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39)
>39 화>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밀라이언의 손가락 끝을 살짝 붙잡았다.
밀라이언이 밀어내는 기색이 없자 꼬옥, 그의 검지를 나름대로 힘껏 붙잡은 그녀는 긴 한숨을 뱉었다.
“후우…….”
카리나는 밀라이언이 있는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감에 귓가에 이명이 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에 주변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다.
혹시나 밀라이언이 제 손을 내칠까 긴장하고 있던 카리나는 이윽고 제 손을 힘주어 마주 잡는 손길을 느끼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밀라이언은 상냥하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 분명하다.
말이나 행동은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조금 거침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행동만큼은 그 누구보다 다정했다.
손가락만 간신히 걸어 잡은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완전히 손을 꽉 맞잡아 주었다. 마치 불안을 덜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카리나는 저도 모르게 열은 미소를 띠었다.
* * *
밀라이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를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맞잡은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 봤다.
제 손을 계속 바라보며 움찔움찔 손가락을 움직이기에 무엇을 하려고 하나 했더니, 설마 제 손을 잡을 틈을 살피고 있을 줄이야.
한참 심호흡을 하고 눈치를 살피다가 한 행동이 고작 제 손가락을 붙잡는 행동이라니.
‘귀엽군.’
밀라이언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호선을 그렸다.
그녀의 행동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더니 어느 순간 손을 맞잡아 버렸다.
‘……’
솔직히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하지만 밀라이언은 굳이 티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언제나 뜨겁다. 온기라기보다는 열기라고 하는 편이 조금 더 알맞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마도 몸 자체에 제법 열이 많은 듯 했다. 맞잡은 손에서 쿵쿵, 뛰어 대는 그녀의 박동이 느껴졌다.
“이쪽이다.”
다시 시장의 중심으로 들어서니 사람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밀라이언이 인파에서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밀라이언의 뒤를 카리나가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아리아가 알려 준 대로 길을 따라 들어가니 곧 무너지지 않을까 싶은 낡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북부에서는 흔한 벽돌집이었는데, 이곳저곳에 이끼가 끼어 있고 출입용으로 보이는 나무문은 살짝 비뚤어진 듯 어긋나 있었다.
위쪽에는 삐걱거리는 나무로 된 펫말이 쇠사슬에 비뚤게 걸려 있었다.
그나마도 펫말에 각인된 글자는 흐릿해져서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이게 정말 화방이 맞는지도 의아했다.
“……여기 영업을 하는 거 맞나?”
밀라이언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어깨를 으쓱이려던 카리나가 안에서부터 풍겨 오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영업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방은 맞는 것 같아요.”
“그래?”
“네, 안에서 물감 냄새가 나요.”
물감 특유의 조금 독하고 머리를 멍하게 하는 그 기름 같은 냄새가 났다. 화방에 가면 자주 맡게 되는 냄새라 카리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밀라이언이 의심스러운 눈을 하 면서도 순순히 화방 문고리를 붙잡았다.
끼이익-
어그러져 뻑뻑한 문을 밀라이언이 조금 더 힘을 주어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 문틈으로 조금씩 새어 나오던 유화 냄새가 한층 더 짙어졌다. 머리를 멍하게 하는 독한 냄새에도 카리나의 얼굴은 도리어 밝아졌다.
“와아…….”
안으로 발을 들인 카리나의 입술 사이로 탄성이 새어 나갔다.
좁은 골목,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 사이에 자리 잡은 화방 안은 의외로 입구의 반대쪽에서부터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반짝이는 햇빛 사이로 늘어선 각종 서랍장에선 묵은 나무 냄새가 났다.
그뿐이랴, 조금은 퀴퀴한 먼지 냄새와 종이 특유의 냄새 그리고 가장 제 존재를 뽐내는 독한 유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누군가는 역하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냄새지만 카리나에게는 이것만큼 심적으로 안정이 되는 냄새도 없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밀라이언의 손을 놓고 화방 안으로 들어갔다.
밀라이언은 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쓱 손을 놓고 멀어져 간 카리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화끈거릴 정도로 따뜻했던 손바닥이 순식간에 온기를 잃고 차게 식어 갔다.
