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33)
>33 화>
아벨리아는 지켜야 하는 존재였다. 모든 언니와 동생의 관계가 그런 줄 알았다. 언니는 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깨닫고 나니 당연했던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내 삶인데…… 제 인생이었는데, 의원님께 제 상황을 듣고 이 먼 곳까지 와서야 들추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를 돌아보니 내 삶엔 내가 없었어요.”
카리나가 긴 숨을 뱉었다.
“아가씨.”
“네.”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네. 아가씨는 사람이야. 사람의 상처는 언제나 사람이 만들지.”
잔잔한 목소리에 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시리디 시린 푸른 눈동자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말로써 가슴을 후벼 파는 것도 무기를 만들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네.”
윈스턴은 찻잔을 매만지던 손을 뻗어 카리나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온통 굳은살로 가득한 손바닥은 무척 거칠었으나 그곳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겨울날 벽난로 앞에 있는 것보다도 훨씬 따뜻했다.
“상처를 준 사람들 곁에 있는 건 힘겨운 일이지. 오랜 시간 버텼구먼. 아주, 힘들었겠어.”
연륜이 담긴 윈스턴의 음성에 카리나의 눈이 훌쩍 커졌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카리나의 손등을 서툴게 쓰다듬었다.
그 온기에 여트막한 감정이 스며 있던 눈동자가 곧 풍랑을 맞은 배처럼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툭, 카리나의 고개가 아래로 떨궈졌다.
“예 전에 남동생에게 지갑을 빼앗긴 적이 있어요. 그날은 울적해서 어머니께 하루만 함께 자고 싶다고 했거든요.”
카리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철없다며 크게 화를 내기에 동생 따윈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날 난생처음 어머니께 맞았어요.”
카리나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깊은 심해로, 그보다 더 깊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는 탁해졌고 눈동자는 순간 생기를 잃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가끔 뚜렷하게 떠올랐다.
이 기억만큼은 아무리 밟고 깊은 곳에 가라앉혀도 늦은 밤 악몽이 되어 등줄기를 선득하게 하곤 했다. 눈꺼풀 아래로 높이 치켜든 새하얀 손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있는 곳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짜악-!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니! 어떻게 동생을 두고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언니니! 대체 다 큰 애가 어리광이 왜 그리 많아! 건강하게 태어난 걸 감사히 여기고 동생에게 더 잘해 줘야지!”
“하지만 저도 몸이 뜨겁고…….”
“자꾸 꾀병 부릴 거니?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했지.”
끔찍하다는 듯 비명처럼 내지른 어머니의 목소리에 카리나는 충격을 받았다.
“카리나, 다른 불쌍한 아이들에 비해 넌 아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단다. 한 번 더 그런 말을 하면 너도 빈민촌에 버려질 거야. 그곳에 가면 맛있는 식사도 예쁜 옷도 깨끗한 방도 없어. 알겠니?”
“…… 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니?”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우는 것조차 혼이 날까 봐 겁에 질린 채 벌벌 떨며 그저 용서를 빌었다.
빈민촌이 어딘지 무엇을 하는 데인지 잘 알지 못했지만 쫓겨난다는 사실은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래. 하아, 네가 건강한 반만큼이라도 리아가 건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목이 돌아간 것보다, 뺨을 타고 오르는 열기보다 뺨을 때리고 잔뜩 노한 얼굴로 혼을 내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표정이 훨씬 뇌리에 박혔다.
뭣보다 가장 소름이 돋았던 것은 마지막에 보여 준 눈빛이, 그 목소리가 마치 자신이 건강하게 태어난 것을 탓하는 것만 같았다는 사실이다.
“아가씨, 내게도 참 서럽던 시절이 있었다네.”
조용하고 무거운 공기 사이로 윈스턴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리나가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색 바란 기억을 떠올리는 듯 살짝 탁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심해로 가라앉듯 하염없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예술병에 걸렸었다는 건 알고 있지?”
“네.”
”나는 자수를 놓는 것을 참 좋아했네. 자수를 놓는 순간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카리나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윈스턴이 빙긋 웃는다.
“자네도 그랬던 거겠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었던 거지?”
꼭꼭 숨겨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스스로조차 깨닫지 못했던 속내였다.
그것을 타인에게 듣는 기분이 어쩐지 묘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나는 자수를 좋아했지만…… 하지만 남자가 자수를 하는 건 세간에선 좋게 보지 않지.”
