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35)
>35 화>
책이 우수수 쏟아져 그녀의 온몸을 때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져 내리자 그 위로 또 무거운 책들이 쏟아졌다.
통증과 함께 덮쳐 오는 책장은 다행히 다른 책장에 걸려 카리나를 깔아뭉개기 바로 직전에 멈췄다.
“아벨리아!”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벨리아의 검진을 위해 그녀를 찾고 있던 녹턴이었다.
아벨리아는 놀랐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카리나였다.
카리나는 모서리에 맞은 머리도 아팠고 팔다리에 떨어진 무거운 책에 깔린 손은 경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녹턴의 신경은 온통 아벨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세상에, 아벨리아. 괜찮습니까? 어…… 어디 다친 곳은…….”
“나, 난 괜……찮아…….”
놀란 듯 한껏 경직된 아벨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리나는 간신히 몸을 덮고 있는 책 더미를 하나씩 치워 낼 수 있었다.
책이 떨어지는 소리에 녹턴이 카리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당신과 다르게 아벨리아 아가씨는 약하다고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갑자기 책장이…….”
“당신 쪽으로 쏟아져서 다행이지, 이 애 쪽으로 쏟아졌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대체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으득,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네 쪽으로 쏟아져서 다행이라는 말을 악다구니처럼 내뱉는 그는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녹턴은 마치 제 새끼를 지키듯 잔뜩 날을 세운 사나운 기세를 뿜어 댔다.
겁에 질린 듯 아벨리아를 품에 안은 채 털을 잔뜩 세운 짐승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애는 약합니다, 지켜 주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요. ”
“너…… 아벨리아를 좋아해?”
“이성적인 의미라면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나는 그게 어떤 일이라도 필사적으로 막을 겁니다. ……또 다시 잃을 순 없으니까요.”
그 말을 끝낸 그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아벨리아를 안아든 채 서재를 떠나갔다.
“책이란 게 떨어지니까 제법 아프더라고요.”
그랬군, 그랬어. 윈스턴이 어딘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카리나는 또다시 생각이라도 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혹시 그 주치의는 돌아왔나?”
조용해진 적막을 가르는 목소리가 무척 낮고 서늘했다. 다정했던 목소리는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딱딱한 윈스턴의 말에도 카리나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과거를 떠올리느라 제 감정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급급했으니까.
“아뇨.”
윈스턴의 눈이 한층 더 매섭게 굳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카리나가 쓰게 웃었다.
“놀라기도 놀라고 몸도 아프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기다렸어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1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뒤늦게 명령을 받은 사용인들이 뒷정리를 하려고 와서 희멀건 얼굴로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도 녹턴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리나 아가씨……? 여기엔 어쩐 일로…….”
“…….”
“아! 아벨리아 아가씨가 걱정돼서 찾으러 오신 거라면, 지금 주치의가 방에서 상태를 보고 계시는 중이에요. 2층에 올라가 보세요.”
시녀의 말에 상황을 설명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정신이 멍했고 몸은 아팠고 손은 여전히 떨렸다는 것만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리의 떨림이 멎어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힘을 준 다리로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오르자마자 들려오는 것은 가족들의 목소리였다.
“세상에, 도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이 애에게 큰일이 났으면 나는 정말 고통스러웠을 거네. 도와줘서 고맙네, 녹턴.”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벨리아 아가씨께선 놀라셨던 것뿐이니, 괜찮습니다. 지금은 잠에 푹 드셨기도 하고요.”
아벨리아의 방 앞에 선 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식비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녹턴을 향한 마음이 꺾인 것은 그날이었다.
“카리나도 애가 위험한 짓을 하면 말리기라도 했어야지. 언니가 돼서 동생도 제대로 돌보질 못하고…….”
“확실히 카리나도 아직 철이 없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어떻게 동생이 다쳤는데 한 번 오지를 않는지. 정말, 내 딸이지만 이기적이야.”
“좀 더 자라면 괜찮을 거예요.”
무슨 얘기를 어디까지 어떻게 들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녹턴이 자신에 대한 얘기를 부모님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는 것과 부모님 역시 그 일에 휘말린 자신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저 자신의 가치가 ‘아벨리아의 언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을 뿐이다.
좋아했던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됐을 뿐이다.
그는 아벨리아에게 해가 된다면 진실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카리나는 조용히 복도 가장 끝에 있는 제 방까지 절뚝절뚝 걸어갔다.
방에 도착해서야 뒤늦게 발목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고개를 숙였다. 떨어지는 책에 찍혔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날 카리나는 울었다.
끅끅거리며 속으로 참아 낸 서글픈 울음이었다.
깜빡, 눈꺼풀을 한 차례 감았다 뜨자 눈앞에 잔상처럼 침대 위에 무너진 열여덟의 카리나가 흐려졌다.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눈앞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윈스턴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녀석이 결국……’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제 여동생과 환자를 동일시해선 안 된다고, 모든 이들에게 공평 해야 한다고 그토록 주의를 주고 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런 식으로 굴었구나.
그의 여동생에 대한 집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윈스턴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냥 그때 깨달았어요. 녹…… 아니, 백작저의 주치의는 그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모든 일의 우선순위에 그 아이가 있을 거라는 걸…….”
카리나가 오랜 시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차분하게 털어 놨다.
이 얘기를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 얘기를 하면 가족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다.
녹턴에게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아벨리아는 분명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다 병세가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모두 자신을 탓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녹턴은 그럴 일을 만들지 않을 거야.’
생각이 가지를 뻗고 또 새로운 가지를 뻗어갔다. 그러다 보니 두려워졌다.
그저 속으로 삭였다. 열병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자국을 남긴 그 일을 후벼 파인 깊숙한 구덩이 속에 묻었다.
“아마도 제가 그에게 검진을 받고 그가 제 병에 관해서 먼저 알았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았어요.”
“……허어.”
“혹시 위독한 병에 걸린 거라면 아벨리아가 충격을 받을 거라는 이유로 숨기려고 하지 않을까…….”
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카리나가 말을 덧붙이며 또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자꾸 좋아서 웃는 것인지. 윈스턴은 아주 잠시 웃지 말라고 혼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것은 누가 봐도 억지 미소였다. 누가 봐도 오랜 시간 길이든 웃음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짓는 웃음은 윈스턴의 속을 한층 더 헤집었다.
“주치의를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그거예요. ……그래서 의원님을 찾아갔어요.”
카리나의 이야기를 들은 윈스턴이 고개를 떨궜다.
흠이 있음을 알고서도 살고자 하는 아이의 의지를 보아 그를 의원으로 삼았다.
다른 이들을 치료하다 보면 서서히 제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도 옅어질 것이라고 생각 했다.
최근에는 확실히 여동생의 얘기를 꺼내는 일도, 그녀와 비슷한 또래에게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신경 쓰는 행동도 줄어들었다.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설마 여동생을 투영할 상대를 찾았기 때문이었을 줄이야.
‘……녹턴!’
윈스턴이 속으로 분노했다.
늘 충고할 때마다 괜찮다고 웃으며 말하던 녹턴이 떠올랐다.
윈스턴은 녹턴을 믿었다. 그러나 녹턴은 그 신뢰를 이용하며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망령에 사로잡혀 있을 건지.’
깨닫게 된 사실에 윈스턴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다 식은 차를 입으로 털어 넣었다.
파르르 떨리던 윈스턴의 눈이 아프게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