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4)
>24 화>
순간 드러난 당혹스러운 표정을 금세 웃음으로 지워 낸 녹턴이 천연덕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벨리아 아가씨가 걱정하시기도 하고 저도 신경 쓰여서 여쭤 봤습니다. 괜한 말씀을 드린 거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었네. 보이던 이가 없어졌으니 걱정할 수도 있지. 카리나에 관해선 아직 어떤 정보도 없어. 수도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것뿐이네.”
“……그렇군요.”
녹턴이 입을 닫았다.
윈스턴은 녹턴에게 일을 넘겨주며 지금껏 환자 기록을 함께 넘기고 갔다.
연이어 오는 손님도 있었고 정기적으로 검진이나 치료를 받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자료에 거짓은 없다. 그러니 기록의 카리나가 그가 생각하는 카리나가 맞는다면, 그녀는 예술병이라는 것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하필이면 생명을 깎아먹는 종류였다. 어떤 소식도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자네도 혹시나 무슨 소식이라도 듣게 되면 연락 좀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녹턴이 허리를 굽혔다. 얘기를 해 줘도 옳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심지어 이 이야기를 아벨리아가 알게 되면 좋아진 건강 상태가 훨씬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아벨리아에게 문제가 생기면 바로 말해 주고.”
“예.”
그가 몸을 돌렸다. 문고리를 붙잡은 녹턴이 잠시 망설였다.
나가지 않는 녹턴을 본 카시스가 입을 열려는 순간, 녹턴이 몸을 반쯤 비스듬히 돌렸다.
“혹시 북부 쪽으로도 수소문을 해 보셨습니까?”
“아니, 거기까지는 해 보지 않았네. 가출하며 겨우 동전 두 개를 들고 나가서 북부까지 갔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
카시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소식이 얼마나 빨리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북부에도 연락을 넣어 볼 예정이었다.
더 늦는 것보단 지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그렇군요.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래, 소식이 들어오면 알려 주겠네. 자네도 일이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보게.”
“네.”
녹턴이 허리를 굽혀 다시 한 번 인사하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퍽 어두운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괜한 소식을 알려 집 안을 불안하게 하는 건 좋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가셨으니 봄에는 뭔가 답을 들고 돌아오시겠지.’
애초에 카리나가 알리지 않고 갔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녹턴은 그녀의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 없이 움직일 사람은 아니다.
동시에 혹시나 아벨리아가 충격을 받고 쓰러질까 봐 말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도 그에겐 분명히 있었다.
“녹턴?”
“아, 인프릭 님.”
“아버지를 만나 뵙고 돌아가는 길인가?”
“네, 이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녹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인프릭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짧게 인사를 건넸다.
녹턴이 인프릭에게 묵례를 하곤 곧장 저택을 빠져나갔다. 녹턴이 사라지는 걸 보던 인프릭이 짧은 한숨과 함께 카시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아버지.”
“인프릭?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일이 일찍 끝나 돌아왔습니다. 제 쪽에서도 파견 나가는 동료들에게 카리나에 관해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카시스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은 없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답답해서 속이 쓰렸다.
카시스가 위장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인프릭, 도대체 카리나가 왜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나? 넌 짐작 가는 게 있느냐?”
카시스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딱 집히는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종종 아벨리아와 페르던에게 신경 써 줄 때 카리나가 서운한 티를 조금 내긴 했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 아픈 아이를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런 유치한 일 때문에 나갔겠느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친 카시스는 인프릭의 이야기를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워낙 말수가 적어서 저희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했으면 됐지 않나. 대체 이게…….”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를 높였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무사 하면 편지라도 한 통 쓸 것이지. 이게 무슨 짓거리난 말이야.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카시스의 말에 인프릭이 쓰게 웃었다.
자신들의 아버지는 솔직하지 못하고 서툴렀다. 그건 인프릭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탓하지 못하는 것은 인프릭 역시 그 서툰 손길에 애정을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인프릭은 후계자라서.
아벨리아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페르던은 장난기가 많아서 잘 다쳐 와서.