‘……조금 더 잡고 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다.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에 밀라이언의 눈이 한층 크게 뜨였다.
‘아쉽다고?’
뭐가?
그녀가 손을 놓은 것이?
대체 왜?
새하얘지는 머릿속에 그가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리나는 허리를 살짝 굽히곤 가구 사이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가게 안을 슥 살펴보던 카리나가 누군가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안쪽에서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막혔던 칸막이가 훌쩍 열렸다.
“누구요?”
제법 걸걸하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였다.
화방 안에는 반대쪽으로 또 다른 문이 있었는데, 그 안쪽에서 허름한 튜닉을 입은 남자가 더벅 머리를 한쪽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설렁설렁 모습을 드러냈다.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남자가 입고 있는 허름한 튜닉의 한쪽 팔은 깃발처럼 펄럭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팔이 없었다.
텅 빈 왼쪽 팔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펄럭이는 천 자락뿐이었다.
밀라이언은 별다른 표정을 하지 않았지만 카리나는 속으로 조금 놀라고 말았다.
“여긴 술집도 아니고, 길 안내도 안 해 줄 거고, 기름 파는 곳도 아니니 잘못 온 거라면 돌아 나가슈.”
남자가 하품을 하며 안쪽 문에 기댄 채 성의 없이 대답했다.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온 얼굴은 남자를 무척 피로한 듯 보이게 만들었다.
카리나가 서툴게 미소 지었다.
“화구를 사고 싶은데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요?”
“……화구? 여기 북부에서 말 인가?”
“네.”
“무슨 도구가 필요한데, 꼬마 아가씨?”
카리나가 조금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제 지갑 사정을 떠올렸다.
당장 필요하면서 그리 비싸지 않은 종류의 도구가 필요했다. 카리나가 뒤쪽에 서 있는 밀라이언의 눈치를 살폈다.
‘……나가 달라고 하면 상처받으려나?’
카리나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화방을 꾸밀 때 필요한 물건 전부 내놓도록.”
그녀의 눈빛을 무슨 의미로 해석한 것인지, 그녀 대신 입을 연 것은 뒤쪽에 서 있던 밀라이언이었다.
“……전부 말이오?”
“그래. 싹싹 긁어 모아서라도 전부. 화실 하나를 꾸며준다고 생각하도록 해.”
“아아…….”
밀라이언의 말을 들은 남자의 얼굴이 퍽 비뚜름해졌다. 한쪽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모습이다.
비어 버려 축 처져 있는, 원래 라면 한쪽 팔이 있어야 했을 공간은 남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한없이 가볍게 깃발처럼 흔들렸다.
“어디 돈 많은 부잣집 나리라도 되시는 모양인데, 우리 가게엔 보다시피 부잣집 나리께서 쓸 만 한 고급스러운 물건은 없으니 다른 데 알아 보슈.”
남자가 한쪽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쫓아낼 생각만 가득한 무성의한 태도에 밀라이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벌레를 쫓아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귀족 모독죄를 씌워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태도가 왜 그렇지?”
“무슨 태도 말입니까?”
“물건을 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군.”
“아, 없는 걸 없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겠습니까?”
밀라이언의 날 선 비꼼에 남자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행동을 발견한 듯 남자의 말을 맞받아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문다.
“고급품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종류는 상관없어요.”
“종류는 상관없다고?”
“네,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되거든요.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물감이랑 납작한 붓 종류인데 혹시 있을까요?”
카리나의 나직한 설명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이나 말없이 문에 기대어 있던 그가 문득 몸을 바로 세웠다.
“실례, ”
성큼성큼 카리나에게 다가온 남자가 팔을 뻗어 카리나의 손을 붙잡곤 손바닥이 위로 가도록 휙 뒤집었다.
“지금 뭘……!”
밀라이언이 언성을 높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카리나가 손을 뻗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녀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물끄러미 손바닥 위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행위를 방관했다.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제 손은 그렇게 간신히 손가락 끝만 잡아 놓고 고개를 돌리더니, 저 옅게 띤 미소는 또 무엇인지.
깊게 골이 패인 제 미간을 아는 지 모르는지 밀라이언의 눈은 남자가 붙잡은 카리나의 손에 고정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