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97)
그러나 그의 혀가 입안을 파고드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에게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진짜. 그대는 변한 게 없어.”
입을 맞출 때 상대를 배려해서 숨이 막혀도 꾹 참는 버릇이나 눈을 마주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모습도 전부 그때와 같았다.
그러나 그리 마르지 않은 손목과 그때처럼 약하지 않고 단단한 몸은 분명히 달랐다. 다갈색 머리카락도 푸른색 눈동자도, 그녀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그는 사랑스러웠다.
“그대는 내 거야. 그러니까 행복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자. 먼저 가지 말고 곁에 오래 있어 줘.”
그가 그녀의 입술을 덮으며 읊조렸다. 어쩐지 애절한 느낌이었다. 왜 그를 보면 항상 가슴이 아릿하고 이상하게 믿음직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순간까지도, 무서운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말인데요. 혼자 남는 건…… 너무 외로우니까요.”
그녀의 작은 속삭임에 그가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응, 외로워. 너무 외로워. 죽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어. 그러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자. 아이도 낳고 행복해지자.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오늘을 기다렸거든.”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 아니면 아예 세계가 바뀐 것인지 모를 시대에 그들은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만났다.
“사랑해, 사랑해.”
그가 몇 번이고 읊조리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가 조도를 낮추고 불을 어둡게 하자 노을이 지는 풍경이 고스란히 투명한 유리창에 스며들었다.
“이상해요, 사후 씨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알았던 사람 같아요. 아까 나온 식사도, 제가 좋아하는 거 위주였고.”
“입맛에 맞았다니 다행이야. 노력했거든.”
그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안심하고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그의 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녀가 원하던 대로 다양한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무엇을 먹어도 맛있게, 양껏 먹을 수 있도록.
“사후라는 이름보다 밀라이언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마찬가지야, 카리나.”
어쩌면 우리가 서로 만난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전생의 서러움을 달래 주고자 다시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품 안에 그녀를 끌어안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예감이 들어요, 머지않은 미래에 난 당신에게 분명히 흠뻑 빠질 거라는 거.”
“……그 날이 빨리 오면 좋겠군. 천천히 와도 물론 기다릴 순 있겠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일 초라도 더 빨리 온다면 기쁠 거야.”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무엇도 할 수 없이 허망하게 손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을 이렇게 품에 끌어안고 있는 것이 마치 꿈만 같았다.
“결혼은 갑작스러웠지만……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응, 나도.”
다시는 품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간신히 찾아낸 그녀는, 그의 일생 전부를 바쳐도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행복해질 것이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그녀가 하고 싶다고 편지에 적고 갔던 모든 것들을 전부 하면서.
“사랑해, 카리나.”
밀라이언은 수십 수백 번 했던 말을 몇 번이고 읊조렸다. 그 날 그 순간, 그녀에게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이제 곧 가을이네요.”
“……그러게.”
그 날, 그 시간에 멈췄던 계절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그들은 수십 번의 봄을 더 맞이할 것이다. 슬픔을 흘려보내며 새로운 추억을 가득 쌓으면서.
“만나서 기뻐요, 밀라이언.”
그녀의 말에 눈을 크게 뜬 그가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금세 가득 채웠다.
Side Story 4. 재회, 그리고 이어지는
콰앙-!
“크아아악!”
단말마의 울음을 내지르며 육중하고 거대한 마수가 엎어졌다.
엎어진 마수 근처에 묵직한 창 하나가 툭 내려앉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창을 내려다보며 여자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토벌은 이 정도면 되려나.”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남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오드아이의 여자였다.
새하안 피부와 오똑하게 선 콧날의 여자는 길게 늘어진 속눈썹과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유독 새초름하게 보였고 수려하게 떨어지는 턱선과 둥글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자는 새하안 뺨에 붉게 자리 잡은 핏자국이 유독 도드라졌다.
