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34)
>34 화>
“절망했고 죽으려고 했네.”
“…….”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윈스턴이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예술병은 절대 고칠 수 없고 진행을 막기 위해선 인생을 다 바친 것을 손에서 놓는 수밖에 없다고 하니까.”
윈스턴의 말이 맞다.
그림은 유일한 기댈 곳이다. 유일하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부모님은 실망했지. 나는 모든 걸 두고 죽기 위한 여행을 떠났어.”
카리나가 멍하니 윈스턴을 바라봤다. 윈스턴이 빙긋 웃었다.
“자네처럼 나도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거든. 그러다가 한 난민촌에 흘러 들어가게 됐지.”
“…….”
“그곳에는 살고자 하는 이들로 가득했지. 누군가가 보기엔 더럽고 처절할지 모르겠지만 치열한 삶이었어.”
카리나의 입이 닫혔다. 그녀가 다시금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병마와 싸우는 이들도 있었네. 나는…… 그들을 살리고 싶어졌어. 그리고 언젠가 예술병을 불치병이라 부르지 않게 하고 싶어 졌지.”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에게는 또 다른 꿈이 생긴 것이라는 걸.
그 꿈이 그가 목숨처럼 아끼던 자수를 놓을 수 있게 해 줬다는 것을.
“바늘 대신 집착할 다른 것을 찾은 거야. 다행히 의학은 내게도 잘 맞았네.”
웃는 그를 보며 카리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녀는 놓을 수 없다. 그런 꿈이 없었다.
윈스턴의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가 카리나에게 닿았다.
“자네를 보니 내 생각이 났어. 그래서 모른 척할 수 없었네.”
“……네.”
카리나가 낮게 대답했다.
그는 그 안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괴로움을 이겨 냈는지는 자세히 알려 주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윈스턴이 제 손으로 만들어 낸 그의 이야기였다.
결코 카리나 레오폴드의 이야기는 될 수 없었다.
“나도 그랬네. 누구나 힘든 시기도, 세상에서 등 돌리고 싶은 시기도 있는 법이네.”
“네…….”
“자네는 잘못되지 않았네. 나쁘지 않았어. 아가씨가 이제라도 집과 거리를 둔 것은 잘한 일이야.”
“……정말요?”
“그래, 속을 썩게 하던 근원에서 멀어지면 사람은 비로소 출발점에 서는 것이네.”
출발점에 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람은 언제쯤 출발점에 서는 것일까?
평생 속을 썩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평생 출발점에 서지 않는 것인가?
카리나는 멍하니 윈스턴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 상처를 낫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하지만 나는 상처에서 멀어지는 것 또한 상처를 낫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
“진부한 말이긴 하네만 상처를 주는 건 사람이지만 그걸 낫게 하는 것도 사람이네.”
윈스턴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해 주고 싶었던 말을 차분히 정리해 입에 올렸다.
카리나는 여전히 그에게 손이 붙잡힌 채 윈스턴의 말을 들었다.
“이제 울타리에서 벗어났으니 새로운 인연을 많이 만들게나.”
윈스턴이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과거의 기억을 옅게 해 주고 아가씨의 새로운 추억이 되어줄테고 웃음이 되겠지. 그러면 언젠가 모든 것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거야.”
“저는 비겁하게 말없이 도망쳤는데도요?”
“세상은 도망치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욕하지만 전쟁에서도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건 일상이네. 후퇴해서 다시 전진하기 위한 힘을 얻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비유에 카리나의 눈동자가 한층 크기를 키웠다.
“재정비를 하고 체력을 채우고 계획을 세워서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거네.”
윈스턴이 쉬지 않고 그러나 최대한 흥분한 기색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흐릿하게 떠오른 카리나의 미소에 그가 버석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가씨도 지금 그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면 좋아. 토벌해서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조차 후퇴가 없진 않았을거네. 어떤 영웅도 승리만을 쟁취했던 사람은 없지.”
“…….”
