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99)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아픈 현상을 말이다.
“그러니, 원망하지는 말렴. 내가 현역이 아니라는 걸 잊어버린 탓이기도 하니까.”
“아이들을 지켜가며 혼자서 마수 40마리를 토벌하고 왔잖아요! 아빠는 아직도 강해요.”
세레누스의 말에 밀라이언이 옅게 웃었다.
아이에게는 강하고 든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마수에게 둘러싸였을 때 죽음을 직감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세레누스에게 끔찍한 아비의 시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복수에 눈이 돌아서 망가지질 않길 바라서.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서.
사랑하는 제 아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다가오는 세레누스의 생일에 죽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생일이 다가오면 아비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란이라는 남자가 마음에 드느나?”
“네? 뭐, 지금껏 만나봤던 영식 중에서는 제일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구나, 내일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겠니? 대화라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또 이상한 압박 넣으려고 하죠? 하란은 저한테 고백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조금 순진한 강아지 같은 거죠.”
세레누스가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밀라이언이 낮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호기심이란다.”
“몰라요, 엄마 편지나 읽을 거예요.”
토라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밀라이언은 최근 한시도 곁에서 떼 놓고 있지 않은 일기장을 손에 가법게 움켜쥐었다.
“아빠는 전부 다 읽었어요?”
“아니, 한 장이 남았지.”
세레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일기장을 꺼냈다.
이미 반 이상을 훌쩍 읽어 버린 일기장은 이제 남은 부분이 읽은 부분보다 훨씬 적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일기장도 이렇게 줄어 들고 만다.
세레누스가 빛바랜 표지를 몇 번이고 쓸며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안녕, 세렌.내 소중한 세레누스.
오늘도 엄마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워. 29번째 생일을 축하한단다.
드디어 우리 세렌이 엄마는 살아보지 못한 영역에 이르렀네.
엄마는 경험해 보지 못해서 이제 상상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그래도 해 주고 싶은 말은 아주 많으니까.
그 나이의 세상은 무언가 다르게 보이니? 엄마는 아쉽게도 29살이 되어보지 못했어.
앞자리 3이 되어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불가능했단다. 아쉽지만, 우리 세렌이 대신 겪고 엄마에게 얘기해 줄 테니 아무렇지 않아.
잘 지내고 있니? 지금까지는 아빠의 방해로 좋은 남자를 만나진 못했을 것 같은데 혹시 지난 일 년 동안 새로운 사람이 생기진 않았니?
세렌, 남자를 고르는 방법은 하나란다. 그냥 널 가장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찾으렴.
진심으로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 사람.
돈이 많지 않아도 되고 명예가 없어도 돼. 하지만, 반드시 너와 네 아이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
위험에 처했을 때 언제든, 어디에 있든지 신화 속 영웅처럼 찾으러 와 줄 그런 사람.]
세레누스가 천천히 글자를 쓸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항상 위험에 처할 때마다 어디에 있든지 달려와 주었던 밀라이언의 모습이.
힘껏 끌어안고 안도의 숨을 내뱉었던 아빠의 품이.
[엄마가 아빠랑 처음 만났을 때 얘기를 해줬던가? 첫 만남은 최악이었어. 아빠가 엄마보고 흐느적거리는 오징어 같다고 했거든.하지만 그렇게 엄마를 똑바로 직시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어. 사실 엄마는 아빠와의 약혼이 너무너무 싫었거든.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엄마 의견이 전혀 없이 정해진 거라서.
엄마가 약혼을 싫어한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빠만 알아주더라.
아가, 내 사랑하는 세렌.
네가 누굴 선택하든 엄마는 응원할 거야. 그렇게 네 남편과 네가 아빠와 아주 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세레누스는 제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밀라이언을 보았다.
한껏 쇠약해져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았지만 여전히 소중한 가족. 세렌의 세계에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긴 시간, 오로지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가족이었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전부 함께였다. 엄마의 기일에도 늘 손을 잡고 함께 엄마에게 갔다.
‘아빠가 돌아가시면, 그걸 전부 내가 혼자 해야 하나?’
덜컥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밀라이언은 늘 세레누스에게서 태산 같은 존재였다. 공작위를 물려받을 때조차 그는 정정했고 언제까지고 함께해 줄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세레누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른 세레누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혹여나 곤히 잠이 든 밀라이언을 깨울 것만 같아서였다.
책 위에 닿은 시선엔 카리나가 쓴 글씨가 마저 있었다.
[하지만, 세렌.엄마는 알고 있어, 세상에는 원치 않은 이별을 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엄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있다는 걸 담아 두렴. 어쩐지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어 서 세렌의 생일에 이런 글을 적고 있네.
세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해. 만약 그런 날이 오게 되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펼치렴.
엄마는 네가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어. 이별은 해어짐이지만, 결국 또 다른 만남이기도 하단다. 하지만, 그 날이 부디 빨리 오지 않기를 바란단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세렌. 네 탄생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음을 언제나 잊지 말렴.]
세레누스가 한참이나 글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림은 있지만, 그가 곤히 자는 터라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색은 내일 칠해도 되니까 말이다.
“아빠, 편히 누워요.”
세레누스가 불편하게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는 밀라이언을 조심스럽게 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가 흘긋 눈을 뜨더니 작게 웃었다.
“고맙다, 세렌. 생일 축하한단다.”
아침에도 해 준 인사를 밤에도 해 주는 밀라이언의 모습에 세레누스가 밀라이언의 품에 파고들
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세찬 심장의 고동 소리와 온기가 그녀를 안도하게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