“네, 예상보다 조금 더 토벌한 것 같습니다. 세레누스 공작 각하.”
“응, 뭐 이 정도면 됐지.”
병사의 말을 들은 여자가 씩 웃더니 창에 묻은 검을 가법게 털어내곤 휙 몸을 돌렸다.
힐긋 고개를 돌리자 세레누스의 시선 끝에 마수를 베어 내는 붉은 눈동자의 청년이 눈에 담겼다.
“아, 하란 공께서도 거의 끝나신 모양입니다. 정말 실력이 대단하시죠.”
세레누스가 병사를 힐긋 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다행이네,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해.”
“생신 때문이신가요?”
“응, 어머니랑 아버지랑 보내는 날이니까.”
세레누스가 새까만 말에 오르자 뒤에서 후다닥 그녀를 쫓아온 금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새하얀 다른 말에 올라 세레누스의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세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없어, 너도 잘 싸우던데.”
“네, 아무래도 사막은 척박해서 온갖 짐승과 변이한 마수가 득실거리니까요. 다만, 조금 춥기는 하군요.”
뜨거운 사막에서만 살아온 탓에 추위를 잘 타는지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레누스가 픽, 웃으며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두툼한 망토를 그에게 둘러 주었다.
“……세렌?”
“너 그렇게 약해 빠져서 어떡해? 그거 덮어.”
그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이윽고 익은 곡식처럼 푹 숙어졌다.
귓불까지 붉게 달아오른 하란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제 뒷목을 몇 번이고 쓸었다.
“오늘, 생일이시라고 들었는데…… 저녁에 잠깐 시간 될까요? 선물을 준비했는데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안 되는데.”
“아…….”
대번에 실망에 젖은 낮으로 하란이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서 아버지께 갈 거야.”
“그러고 보니 선대 공작은 어떻습니까? 토벌에 나갔다 습격을 당해서 크게 다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응, 마물이 습격한 마을에 있는 어린애들을 구하려다가.”
등과 다리가 크게 다쳤다.
다시는 검을 들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은 밀라이언은 최근 방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는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마기에 몸이 중독돼서 치료사를 북부까지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았다.
세레누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응, 그러면 좋겠지만…… 어쩐지 그렇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버지는 예전부터 어머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으니까.”
“어머니라면…… 그 예술병에 걸려서 돌아가셨다는…….”
“응. 지금은 윈스턴과 페리얼 삼촌이 예술병 치료제를 만들어서 죽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치료제라는 게 없었거든.”
세레누스의 말에 곁에 있던 하란의 표정도 살짝 어두위졌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허공에 손만 휘젓다가 조심스럽게 세레누스의 등을 가법게 두드렸다.
“세렌, 많이 슬프셨겠네요.”
“그렇게 슬프진 않았어. 예전에는 어머니가 정말로 아주 멀리 여행을 갔다고 생각했거든. 매년 꿈에도 나왔고 편지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버지도 있었고.”
세레누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년 대체 언제 네 나라로 돌아가는 거야? 내가 널 주워오기는 했지만, 상처는 다 나았잖아.”
“…제가 돌아갔으면 좋겠습니까?”
“돌아가야지? 왕자라며.”
“네, 근데 어차피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나라니 굳이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하란이 생긋 웃었다.
순박하게 생긴 낮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레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넓디넓은 북부에 군식구가 하나 더 는다고 재정이 휘청거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세렌!”
“응?”
“저기, 그렇다면…… 내일은 시간이, 되십니까?”
“응, 당연하지.”
“그럼, 그럼……! 내일, 시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아, 같이 점심 먹으면 되겠네.”
“네, 너무 좋습니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하란이 순박한 낮으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갓 24살이 된 청년은 확실히 앳된 낮이 있었다. 세레누스가 제 뺨을 가법게 긁적이곤 빠르게 말을 몰았다.
가슴께가 간지러운 이유를 명확히 알 재간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