돌볼 이유를 찾을 수 있었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용하고 손이 가지 않는 카리나는 신경을 쓸 수 있는 이유가 부족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주 가끔 함께 있어도 쓸쓸한 표정을 짓던 카리나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어린 카리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아했고 사탕이라도 챙겨 주면 제법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 그린 듯한 미소가 얼굴에 생겨나고 방에서 잘 나오지 않게 되고 가족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게 됐다.
인프릭도 제법 바빴던 데다가 그런 표정을 하는 카리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씩 거리를 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카리나와의 거리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이제와서 조금 후회해 보자면, 아무리 불편해도 한 번씩 말을 걸고 인사를 해 주고 방에 찾아 가 봤으면 좋았을 거라는 것.
그랬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라도 하고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카리나가 돌아오면 혼을 내기 보단 일단 대화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일단 애가 돌아와야 할 것 아니냐.”
카시스가 피곤한 듯 말했다. 지친 목소리를 들으며 인프릭이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모르겠구나. 집이고 물건이고 식사고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카시스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로선 그랬다.
인프릭과 다른 두 동생에 비해선 조금 덜 했을진 몰라도 부족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어머니는요?”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더니 몸살이 났다더군.”
카시스가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녹턴이 아벨리아의 것과 함께 약을 지어 놓고 갔으니 너무 걱 정하지 말아라.”
달리아가 걱정된 카시스도 자리
에서 일어났다.
잡히지 않는 서류를 손에 쥐고 있는 것보단 차라리 아픈 아내를 돌보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네 어머니도 걱정되니 나도 이만해야겠다.”
“네, 무리 마시고 들어가 보십시오.”
“그래, 너도 들어가 쉬어라.”
“어머니께 얼굴 한 번만 비추고 쉬러 가겠습니다.”
인프릭의 말에 카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프릭이 묵묵히 카시스의 뒤를 따랐다. 곰곰이 고민하던 인프릭이 문득 카리나가 아팠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카리나도 아플 때 한 번씩 찾아가면 놀란 표정을 짓곤 했는데요.”
“카리나가 아플 때?”
카시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로선 듣지도 못한 얘기였다.
“그 애가 아플 때가 있었더냐?”
“예, 아벨리 아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카시스의 반문에 도리어 인프릭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카리나는 카시스보다는 달리아가 신경을 쓰는 편이었기에 카시스에겐 카리나가 아팠던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랬나?”
“네.”
카시스가 묵묵히 부부가 함께 쓰는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해 인프릭이 달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릴 때 까지도 카시스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 * *
최근 카리나에겐 취미가 하나 생겼다.
밀라이언이 매일 아침 새벽 훈련하는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밀라이언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새벽 운동을 했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무척 유려하고 날렵했으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묵직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스케치하는 것이 그녀의 새벽 일과가 되었다.
그를 보다 보면 없던 의욕도 샘솟았다. 오죽하면 평소엔 하지도 않던 새벽 기상을 할 정도였다.
문제는 새벽 기상을 하더라도 잠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그의 일과가 끝날 때쯤에는 쓰러지듯 또 부족한 잠을 채웠다.
카리나는 정오가 되기 전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낮에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목록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벌써 펜을 손에 쥔 지 3일째였지만 막상 하고 싶은 것을 적어 보려고 하니 손이 굳어 쉽게 써지지 않았다.
‘3일째 한 줄이라니.’
카리나가 심각한 눈으로 노트를 바라봤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목록 그 첫 번째에 작성된 것은 누군가와 함께 피크닉에 가 보고 싶다는 것, 단 한 줄이었다.
“북부엔 뭐가 볼 게 있나 물어볼까?”
“북부에 볼 거라곤 마수밖에 더 있겠나?”
“꺄악!”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리나가 몸을 펄쩍 뛰었다.
그녀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밀라이언의 실체를 확인하곤 숨을 삼켰다.
“마수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군.”
팔짱을 낀 못마땅한 기색의 밀라이언이 문에 비스듬히 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