세 시간도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폴이라고 합니다.
“팽, 지금 나한테 시위하나?”
-세상에, 이게 누구십니까. 절대 핸드폰 열지도 않을 거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던 대표님이 아니십니까?
“……죽고 싶나?”
-아이고, 팽 죽네. 자꾸 이러시면 이직하겠습니다.
그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능글맞은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전생의 팽도 제법 능글맞은 면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경박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세상이 바뀌긴 했지.’
그는 50대, 60대의 팽이 아니었고 30대의 폴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딱히 계급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기 때문에 어쩌면 사람이 바뀌는 것은 당연할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짜증 나는 쪽으로 바뀌는 건 얘기가 좀 다르지.
“시끄럽고 이번에 오픈한 호텔 오늘 가려고 하는데. 가장 좋은 룸 하나 잡아 둬. 레스토랑 예약도 해 두고.”
-호텔이요? 호텔? 사람을 이렇게 업무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대표님은 마님이랑 호텔을 가시겠다니요.
“보너스 좀 얹어 줄 테니 그만 좀 징징거리지.”
-얼마 주실 겁니까?
“두 배.”
-네, 대표님. 금방 알아봐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저도 약속이 있어서 연락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약속?”
-네, 윈스턴…… 아니, 서원 씨와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쪽도 오늘은 시간이 나는 모양입니다.
“……환자나 동료에겐 친절한데 외부인에겐 너무 경계심이 많아서 힘들다고 한 게 엊그제면서 그새 친해졌나?”
백사후는 차량 시트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어쩐지 폴이 제법 텐션이 높다고 했더니 저쪽도 제법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팽은 윈스턴을 여러모로 아낀 데다가 오랜 시간 친구로서 잘 지냈으니 그의 소식이 반가울 법도 했다. 현대에서도 친구는 사귄 모양이지만 옛 친구는 소중한 법이니 말이다. 아무리 상대가 기억이 없다고 한들.
-조금 주변을 맴돌았더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쨌든 확인해서 문자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가 전화를 끊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랬다면 아마 조금 더 일정을 미뤘을지도 몰랐다.
보고서에 왜 그게 빠져 있었지? 생각하다가도 생각해 보니 생년월일 같은 가벼운 신상정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기억도 있었다. 학력 소개를 가볍게 뛰어넘었을 확률이 아무래도 가장 높지 않을까 싶었다.
재깍재깍 흘러가는 시간이 퍽이나 더뎠다. 그는 짧은 한숨을 삼키며 핸들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간은 여전히 잘 가지 않았다.
* * *
[지금 끝나서 내려갈 거예요.]그녀에게서 문자가 온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는 순식간에 안전벨트를 차고 액셀을 밟았다.
대학교 정문 앞 근처에서 잠시 차를 세워 둔 그가 썰물처럼 밀려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여러 명의 또래 친구에게 둘러싸여 밝은 낯으로 웃고 있었다.
문득,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났다.
“평생을 함께해 준 유일한 친구를 어떻게 놓아 버릴 수 있겠어요.”
그녀의 서글픔을 담은 목소리가.
– 친구 사귀기.
그녀가 죽은 뒤 흔적처럼 남았던 버킷리스트의 한 줄이.
“페리얼과 친구를 하기로 했어요.”
“친구?”
“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 무척 기뻐요. 물론, 친구끼리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페리얼과 친구가 되어 기뻐했던 그 모습까지도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를 만나기 전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던 것이 그림이었다. 그림만큼은 죽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환생해서도 그림 쪽에 종사하고 있었다.
가족과의 사이는 또 여전히 좋지 않은 모양이라서 그저 외롭고 고독한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친구가 많이 생겼군.’
질투해야 옳은 것은 알지만, 그녀가 얼마나 이것을 꿈꿔 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는 솟아나는 추잡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과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여자, 여자, 여자. 나쁘지 않다. 그사이에 시커먼 남자 새끼들이 끼어 있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저건 아니지.”
그런데 누가 봐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 남자 놈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커다랗게 웃고 있었다.
차에 기대어 있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리나야.”
답지 않은 목소리에 정문으로 걸어 나오던 그녀가 걸음을 뚝 멈췄다.
대화를 나누던 시선을 옮겨 정면을 보자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차의 주인처럼 보이는 새까만 슈트를 입은 그가 보였다.
“와, 대박. 누구야? 리나 네가 아는 사람이야?”
“아, 응.”
“저거 벤틀리 아니야? X나 간지 난다. 누나, 아는 분이에요?”
“저 사람 누군데 리나야?”
웅성거리는 동기와 후배들에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타인이라고 하기에는 상대가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애인입니다. 리나 학과 동기분들이신가 보네요.”
“헉, 맞아요. 세상에 애인이라고요? 야, 너 저런 존잘남 숨겨 두고 뭐 했어! 미쳤다, 수트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 처음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각으로 만들어 놓고 싶어…….”
“뭐? 무슨 소리야!”
“하, 완벽한 피사체잖아. 진짜 모델 각이다……. 완전히 9등신이네. 8등신은 봤어도 9등신은 처음이다, 처음이야. 진짜 탐난다.”
“다들 좀!”
그녀가 빽 소리를 지르곤 냉큼 그에게 달려가 손을 붙잡았다. 이야기를 듣는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도리어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당황스러움이 물씬 느껴졌다.
“뭐야, 애인이라고 단속 들어가는 거야?”
“으휴, 장난이야, 장난~ 거기에 좀 진심을 곁들인?”
“좋겠다, 리나야. 이번 졸업 과제 모델 해 달라고 해 봐.”
그녀가 벌겋게 물든 얼굴로 손을 연신 휘휘 저었다.
당황스러운 낯을 하는 그녀의 표정을 내려다보며 백사후가 가볍게 웃었다. 확실히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와, 근데 몇 살인데 리나 누나랑 사귀는 거예요? 나이 많아 보이시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사후가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명백한 시비였다. 그것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