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5)
>25 화>
검은색 바지에 셔츠 하나만 걸친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방에 들어올 땐 노…….”
“참고로 말하지만 노크는 다섯 번도 더 했어.”
“…….”
밀라이언이 그런 일에 괜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니 저 말은 사실임이 분명했다.
그럼 결론적으론 자신이 노크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됐다.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손바닥으로 귀를 꾹꾹 눌렀다.
‘……설마 귀에도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예민한 성격 탓에 웬만큼 집중 해도 소리를 잘 듣는 편이었는데, 조금 꺼림칙하긴 했다.
카리나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밀라이언이 책상을 손으로 짚곤 허리를 숙였다.
“뭘 하고 있었어?”
“그냥, 하고 싶은 일 쓰고 있었어요. 집에서 나온 건 처음이라서 하고 싶은 건 다 해 보고 싶어서요.”
“근데 종이가 어째 텅 비어 보이는데.”
“막상 펜을 쥐니까 뭘 써야 할지 막막해서요. 하고 싶은 건 막연하게 많이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대입해 보니까 딱히 떠오르질 않아요.”
밀라이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보기에 카리나는 간단한 일을 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고민해도 좋은 답이 나오질 않지.
뭐든 일단 고민보다는 던져 보는 게 좋다는 것을 그녀는 배울 필요가 있었다.
“굳이 거창한 거여야 하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지붕 위에서 온종일 낮잠이나 자고 싶다거나 배가 터질 정도로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 보고 싶다는 종류는 안 되냐는 얘기야.”
“……그것도 가능하죠.”
다만 그녀가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거창한 것들을 떠을렸다.
어딘가 멀리 여행을 다녀온다거나 아니면 누구와 피크닉을 간다거나 직접 사냥을 해 보고 싶다거나.
대부분 떠오른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동시에 거창한 것들이었다.
“이런 건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놓고 지르는거야. 네 머릿 속에서 먼저 재단해서 잘라 내지 말고 욕망을 고스란히 써. 그래야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이잖나.”
밀라이언이 텅 빈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머릿속으로 거르고 걸러서 나온 게 왜 하고 싶은 거야. 내 수준에 맞춰 할 수 있는 거지. 뭐든지 불가능해도 일단 써 보는 거지. 그리고 움직이면 되는 거야. 거창한 것도 소소한 것도 전부 그대가 하고 싶은 거잖아.”
“……그러네요. 제가 미처 그렇게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고마워요, 밀라이언.”
“천만에,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야.”
밀라이언이 키득거리며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병사들에게 하듯이 한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손을 냉큼 뗐다.
그러나 카리나는 그것이 싫지 않은 듯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포슬포슬 웃어 버렸다.
어린애로 취급받는 기분이 싫지는 않다. 늘 철이 든 언니이며 동생이고 누나여야 했으니까.
누구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렇게 흩뜨리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한 적은 없었다.
밀라이언이 그런 웃음을 터뜨린 그녀를 보며 기묘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정말 애 같네.’
그는 동생이 없었지만 동생이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도르르 시선을 굴리던 밀라이언이 책상 한쪽에 쌓여 있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튕기곤 들어 올렸다.
“이건 뭐야?”
“네, 뭐…… 잠, 그건 안 돼요!”
카리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지만 밀라이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이 빨랐다.
밀라이언이 뚫어져라 종이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종이에 박힌 시간만큼 카리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맨날 늦게 일어나나 했더니 새벽에 이런 짓을 하고 있었군.”
“그…….”
밀라이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카리나의 얼굴이 새빨개 졌다.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바라 본 밀라이언이 힐끗 종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겹쳐진 세 장의 그림에는 모두 창문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에 매번 다른 자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밀라이언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 그녀가 볼을 붉힌 이유였다.
그림 속의 그는 당장에라도 움직일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카리나가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밀라이언이 한숨처럼 숨을 뱉었다.
“왜 변명을 하려다 말아? 얼른 해 봐.”
판을 깔아 주니 한층 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풀이 붙은 듯 딱 달라붙은 입술을 그녀가 힘겹게 떼어냈다.
