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38)
>38 화>
고개를 든 카리나는 앞에 서 있던 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
카리나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아리아는 금세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없애곤 그녀를 안쪽 탈의실로 안내했다.
“얼음물을 내드릴까요?”
“……그냥 찬물로 부탁할게.”
탈의실 안쪽에 있는 의자에 카리나를 앉힌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탈의실 밖으로 향했다.
카리나가 고개를 돌려 탈의실 안의 거울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게 뭐야?’
시뻘겋게 변한 제 목덜미와 얼굴을 본 카리나는 경악했다.
손으로 제 얼굴과 목덜미를 더듬더듬 만졌다. 그러나 힘을 줘 쓱쏙 문질러도 힘이 들어간 잠시 동안만 하얗게 변할 뿐 다시 벌겋게 물든 색으로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마워.”
카리나가 물 잔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곤 그대로 꼴깍꼴깍 넘겼다. 속이 시원해지니 그제야 조금 살만한 것 같은 느낌이다.
“목에 걸고 계신 건 하론인가요?”
“아…… 응.”
카리나가 드레스 안쪽에 차고 온 투박한 목걸이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녀의 입술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차고 올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차고 와 버렸다.
“영주님께서도 재밌는 선물을 하셨네요.”
“재밌는 선물이라니? 그냥 상대의 건강을 기원하는 물건이라고 하던데…….”
카리나의 말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덧붙이진 않는데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뭔가를 물어보려는데 그녀가 치수를 재겠다고 옷을 벗기를 종용했다.
카리나는 그날, 무표정한 얼굴의 악마가 사는 지옥에 발을 들였다.
* * *
“…….”
“그럼 이 중에 골라 주시면 됩니다, 카리나 님.”
“…….”
카리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히 몸이 엄청나게 피곤한 건 아닌데 마라톤이라도 한 것 같이 몸이 노곤하고 피로했다.
“카리나, 괜찮나?”
“아, 네. 네에…….”
치수 재기부터 시작된 맞춤복을 위한 여정은 무척 길었다.
물론, 그녀도 부티크 디자이너에게 옷을 맞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는 저택에 방문하는 디자이너에게 치수를 재고 그들이 보여 주는 원단이나 디자인 중에 괜찮은 걸 한두 개 고르는 정도였다.
오늘은 아예 달랐다.
아리아는 카리나가 원하는 디자인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물어봤다.
어떤 자세로 자주 앉는지, 어떤 일을 많이 하는지, 이 옷을 입었을 땐 어디를 외출하는 편인지 등등 끊임없는 질문 세례에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뿐이랴, 그 와중에 원단에 디자인도 봐야 했다. 그녀는 좋아하는 천의 느낌은 어떤 건지 물었다.
또 북부의 옷은 디자인 자체가 남부와 제법 달랐기 때문에 이런 저런 종류에 대한 의견도 상세하게 대답해 줘야 했다.
속에 담긴 영혼을 누군가 쭉쭉 잡아 뺀 기분이다.
카리나는 소파에 앉은 채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대답 없는 카리나를 바라보던 밀라이언이 손을 그녀의 이마에 얹었다.
거칠지만 다정한 손길은 무척 서늘했다.
‘……시원해.’
속에서부터 들끓는 열에 숨조차도 뜨거웠던 카리나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그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이마를 비볐다.
열을 재 보려던 밀라이언이 그녀의 움직임에 그대로 굳어졌다.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식히려던 카리나가 뒤늦게 손길의 주인을 깨닫고 흠칫 몸을 굳히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아, 그…….”
카리나의 몸만 뒤로 멀찍이 물러난 터라 밀라이언의 손은 아직 허공에 굳어 있었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카리나가 멍하니 고개를 젖혀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몸이 좋지 않으면 돌아가도록 하지.”
“아니……! 괜찮아요, 조금 지친 것뿐이라서.”
“마음에 드는 건 있었고?”
“네, 다 예쁜 옷이라서…….”
카리나는 아리아가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옅게 웃었다.
그런 카리나의 옆얼굴을 가만히 본 밀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라이언?”
“그럼 전부 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응? 무슨 소리야?
