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1)
>21 화>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카리나는 말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의견을 입밖으로 내는 것보단 누군가의 의견을 따르는 편을 선호했다.
사실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학습해 왔다. 카리나가 내는 의견은 대부분 참다못한 불만이나 혹은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였으나 그러한 의견은 대부분 그녀에게 불리한 상황에서야 내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는 카리나의 의견은 대개 또 다른 거대한 의견에 짓밟히거나 꺾여서 바스러졌다.
자연히 그녀는 제 의견을 내며 상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서툴러졌다.
그리고 그녀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지금 밀라이언의 입에서 결코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카리나가 몸을 움츠리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없던 일로 하자니 뭘 말이지?”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나름대로 격양되려는 감정을 억누른 것이 분명했다. 카리나의 입술이 달싹였다가 이내 다물어졌다.
곤란한 듯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카리나 레오폴드.”
“네.”
대답은 또 꼬박꼬박한다. 살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신경 쓰여 그가 한숨을 삼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어.”
“그냥, 이제라도 별택에 가서 신경 안 쓰이게 있을 순 없나 해서요.”
물론 한 번 눈에 들어 버린 것에 완전히 무관심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카리나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적당히 둘러댄다고 순순히 물러날 정도로 밀라이언은 호락호락해 보이지도 않았다.
“화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말해 봐. 말을 해야 도와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시력이라도 잃게 되는 건가?”
카리나는 망설였다.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 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밀라이언의 마음은 자신이 가벼워진 만큼 무거워질 거다.
내가 편해지자고 그의 마음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팔이나 다리가 마비되는건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쪽은 무척 드문 경우라고 들었어, 혹시 그쪽은 아니겠지?”
카리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괜한 이야기를 흘리는 것보단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그대 정말 이렇게 나올 건가?”
“적당한 때가 되면 돌아갈게요.”
그녀는 조금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그는 파혼을 조건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스스로 말했다.
“북부엔 그대의 치료를 도와줄 의원이 없어. 지금 나가는 것도 늦었어. 출발해 봐야 북부를 빠져나가기 전에 마수들이 활동을 시작할 거야.”
카리나는 물끄러미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사실 그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본 곳을 선명하게 그려 낼 수 만 있다면 먼 곳을 이동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북부로 올 때 고생을 했었던 건 한 번도 북부로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원은 필요 없어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마리아가 말하길 그대의 예술병을 발병시킨 예술을 손에서 놓으면 된다고 했다.”
“……남는 게 없어요.”
힘없는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시선이 고개를 돌리는 카리나에게 향했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다행히 카리나의 입술은 다시 벌어졌다.
“그림을 놓아 버리면 내 인생엔 아무것도 없어요.”
내뱉어진 목소리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카리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림과 보냈다.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쏟아 부었다.
“평생을 함께해 준 유일한 친구를 어떻게 놓아 버릴 수 있겠어요.”
둥글게 휘어진 눈매를 보며 밀라이언은 입을 다물었다.
밀라이언의 굳은 시선에도 푸시시 웃어 버리는 카리나를 보며 그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여기에 왜 왔는지 얘기나 들어 보지.”
“……네?”
“그것도 말하지 않겠다곤 하지 마. 나는 그대를 배려해서 많이 참고 있어, 영애.”
밀타이언의 물음에 카리나가 잠시 고민했다.
카리나의 삶에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은 없었다.
그녀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그림 속에서 만들어 낸, 하루도 되지 않아 바스러져 사라질 것들뿐이었다.
속상하고 억울한 것을 털어놓고 이불을 푹 덮고 억지로 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나마 속이 진정되어 있었다.
카리나는 그렇게 혼자서 참고 삭이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왔냐고 묻는 건 아니지요?”
“그것도 말해 주면 진지하게 듣겠다고 약속하지.”
카리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곰 인형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고 요정도 아닌…… 제가 그리지 않은 것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다니.
솔직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꽁꽁 싸매고 있어 봐야 제 속만 문드러질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카리나가 이윽고 입을 뗐다.
“……여기로 오기 일주일 전쯤에 예술병에 걸린 걸 알았어요.”
답답함에 닦달을 하려던 밀라이언이 속에서 치고 올라오려던 말을 늦지 않게 간신히 억눌렀다.
“제 동생은 아프잖아요? 게다가 오라버니는 무척 뛰어난 분이셨고요.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잘난 것도 없고 평범하지만 형제들은 무척 대단하거든요.”
흐리게 그려진 미소는 정말 그것이 뿌듯해서 웃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의미인지 기묘한 느낌이었다.
밀라이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괜한 자격지심이고 피해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를 들어서?”
“음, 제 생일날 동생이 아파서 혼자 생일을 보내게 되거나, 선물 받은 소중한 지갑이 있었는데 그걸 억지로 빌려줘야 했다거나, 나는 열심히 해도 칭찬을 잘 해 주지 않는데 동생은 작은 것만 해도 칭찬해 주거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그중에서 몇 개를 끄집어냈다.
그러면서도 카리나는 쉴 새 없이 밀라이언의 반응을 살폈다.
힐끗거리며 밀라이언을 보던 그 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좀 너무 유치하고 애 같죠?”
동의를 구하듯 카리나가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그녀는 두려웠다. 밀라이언도 부모님처럼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을 할까 봐 무서웠다.
당연한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성인이라니 철없고 유치하게만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카리나의 물음에 밀라이언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대가 생일 파티를 혼자 하게 돼서 다음 동생이나 오라비의 생일 파티를 망치기라도 했나?”
“……아뇨?”
“아니면 지갑을 돌려 달라고 바닥에서 떼를 썼나? 동생을 때렸나?”
“아, 아니요.”
“그것도 아니면 혼자만 칭찬받는 동생이 짜증나서 동생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다 던져 버리기라도 했어?”
“아뇨, 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카리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밀라이언이 팔짱을 낀 채 헛웃음을 뱉었다.
“근데 그게 뭐가 유치하고 애 같아? 다 집어 던지고 드러누워서 떼를 쓰는 게 애 같다면 애같은 거겠지만, 안 그랬잖아?”
“네, 동생한테 양보하는 건 당연…….”
어쩐지 참 뻔뻔해 보이는 밀라이언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이던 카리나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밀라이언이 당연하다고 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자신이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울컥거림과 함께 순식간에 얼굴이 허물어져 내렸다. 아득바득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하게 됐지?’
언제부터 그 모든 걸 자신조차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무너져 내린 얼굴 위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려 성마르게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영애.”
“…….”
“카리나 레오폴드.”
“……네.”
“울지 마라.”
“……네.”
기계처럼 대답하곤 고분고분 제 아랫입술을 깨물려는 카리나를 보며 밀라이언이 낭패감 짙은 표정을 했다.
그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 실수야. 울어, 그냥 울어라.”
밀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아 더듬더듬 팔을 뻗어 그녀를 어색하게 품에 가뒀다.
‘……보통 울면 이렇게 달래 주는 것 같던데.’
다른 사람이 울면 왜 우냐고 등짝을 때리고 연무장 열 바퀴를 돌게 했으면 돌게 했을 거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이토록 다정하게 달래 주려고 한 적은 없었다. 그 때문에 당연하게도 밀라이언의 등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울면 좀 나아져. 얘기는 울고나서 해도 좋아.”
투박한 손길이 카리나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였다.
그 목소리에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가슴팍에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밀라이언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그녀에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