“아니,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는 밀라이언이 엄청 신비로웠거든요.”
그녀가 멋쩍은 듯 뒷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무엇이든 스스로 하고 의욕 넘치는, 달빛 아래 에서도 태양 같은 밀라이언이 무척 멋있게 보였다.
솔직담백한 그녀의 말에 밀라이언이 눈을 끔뻑였다.
두어 번 그녀의 말을 곱씹던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다시 원래대로 내려 두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랬나?”
설마 저렇게 붉어진 얼굴로 돌직구의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밀라이언이 되는 대로 대충 반문 하곤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네, 시간은 유한하고 흘러간 건 돌아오지 않으니까 저는 이렇게 기록해 두는 게 좋아요. 그러면 언제가 되도 잊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렇군.”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흐르는 적막을 어찌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다시 도르르 굴리던 카리나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그제야 방문 목적이 떠오른 듯 밀라이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분위기를 깰 방법이 생긴 탓이었다.
“곧 시찰을 나갈 건데 그대도 함께 가면 어떨까 해서. 계속 저택에만 있으면 그대도 답답할 것 아닌가.”
“저 여기서 나가도 돼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이 당황한 시선으로 입을 벌렸다.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가 제 엄지로 눈가를 슥슥 문지르더니 벌어진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카리나.”
그의 부름에 카리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부르는 이름은 어쩐지 를 때마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라서 묘했다.
그녀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곤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물론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곧장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잖나. 내가 널 가둔 것 같잖아.”
억울한 듯 덧붙이는 밀라이언을 보며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정말로 가둔 것은 아니었지만 못 나가게 한 것은 사실이다. 얌전히 몸이 멀쩡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요 며칠 약속대로 얌전히 있었잖아.”
요컨대 말 잘 들었으니 주는 상이라는 의미인 듯 했다. 카리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밀라이언 말대로 잘 먹고 잘 쉰 탓인지 식사를 게워 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 저택에 있으면 참을 필요도, 그렇다고 혼자 삭힐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밀라이언의 눈치는 무척 빨라서 그녀가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보여도 돌직구로 물어 왔다.
독심술이 아닐까 싶은 의심도 점차 줄어들어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지경까지 됐다.
긴장하는 횟수가 줄어서 그런지 여러모로 상태가 좋았다.
‘무모했지만 집으로부터 멀어지는 건 정답이었을지도.’
고개를 돌린 카리나가 설핏 웃었다.
“왜 대답이 없어?”
불쑥 고개를 들이민 밀라이언이 물었다.
카리나의 허리가 뻣뻣해졌다.
그녀가 슬쩍 뒤로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밀라이언의 손이 카리나의 이마를 짚는 손길이 더 빨랐다.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숨기려 카리나가 제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사실 최근엔 다른 의미로 긴장하는 횟수가 늘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당연히 없죠. 열이 안 나는데, 나가면 뭘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공작령에 와서 바깥 구경은 처음이잖아요.”
카리나의 진지한 말에 밀라이언이 키득거리다 이윽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큽…… 그대는 매사에 뭐가 그렇게 진지해?”
손을 뻗은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툭툭 두드렸다. 그녀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밀라이언도 눈치를 보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흩뜨렸다.
휘하의 기사들에게 하는 모양을 본 적이 있으니 아마도 그 연장선이 아닌가 싶다.
‘……기사들과 같은 취급이라니 좀 슬프지만.’
그래도 싫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카리나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기려 애써 입가에 힘을 줬다.
“겸사겸사 그대 겨울옷도 좀 맞춰야 하니까. 얼른 준비하고 내려오도록 해. 밤이 되면 추워지니 그전엔 들어와야 하니까.”
“네.”
“시녀를 불러 줄게.”
카리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과는 다르게 그녀도 하나하나 신경 써 주는 시녀들에게 도움을 다시 받다 보니 또 불편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후아……:”
밀라이언이 나가자마자 카리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발갛게 물든 볼과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술을 숨기고자 팔 사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말도 안 돼.”
아니지?
부정하는 그녀의 심장이 여전히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