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02)
밀라이언은 아주 길고 어두컴컴한 길을 걸었다.
사방의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고 그저 앞으로 길만 쭉 늘어져 있는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밀라이언은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몇 날 며칠을 걸었을까?
어쩌면 한 달도 더 넘게 걸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과 걱정이 떠다녔다.
그러나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겹지도 않았고 상념도 들지 않았다. 크게 다쳐서 오늘내일하던 몸도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마치 한창 전성기 때로 돌아간 듯했다.
마침내 모든 상념을 떨쳐 내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밀라이언은 스스로의 죽음을 깨달았다.
이 공간은 존재할 수도 없고 이 상황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밀라이언은 새하안 빛이 뿜어져 나오는 출구를 발견했다.
드디어 길의 끝을 향해 걸어갔을 때,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꿈에서도 그리고 또 그리다가 종국에는 그 그림조차 그릴 수 없게 되어서 절망하고 또 절망했던, 이윽고 색이 바래 비린 그녀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밀라이언.”
카리나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밀라이언은 도리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겁에 질린 듯, 뒤로 물러난 밀라이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보지 마, 카리나.”
밀라이언이 제 얼굴을 가렸다.
“왜요.”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나는 늙고 못생겨졌잖아.”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카리나가 얼굴을 가린 밀라이언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그러곤 손을 들어 그의 양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주름이 생기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상처가 더 늘어난, 세월의 흔적과 치열한 삶의 흔적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카리나에겐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웠다.
카리나는 손에 닿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눈꼬리를 휘고 말았다.
그토록 갈망하고 그렸던 온기가, 사람이, 눈 앞에 있었다.
“밀라이언, 날 좀 봐 줘요. 당신은 여전히 멋있어요. 늙고 못생기지도 않았고 여전히 멋있고 잘 생겼어요.”
애초에 어차피 이곳은 영혼의 세계기 때문에 나이는 관계없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외향을
바꿀 수 있는 곳이 이 세계였으니까.
밀라이언은 갓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죽은 외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뿐이었다.
“카리나…….”
“네, 밀라이언.”
“카리나, 카리나…… 카리나.”
“네, 밀라이언.”
몇 번이고 확인하듯 카리나의 이름을 부르던 밀라이언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드디어, 만났어.”
그가 작게 읊조렸다.
“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신이 흐릿해져 간다고 느꼈어. 나는 내가, 당신을 그리다 못해서 이제 무던해졌다고 생각했거든. 너무 긴 시간이었어서…… 죽어서 당신을 다시 만나도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도 시간 앞에선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보는 그 순간이 기대가 되면서도 두려워서 떨렸다.
예전 같지 않을 스스로를 발견할까 봐.
그래서 그녀를 실망하게 만들까 봐.
그러나 우스운 걱정이었다. 그녀의 실망을 걱정하는 것부터, 밀라이언 자신은 틀려먹었다.
밀라이언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근데 아니야. 여전히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제 육체도 심장도 없지만, 당신을 보며 드디어 돌아왔다는 안도를 하는 내가 있어. 드디어 당신을 만났어…….”
“……저도요. 보고 싶었어요, 밀라이언. 몇 번이고 당신을 찾아 가서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끌어안고 입 맞추고 애정을 속삭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엄연히 죽은 사람이었고 그는 산 사람이었다.
“……보고 싶었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을 보기 위해서 죽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보고 싶었어.”
“……죽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세렌의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아, 너무 보고 싶었어요. 너무 긴 시간을…… 떨어져 있어서.”
카리나가 밀라이언에게 매달리듯 그를 끌어안았다.
밀라이언의 모습이 천천히 그녀와 함께했던 시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영혼이 가장 강렬했던 삶의 순간으로 모습을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아. 하고 싶은 얘기도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
“……저도요, 일이 많았어요.”
“그럼 서로 하나씩 얘기하자.”
“좋아요, 이젠 넘쳐 나는 게 시간이니까요. 페리얼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좋겠죠.”
“그런 걸 기다리긴 대체 왜 기다려?”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는 밀라이언의 모습에 카리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카리나와 밀라이언이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맞물렸다.
“……사랑해, 카리나.”
“저도요, 밀라이언.”
“……꼴값을 떤다. 아주.”
헛웃음을 터뜨린 아지다하카가 팔짱을 낀 채 훼방을 놓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재간이 없던 탓에 밀라이언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야?”
“아, 여긴 아지다하카의 영역이거든요. 빌려 쓰고 있어요.”
“그렇군, 적당히 방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대화만요?”
“……대화엔 여러 종류가 있지. 입으로 하는 것도, 몸으로 하는 것도 대화잖아. 아주 많이 쌓였으니까 각오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 키득키득 웃었다. 막 신혼을 시작한 신혼부부처럼 잘싹 달라붙은 채로.
“야, 네놈들 다 내 영역에서 나가.”
“이쪽에 제 방이 있어요.”
“좋아, 가지.”
“야! 내 말 안 들리느냐?!”
“빌리지. 용.”
“저, 저 싹수없는……”
대놓고 아지다하카에게서 등을 돌린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꽉 맞잡은 손은 한동안 놓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참나, 저걸 기다리겠다고 이 앞에서 몇 년을 앉아 있었으니.”
사람이 죽어서 이곳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몇 분에서 길면 수십, 수백 년이 걸리기도 했다.
새까맣게 늘어진 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념을 떨쳐 내고 스스로의 죽음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했다.
온전히 제 죽음을 깨닫고 인정한 자만이 그 길을 통과해 이곳까지 넘어올 수 있었다.
밀라이언이 이곳까지 건너오는데 무려 이 세계의 시간으로 5년이 걸렸다.
카리나는 5년 동안 이곳에 붙박이처럼 앉아 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매일, 매일, 매일.
지루하기 짝이 없을 시간을 꿋꿋하게 견더 내면서.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않은 채로. 도착했을 때 자신이 없으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저건 뭐 말리지도 못하겠군”
화를 내는 쪽이 한심해질 것 같으니 말이다.
아지다하카가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로 돌아갔다.
이곳이 그의 영역인 탓에 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의 귀로 실시간 중계가 되는 것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은 평화로웠다.
“젠장, 적당히 좀 하라고! 매일 같이 돌아 버리겠군! 지금 몇 달째야!”
……아마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