“하지만 작품은……!”
“아가씨 말이 맞아. 예술에 성별이 어디 있으며 높고 낮음이 어디 있겠나.”
그가 인자하게 웃었다. 푸근한 그 미소를 보면서도 카리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모양이야.”
윈스턴이 쓰게 웃었다.
인자하게만 보였던 그의 또 다른 일면에 카리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 부모님은 내가 기사가 되어 작위를 받길 원했지만 나는 사실 운동이라곤 완전 꽝이었거든.”
윈스턴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숨죽여 속삭였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어. 사람들은 나를 유약한 인간이라고 욕했지.”
쓴웃음 사이에서 느껴지는 짙은 연륜에 카리나는 잔잔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럴수록 나는 자수에 더 빠져 들었고 어느 날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됐다네.”
윈스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덧씌워졌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지. 아무리 찾고찾고 찾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떠나보내려 했지.”
윈스턴의 눈빛이 살짝 풀어졌다.
오래된 기억 상자에 쌓인 먼지를 털어 다시 여는 것은 그에게 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물건을 수놓아서 불에 태웠네. 마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고인의 물건을 태워 함께 보내줄 때처럼.”
그때의 일은 떠을리려고만 하면 지금까지도 뇌리에 박혀 선명히 떠올랐다.
그것은 윈스턴이 본 첫 기적이었다.
그는 그 풍경을 줄곧 잊을 수 없었다. 꺼져버린 불꽃에서부터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한 아름다운 빛무리.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이라는 이름이 었지.”
문득 그의 눈동자에 황금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진 것도 같았다.
“재가 되어 사라진 하늘에서 빛 무리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네.”
윈스턴이 시선을 카리나에게서 살짝 비낀 채 말했다.
“그것은 내게 따라오라는 듯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어딘가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지.”
그가 손가락을 허공에 두어 번 빙글빙글 돌리며 설명했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홀린 듯이 그 빛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네.”
“…….”
“……그리고 발견했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물건을. 기적이 내게 되찾게 해 줬어.”
카리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누군가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내 능력에 대해 이리저리 시험하기 시작했어.”
윈스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 능력은 뭐든 찾아낼 수 있었다네. 발동 조건은 간단했지. 자수를 놓고 불에 태운다.”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서 내가 어딨는지……?’
말하고 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찾아왔던 거구나.
카리나가 놀란 눈을 하자 원스턴이 짐작했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을 대가로 나는 무엇이든 찾을 수 있었어. 그리고 굳이 찾기 위한 대상을 수놓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지.”
“대단하네요.”
“대단했지. 그걸 위한 준비는 간단했어. 찾고 싶은 것을 머릿 속으로 생각하며 수를 놓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헛헛한 웃음을 흘린 윈스턴이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작은 상담소를 열었지. 범죄자를 찾고 범인의 단서를 제공하고 집 나간 자식이나 애완동물을 찾아 주고…….”
윈스턴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는 듯 무척이나 행복하게 보였다.
“마치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었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윈스턴의 행복한 과거의 파편을 엿보는 듯 했다.
“늘 무시당하던 인생에서 세상이 내가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네. 부모님도 내가 자수를 하는 걸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지.”
이건 자신의 또 다른 이야기였다.
카리나가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을 선택했다면 찾아왔을지 모르는 또 다른 자신의 이야기.
“주변에서 띄워 주니 나도 쉼없이 자수를 놨어. 돈도 제법 벌었지.”
“네…….”
“그렇게 20년 가까이 됐을 거네. 눈이 침침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흐릿해지는 날이 늘어났지.”
윈스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생기 넘치듯 반짝이던 눈동자도 살짝 탁해졌다.
“손끝의 감각으로 어떻게든 자수를 하긴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 했어.”
윈스턴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자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네.”
“그랬군요…….”
“그리고 서른다섯, 늦은 나이에 병원에 갔지. 예술병을 진단 받았어.”
카리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이대로 가면 실명을 할 거고 그러지 않으려면 실과 바늘을 손에서 놓는 수밖에 없었지.”
그의 말에 도리어 그녀의 몸이 굳었다. 그림을 손에서 놓는다는건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난 이것만 믿고 준비해 놓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야.”
윈스턴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러나 카리나는 차마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지금은 추억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된 내용이겠지만 그러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