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32)
>32 화>
“잃을 뻔한 거지. 멀쩡히 이 먼 북부까지 찾아왔으니 잃은 건 아니네.”
카리나의 말을 윈스턴이 부드럽게 정정했다.
“그나저나 첫 만남이 의사와 환자였으니 이제 와서 어색해서 그러네만…….”
“네?”
“보아하니 아가씨는 높으신 분이 아닌가 싶은데, 말은 이대로여도 괜찮은 겐가?”
“네, 물론이죠. 괜찮아요.”
아무리 그녀가 귀족가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윈스턴과는 레오폴드 백작가의 여식이 아니라 그저 카리나라는 한 명의 인물로서 맺은 인연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위에 권력이나 신분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그거 다행이구먼.”
허허롭게 웃는 윈스턴에게서 시력을 잃을 뻔했다는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대의 예술병은 나았나?”
카리나가 물을까 말까 고민하던 것을 밀라이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혀끝에 올렸다.
밀라이언은 예술병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에겐 별로 없는 쪽의 정보이기도 했지만 카리나가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니 반쯤은 오기도 생긴 탓이다.
“아뇨, 솔직히 말해서 예술병에 명확한 치료법은 없습니다.”
“치료법이 없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그대는 시력을 잃지 않은 걸로 보이는데.”
밀라이언의 의문에 윈스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오랜 시간 세월에 무뎌진 수십 번은 더 들어 봤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익숙하게 미소 짓고,
“자수를 손에서 놨지요.”
담담하게 대답하기까지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카리나가 말없이 윈스턴의 맺혔다 사라지는 미소를 바라봤다.
자기 삶의 끝을 인정하고 가족들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까?
제 입으로 끝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의문만이 머릿속을 떠돌 뿐 해답은 없었다.
“그 예술병이라는 것을 치료하기 위해선 반드시 예술을 손에서 놓아야만 하는 건가?”
“가장 간단하고 빠른 해결법은 그렇습니다.”
윈스턴이 수긍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예술병이라는 게 모든 사람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중에서도 겨우 1할의 확률이지요.”
“열 명 중 한 명꼴이군.”
“그렇습니다. 기적을 일으킬 정도로 뛰어난 예술가는 대략 5, 60년을 기준으로 100명을 넘은 경우가 없지요. 그러니 100년을 기준으로 뒀을 때 아주 많으면 스물에서 스물다섯 명이 예술병 에 걸립니다.”
오랫동안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윈스턴의 입에선 그들이 모르는 정보가 술술 흘러나왔다.
손가락을 접어 가며 보여 주는 그의 모습에 카리나는 그제야 자신이 걸린 병의 희소성이 실감 났다.
“그 희박한 확률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건 눈이나 감각이 아니라 기적의 대가로 생명을 빼앗기는 경우입니다.”
“그건 어느 정도의 확률이지?”
“지금까지의 확률로 따지자면 예술병에 걸린 사람 100명 중 한 명에게 나타나는 정도의 증상이지요. 5,60년에 나타나는 모든 예술병에 걸린 예술가 중 한 명 만이 걸리는 낮은 확률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밀라이언의 눈에 옅은 안도감이 번졌다.
밀라이언의 눈빛에 감도는 안도를 확인한 윈스턴의 시선은 굳어있는 카리나에게 향했다.
카리나가 침을 삼켰다. 긴장을 참아 내느라 힘을 준 목구멍이 뻐근하게 아팠다.
윈스턴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마주한 카리나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었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손을 보며 윈스턴이 한숨을 삼켰다.
“그래서 더 궁금한 게 없다면 내가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아가씨?”
“……네.”
카리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윈스턴의 입술이 벌어졌다.
차마 밀라이언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한 카리나의 시선이 윈스턴에게 고정됐다.
축축해지는 손바닥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주먹을 몇 차례나 쥐었다 펴던 카리나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가볍게 생각했던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감정과 동시에 죄책감이 되어 그녀를 짓눌렀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밀라이언의 시선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될 줄도 숨기고 있는 사실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무겁고 버거운 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제 방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아파져 오는 목구멍에서 카리나가 간신히 말을 끄집어냈다.
그 명백한 선 긋기에 가만히 앉아 있던 밀라이언의 등허리가 굳었다.