카리나가 미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다가 그의 말을 곱씹어 보더니 이윽고 입을 떡 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
“그리고 근처에 화구를 파는 곳이 있나?”
“아뇨! 저 이렇게 필요 없어요!”
카리나가 밀라이언의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밀라이언이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제 품에 안았다.
“밀…!”
“쉿.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다니까,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소리야!
그녀가 발버둥을 치려는 순간 그가 카리나를 달래듯 등을 쓸어 내렸다.
밀라이언의 시선이 아리아를 향했다. 아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입을 열었다.
“화방이라면 시장 끄트머리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골목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 가면 그 끝에 하나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제작이 완료되는 대로 저택으로 배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아니, 밀라이언.”
카리나가 간신히 밀라이언의 가슴팍에서 벗어나 고개를 내밀었다.
“진짜로요…. 저건 너무 많아요. 제가 본 것만 해도 스무 벌이 훌쩍 넘는걸요.”
“두고두고 입도록 해.”
“아니 전 어차피…….”
전 어차피 다 입지 못 할 텐데.
반사적으로 입술을 뻐끔거리며 목소리를 내던 카리나가 흠칫 놀라 입을 닫았다.
그 사이 아리아에게 넉넉하게 값을 치른 밀라이언은 이미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카리나?”
“네.”
제가 내뱉으려던 말을 곱씹고 있던 카리나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눈을 한 채 자신을 기다리는 듯 놋쇠 종이 달린 문을 열고 있는 밀라이언을 본 그녀가 서둘러 그의 곁에 다가갔다.
“정말 괜찮겠나?”
밖으로 나온 밀라이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안이 온도가 높았는지 조금 더운 것뿐이라서…….”
“그랬나?”
“네.”
“일단, 화방만 들렀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밀라이언과 카리나는 느리게 거리를 걸었다.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어제와 다르게,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볼 수 있었다.
흥에 겨운 사람들과 제법 커다란 목소리가 이리저리 오가는 시장.
길거리는 화려하거나 번쩍거리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돌로 만든 듯 투박한 느낌이 강했는데, 그런 투박한 느낌에도 거리는 단정하고 깔끔했다.
생각보다 깨끗한 거리를 벗어나니 주변은 점점 조용해졌다.
카리나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밀라이언은 언제나처럼 보폭을 맞춰 곁에서 걷고 있다.
카리나의 세계는 언제나 조금은 회색빛이 섞여 있었다.
하늘이 아무리 푸르러도, 그 푸름을 손끝에서 자아내 그림을 그려 낸다고 해도,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약간의 회색빛이 감도는 세계였다.
아름답지만 정말 모두가 행복한 것인지, 그 이면을 생각하게 되는 세계.
그랬던 세계가 최근엔 너무 반짝거려서 조금은 괴로웠다.
하늘이 저토록 푸를 리가 없을 텐데 푸르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손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또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 잡아 보기.]두 번째 버킷 리스트.
거창할 것도 없고 거창할 필요도 없는, 밀라이언이 그냥 하고 싶은 것을 적으라고 했을 때 오랜 고민 끝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었다.
종종 열을 재려 이마에 닿아 오 는 그 커다랗고 서늘한 손길이 좋았다.
그것이 이마가 아니라 제 손의 열기를 식혀 주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카리나의 손이 몇 번이고 움찔 거리기를 반복했다.
움찔.
카리나의 손가락 끝이 밀라이언의 손등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실수였다는 듯 닿았다가 떨어뜨린 손끝을 바라보던 그녀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슬쩍 밀라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실수라고 생각한 것인지 그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이번이 아니면 다음은 없을 수 있다.
그녀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었다. 끝이 정해진.
잠을 자다가도 통증에 깨고 때때로 온몸을 뒤덮는 참기 힘든 열기에 차가운 것을 찾아 헤맨다.
자다 깨서 벽에 몸을 붙이고 있었던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다음 날 눈을 뜰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언할 수 없는 삶.
이 이상 두려워할 게 무엇이 있을까.
‘싫어하면 바로 떼는 걸로.’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조금 용기가 생겼다.
두어 차례 심호흡을 한 카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던 손끝이 조금은 대범하게 밀라이언의 손을 향해 훅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