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7)
>27 화>
* * *
“풍요의 축제?”
먹물로 큼직하고 호쾌하게 글씨가 적힌 천이 입구에서 펄럭거렸다.
이제 곧 겨울인데 풍요의 축제라고? 수확제라면 가을의 시작 쯤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겨울이 풍족하진 않을 텐데?’
특히 북부의 겨울은 다른 곳보다도 훨씬 더 혹독하다고 들었다. 풍요와는 거리가 멀 터였다.
“본격적으로 북부 검문소를 닫을 때쯤 되면 북부령은 축제를 열어.”
“……겨울이 풍요롭진 않잖아요?”
“겨울엔 북부의 문이 닫혀 있으니 소문이 잘 나진 않지만 북부령의 겨울은 달라. 북부령에선 겨울엔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거든.”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고기? 겨울엔 대부분의 동물이 겨울잠을 자지 않던가?
카리나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자 밀라이언이 웃었다.
‘뭐가 이렇게 다 티가 나?’
예전에는 가짜 미소로 다 무마 하려고 하더니, 그게 없어지니 이제는 표정과 행동으로 다 드러난다.
이래서야 어느 쪽이 좋다고 확실히 말을 할 수가 없다.
“카리나.”
“네.”
순간 불린 이름에 찌르르 떨린 심장을 애써 모른 체하며 그녀가 묵묵히 대답했다.
“누가 사탕을 주거나 신기한 걸 보여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네.”
“절대로 안 돼.”
“네.”
대답은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그의 눈에 자신이 그렇게 어리게 보이나 싶어서였다.
나이야 그가 서너 살 많았지만, 그녀는 어디 가서 어른스럽단 말을 질리도록 들은 적은 있어도 어린아이 같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씁쓸하게 생각해야 하는걸까.
새삼 진지한 밀라이언의 표정을 보며 카리나는 결국 모호한 표정으로 웃어 버렸다.
다행히 그는 못 미더운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축제의 준비 중인 것인지 영지의 중심인 시장 내부는 어수선했다.
근육질의 사람들이 긴 통나무나 각목을 옮기고 또 천막을 치고 가게에 뭔가를 붙이고 홍보지를 나눠주는 이들도 많았다.
“무슨 고기를 먹기에 그래요?”
“마수.”
“네?”
“문 닫은 북부의 식량이 어디서 나오겠어. 당연히 마수지.”
마수를 먹는다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카리나가 벌어진 입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예전에 아버지가 열 받아서 북부 검문소를 열어 둔 채로 토벌을 안 나간 적이 한 번 있는데 그때는 다들 배를 곯았어.”
“아…….”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뒤늦게 입을 다물곤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내가 좁은 세계에서 살긴 살았네.’
그녀의 세계는 좁았다. 상식도 아는 것도 전부 책에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카리나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북부 검문소만 닫고 페스텔리오령은 문을 닫지 않나요?”
“아니, 눈이 내리면 이쪽도 닫을거야. 북부 검문소는 오늘 닫을 테니, 마지막으로 검문소를 통과한 이들이 이곳이든 타 영지든 무사히 도착할 때까진 기다려야지.”
“아아.”
가볍게 수긍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겨울에도 두껍지 않은 긴 팔의 옷이면 충분한 남부령의 겨울과는 다르게 북부령은 아직 겨울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툼한 겉옷을 걸치지 않으면 추위가 뻣속까지 스며들었다.
새파랗게 시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밀라이언을 힐끗 바라 봤다.
카리나의 볼이 추위 때문인지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 * *
“여기가 페스텔리오 공작령입니다, 의원님.”
“아, 고맙네.”
윈스턴이 제법 긴 시간 신세를 진 마차에서 훌쩍 내리며 말했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그가 중절모를 손으로 꾹 누르며 한 손에는 가방을 든 채 고개를 젖혔다.
“이 시기에 축제인가?”
“네, 이맘때의 북부는 언제나 축제 분위기입니다. 마수 사냥을 나가기 전의 의식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고맙네, 조심히 들어가시게.”
“예, 다시 한 번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닐세, 의원이 할 일이지.”
윈스턴은 손사래를 치곤 마부와 가벼운 인사를 끝냈다.