“실패도 도망도 후퇴도 전부 다음에 있을 도약을 위한 준비 과정이지. 그러니 부끄러워 하지 말게.”
“……네, 그럴게요.”
한참 만에 카리나가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 * *
“그래서 아가씨 가문의 주치의 얘기는 아직도 안 나왔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한참이나 말이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을 깨려는 듯 윈스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카리나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닫혔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주치의가 저택에 온 건 제가 열일곱 살 때쯤의 일이었어요. 주치의는 저보다 두 살인가 나이가 많았고요.”
“그랬구먼.”
윈스턴은 식은 찻잔으로 입술을 적시며 대답했다.
카리나는 윈스턴의 반응을 살폈지만 연륜으로 무장한 노인의 표정을 읽어 내기란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시작한 얘기를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서 카리나는 잠시 멈췄던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사실 조금 부끄럽지만…… 그 주치의를 만난 날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됐거든요.”
무감정한 얼굴 위로 피어오른 열은 미소에 윈스턴의 눈이 커졌다.
그가 눈가를 좁혔다가 이윽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이곳에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르고…….”
저택에 딸린 작은 정원에서의 만남이었다.
녹턴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보기 좋게 반달로 접히는 눈매나 한껏 말려 올라가는 입술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어조는 부드러우면서 음색은 단정하고 꿀이 떨어지는 것처럼 달콤한 느낌이었다.
톡 떨어진 이슬비를 맞고 새싹이 움트듯 카리나에게도 느지막한 첫봄이 찾아왔다.
“이런 큰 저택은 처음이라 허락을 받고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신가요?”
“이번에 백작저의 주치의를 맡게 된 녹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가씨.”
입담이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녹턴 특유의 능글맞고 서글서글한 성격은 순식간에 백작저 내의 사용인들과 친분을 쌓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유독 아벨리아에게 다정했다.
녹턴은 누구에게나 다정했으나 아벨리아를 향하는 다정함만큼은 무척 특별했다.
아벨리아는 늘 밝은 얼굴로 녹턴과 대화를 나눴고 녹턴은 누구나 그렇듯 자연스럽게 아벨리아의 밝음에 빠져들었다.
녹턴이 아벨리아를 보는 눈은 끈적하고 기분 나쁜 시선이 아니었다.
그는 아벨리아를 여동생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녹턴의 시선은 언제나 아벨리아에게 닿아 있었다. 그녀의 이변을 눈치채는 것은 늘 녹턴이었다.
카리나는 언제나 녹턴의 뒤를 바라봤으나, 녹턴은 언제나 아벨리아를 보고 있었다.
“혼자 하는 짝사랑이었어요. 딱히 보답을 바라고 시작한 마음도 아니었거니와 저도 그 마음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요.”
깨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진 짝사랑이었다.
그래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아벨리아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카리나는 늘 그녀와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날도 서재에서 책을 찾던 때였다.
“언니. 나도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
아벨리아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카리나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심드렁한 눈으로 책을 한 권씩 뺐다 꽂기를 반복했다.
늘 다니는 동선이 거기서 거기니 아벨리아도 질렸던 모양이었다.
서재엔 책이 반도 채 채워지지 않은 책장이 하나 있었고 카리나는 그 책장 앞에서 새로 들어온 책을 한 권씩 살피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운이 나빴다고도 할 수 있다.
책장은 어디가 뒤틀렸는지 아벨리아가 건드릴 때마다 한 번씩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우뚱거리는 책장이 위험해 보였지만 책을 한 권씩 넣었다 빼는 것에는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책장은 뒤가 막히지 않고 앞뒤가 뚫린 종류였다.
책을 빼면 반대편의 사람과 눈이 마주칠 수 있는, 다량의 책을 수납하기에 편리하게 제작된 책장.
예상 밖이었던 것은 아벨리아가 그녀를 놀라게 하려고 반대편에서 책을 꺼내 그 좁은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것이었다.
불안정하던 책장이 앞으로 무너져 내리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꺄아아악!”
“아…….”
아벨리아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책장이 카리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