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0)
>20 화>
하루를 꼬박 꿈속에서 헤매던 카리나는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이 되어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가 멍한 정신으로 누운 채 고개를 돌리자 창문 밖으로 멀찍이 물러나 흐릿해진 달과 달만큼 밝아지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 왔다.
밤새 열로 앓은 탓인지 카리나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본능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이 먹고 싶어.’
그녀는 물을 뜨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협탁 위의 주전자를 발견했다.
카리나는 마른 손끝을 조심스럽게 주전자에 가져다 댔다.
갈아 둔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표면에는 차가운 물기가 맺혀 있었다.
숨을 들이켠 그녀는 주전자에서 천천히 손을 됐다.
누가 봐도 그의 배려였다. 시녀에게 명령했든 혹은 호쾌하게 스스로 퍼 왔든, 그의 입김이 닿은 것이 분명했다.
밀라이언은 아픈 그녀를 신경쓰고 있다.
그것을 깨달은 카리나의 표정이 순간 무너져 내렸다.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나.”
무릎을 그러모아 끌어안은 카리나가 그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내 상태에 대해 알았을까?’
카리나가 제 무릎을 조금 더 힘주어 안았다.
차라리 그가 모든 사실을 알고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며 쫓아내면 좋겠지만, 그러진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밀라이언은 말투가 험하긴 해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제발, 끝까지 몰랐으면.”
겁에 질린 카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와 어떠한 정을 쌓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값싼 동정이든 배려든 어느 쪽이든 원하지 않는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날 떠오른 것은 제 남은 생명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져 갈 가족들의 반응이었다.
카리나는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리면, 그토록 바라는 애정 어린 관심이 주어질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실이 비참해서, 그것이 싫어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저택을 뒤로하고 싶어졌다.
지금껏 애달아 온 것들이 죽음 앞에 서서야 간신히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 가느다란 희망의 실조차 스스로 끊어 내기로 했다.
아무리 틀어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모래처럼 어찌 할 수 없이 흘러갈 시간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미끼 삼아 그것을 흔들며 관심을 끌고자 이용할까 봐 두려웠다.
백작가와 멀리 떨어져 남은 시간을 조용히 보낼 곳이 필요했다. 마음을 정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를 택한 것은 그가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북부는 백작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찾고자 하면 이유는 많았다.
그것들을 핑계 삼아 이곳에 머무르며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려고 했다.
생각하던 그녀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야…….’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사실은…….’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이 무너져 내리듯,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카리나의 표정은 순식간에 울상으로 물들었다.
‘그가 나를 제대로 봐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라고 해 준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억울해도 서러워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생각을 삼켜 낼 때, 그래서 스스로가 너무 싫어 질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했었다.
이곳으로 올 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냥 문득 그가 떠올랐고 이곳으로 발을 옮겼다.
이기적이었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장담컨대 카리나는 밀라이언이 자신을 걱정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왜 날 걱정할 수 있지……?”
카리나는 가족과의 관계를 체념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저마다 아픈 손가락이 있다.
사람은 공평하지 않다.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살아오면서 카리나는 그와 같은 것들을 배웠다.
그랬기에 크게 접점이 없던 타인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 그의 배려와 다정함을 느낀 그녀는 덜컥 두려워졌다.
‘나는 죽어.’
그리고 밀라이언은 살아갈 거다.
동정이든 걱정이든, 그는 자신에게 어떤 감정도 가져선 안 됐다.
‘……도대체 왜?’
누구도 자신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그가 줄 관심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이 짧았어.”
그녀가 절망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나?’
앞으로 살아갈 사람에게, 죽을 사람을 위한 감정을 심는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삭막하고 서글픈 삶을 그대로 겪게 하는 것이다.
머리를 부여잡은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예전에 봤던 책에 기억을 지우는 부적 같은 게 있었는데.”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고대의 다양한 물건〉이라는 책에서 어떤 부족이 만들었다는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부적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게 있다면 각하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을 거야.’
카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생기를 머금었다.
‘책만 있으면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카리나는 그림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창조의 힘을 가졌다.
어떤 물건이든 설명과 그림만 있다면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니 그 부적이 고대에 실제로 존재했는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보고 느끼고 이해하면 됐다.
카리나는 몰랐지만 그것은 무척 드문 종류의 ‘기적’이었다.
역사서에 적힌 창조의 기적에 관한 일화로는 이런 것도 있었다.
창조의 힘을 가진 예술가는 원하면 죽은 자의 멈춰 버린 심장을 그려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힘은 잠시 동안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힘이니 완전한 소생은 불가능하고 죽은 지 오래된 자 역시 되살릴 수 없다.
하지만 엄청난 능력임에는 틀림이 없어서, 유서 깊은 예술 가문이 알았다면 그녀를 양녀로 입적해서 무슨 지원이든 해 준다고 목을 맸을 것이 분명한 정도였다.
“……차라리 수도원을 들어갈 걸 그랬나.”
고민하던 그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답답함에 고개를 돌리자 떠오르는 태양이 어둠을 밀어 내고 있었다. 조금씩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카리나는 밀라이언의 다정함과 배려가 주전자 하나로도 느껴져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대체 어떻게 무례하고 귀찮은 존재를 위해서 밤새 곁에 있어 줄 수 있었던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녀가 아닌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아벨리아에게 열이 나는 것은 노련한 의사처럼 재빠르게 눈치 채는 가족들은 유독 카리나의 아픔은 눈치채지 못했다.
카리나는 자신이 그런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려 가족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어쩌지.”
카리나가 보들보들한 이불을 손가락으로 쓸며 무릎 사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한창 심각하게 고민하는 도중, 밖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달칵거림과 함께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들어오는 이와 눈이 마주쳤 다.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상대쪽도 그녀가 깨어 있을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뜬다.
“……일어나 있었군.”
“각하.”
카리나가 한 박자 늦게 그의 말에 반응했다.
성큼성큼 걸어온 밀라이언이 카리나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막 잠에서 깼는지 제법 흐트러진 복장이었다.
‘깨자마자 이쪽으로 온 건가?’
그녀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 예술병이라는 걸 앓고 있나?”
앉자마자 돌직구를 던지는 밀라이언에 카리나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카리나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반응에서 밀라이언은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아냈다.
“어떤 종류지?”
“……네?”
“마리아에게 듣기로 예술병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던데, 그중에 어떤 종류냐고 물었어.”
비꼬는 목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탓하는 것도 아니었다.
밀라이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붉은 눈으로 카리나를 직시했다. 그녀가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떨리는 동공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질문에 대답이나 해.”
“내가 이기적이고 예의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그걸 묻고 있는 게 아니야.”
대답을 피하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오죽 기댈 곳이 없었으면 먼 북부의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약혼자의 집에 단신으로 찾아왔겠는가.
적어도 그녀가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밀라이언은 일련의 사태로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해요. 생각이 짧았어요.”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들렸다.
대화가 맞물리질 않는다. 삐걱거리는 톱니바퀴 두 개가 서로 같은 방향으로 돌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밀라이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이상하게도 불안하고 기묘한 감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안 되겠죠?”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건네 온 카리나의 말에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밀라이언의 얼굴이 기어코 험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