딱딱하게 굳은 눈매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리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조금쯤은 흐릿해졌다고 생각했던 단단한 벽이 한층 더 견고해져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카리나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상관없네.”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윈스턴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윈스턴의 대답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카리나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옷자락을 꽉 죈 채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명이 울릴 정도로 시끄럽게 뛰는 심장은 그의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을 때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빠르게 도는 피가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듯 싸한 느낌이었다.
“괜찮다면…….”
카리나가 달싹이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
미움 받지 않기 위해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수많은 것들을 유일하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한 사람이다.
“다음에도…… 권해 주세요.”
꾹꾹 눌러 왔던 욕망 하나를 카리나가 간신히 속에서 끄집어냈다.
밀라이언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대화를 나눌 때면 시선을 마주 하려고 애쓰던 카리나의 눈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대답을 기다리던 카리나가 결국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 볼게요, 밀라이언.”
대답을 기다리며 카리나가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윈스턴이 먼저 나가고 문을 닫을 때까지도 뒤에선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발에 추가 달린 듯 다리가 무거웠다.
문을 닫고 나가 응접실과 제법 멀어졌을 때쯤 카리나는 굳은 허리와 목에서 천천히 힘을 뻘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았구먼.”
“기분 나빠할 테니까 할 수가 없었어요.”
“기분?”
“……곧 죽을 사람과 같이 산다는 걸요. 밀라이언은 타인에게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지금은 더 못하게 됐어요.”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카리나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간신히 방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시녀에게 차와 다과를 부탁한 그녀가 탁자에 앉았다.
윈스턴과 마주 앉은 카리나가 허리를 곧게 편 채 입을 열었다.
“속여서 죄송했습니다.”
“음? 뭐가 말인가? 신분에 관한 거라면 괜찮네. 무슨 이유가 있었건 아가씨는 환자였으니.”
윈스턴의 말에 카리나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가 적어 준 편지가 오는 내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가.
그녀로선 그것에 대해서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다시 소개할게요, 레오폴드 백작가의 카리나 레오폴드라고 합니다.”
“……레오폴드?”
윈스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
영지의 의원이었으니 영주의 가문명 정도는 알고 있겠지.
혹여나 부담스럽게 여기면 어쩌나 싶어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윈스턴의 반응이 기묘했다.
“레오폴드 백작가엔 주치의가 따로 있지 않았나?”
“네.”
카리나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윈스턴의 눈이 동그래지며 묘한 시선이 카리나를 향했다.
“주치의에겐 왜 가지 않았나?”
카리나가 잠시 고민했다.
수많은 이유가 있었고 수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이곳에 와서 곰곰이 생각한 결과 나온 답은 하나였다.
“그냥 절 모르는 사람에게 가고 싶기도 했고…….”
카리나가 살짝 눈치를 살폈다.
“조금 믿을 수 없기도 했어요.”
“어째서?”
윈스턴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주치의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나?”
턱을 매만지며 윈스턴이 넌지시 물었다.
윈스턴의 질문에 카리나가 눈동자를 모로 내리깔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부드럽게 웃고 있는 녹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쩐지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카리나가 서툴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고자질이랄 게 뭐가 있겠나. 서운한 일이 있었으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
윈스턴이 고개를 저었다.
“마침 잘 됐지. 어디 이참에 자네의 이야기를 해 보게. 속앓이는 만병의 근원이야.”
거리낄 것 없다는 듯한 호쾌한 대답에 카리나의 눈이 둥글게 접혔다.
“음. 제겐 쌍둥이인 동생이 있는데, 남동생 쪽은 건강한데 여동생 쪽은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어요.”
그녀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드리워졌다.
“그랬나?”
윈스턴이 짐짓 모른 척 그녀의 말에 반문했다.
애초에 주기적으로 녹턴이 백작저에 방문하는 이유가 그 병약한 막내 여식 때문임을 윈스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녹턴에게는 별다른 말을 듣지 못했던 터라 카리나의 입으로 사정을 듣고 싶기도 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윈스턴의 물음 아닌 물음에 수긍했다.
‘죽은 제 동생과 닮았다고 했었지.’
그래서 그런지 조금 병적인 집착을 보여 염려의 말을 몇 번 던지긴 했지만, 제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녀석이니 속으론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는 법이다.
“의원님, 그거 아세요?”
윈스턴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카리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점점 메이는 목에서 소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힘을 주자 목구멍이 아팠다.
“제 세계의 중심엔 언제나 아벨리아가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