북부령 내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간다는 그는 두어 번 더 허리를 굽혀 보이곤 홀쩍 마차에 올라타 멀어졌다.
윈스턴이 신분패를 보이곤 어렵지 않게 페스텔리오 공작령으로 들어갔다.
제국 의원 협회에서 나온 자격 증이란 신분을 증명할 때 가장 쓸모가 있었다.
“실력이 녹슬지 않았어야 하는데.”
윈스턴이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곤 그것을 오는 길 쉬지 않고 수놓은 북부령의 지도가 새겨진 천에 가져다 댔다.
천이 순식간에 불타기 시작했다.
애초에 잘 타는 재질의 천에 수를 놓은 탓에 성냥불은 순식간에 지도가 새겨진 천을 집어삼켰다.
윈스턴이 남은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것을 하늘로 던지자 허공에서 천이 잿가루가 되어 버렸다.
이변은 거기서 일어났다. 바람에 날아가야 했을 잿가루가 뭉쳐 이윽고 초록색의 빛무리가 되더니 윈스턴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자, 아가씨를 찾아봐라.”
윈스턴이 손에 쥔 그것을 하늘로 던졌다.
빛무리가 망설이는 듯 허공을 몇 차례 이리저리 배회하더니 이윽고 어딘가로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윈스턴이 가방을 단단하게 챙기며 빛무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열은 회색 눈동자의 위에 서서히 다른 색이 덮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한 금빛으로 물들어 기이하게 반짝거렸다.
* * *
“우와.”
“세상에.”
“헉.”
밀라이언이 눈을 반짝이는 카리나를 보며 웃지 않기 위해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입술과 입꼬리에 힘을 주고 주먹을 꽉 쥐고 뭉툭한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럼에도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어서 그는 결국 헛기침을 하는 척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북부령의 축제는 수도의 축제나 남부의 축제와는 그 느낌부터 달랐다.
축제라서 사람들이 들떠 있긴 하지만 축제 분위기 자체는 사실 살벌했다.
곳곳에 마수의 시체가 자랑스럽게 널려져 있고 토막 난 마수의 꼬치구이나 고기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보이는 마수 해체 쇼는 특히나 카리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마수의 활동 시기는 대개 겨울이지만 빠른 녀석들은 가을이 되자마자 긴 여름잠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북부령에선 늦가을이 되면 자기 영지 주변을 돌며 한 차례 가벼운 토벌을 하는데, 그 때 잡은 마수는 축제 때 이용하곤 했다.
“그렇게 신기해?”
“네, 되게…… 노골적이네요.”
카리나가 제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마수의 온전한 가죽을 보며 대답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도르르 굴러간 눈동자가 신기함에 물들었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옆얼굴을 슬쩍 보곤 부드럽게 웃었다.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카리나는 숨을 훅 뱉으면 입김이 솟아오르는 날씨를 보는 것도 신기해했으니 말이다.
“뭐 가지고 싶은 건 없고?”
“네.”
카리나가 담담히 대답했다. 딱히 원하는 건 없었다.
축제라 그런지 대부분은 먹거리 였고 카리나는 자극적인 음식을 웬만해선 피하고 있는 터였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웩웩 게워내는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밀라이언도 있고.’
그녀가 기-승-전-밀라이언으로 이어지는 사고를 뒤늦게 눈치채곤 제 손바닥에 이마를 쿵 부딪쳤다.
카리나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볼을 숨기며 손을 휘휘 저었다.
밀라이언은 함께 다니기 무척 편한 상대였다.
쉴 새 없이 말을 시키지는 않지만 종종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설명을 해 주며 묵묵히 곁을 지켰다.
사람이 많아 카리나가 휩쓸리려고 하자 빠르게 눈치채곤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스스로 말했던 대로 파트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닌 듯 보였지만 에스코트하는 것이 몸에 자연스레 배어 있었다.
자주 사교계 파티를 참석하는 인프릭보다도 더 부드럽고 유연했다.
‘용병이라 그런가……?’
같은 검을 쓰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눈치가 빠르고 움직임이 유려 했다.
땡-! 땡-! 땡-! 땡-!
어디선가 다급한 경종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