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42)
“지금 이 시기에?”
“네! 뭔가 깃발이 있는데…….”
상체를 쭉 내밀어 눈을 한껏 가늘게 뜬 병사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근데 저건 어느 귀족의 문양일까요……?”
병사가 의문스럽게 말하자 곁에 서 있던 기사가 한숨을 내쉬며 망원경을 홱 뺏어 왔다.
기사가 긴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 렌즈를 돌려 초점을 맞췄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멀리서 흙먼지를 뿌리며 달려오는 무리가 있었다.
그가 조금 더 위쪽에 초점을 맞췄다. 확실히 병사의 말대로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있다.
기사는 망원경을 내리고 병사를 돌아봤다.
“성문을 열어라.”
“네?”
“저분께서 바로 통과할 수 있게 성문을 열어.”
기사의 싸늘한 말에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병사가 황급히 경례를 했다.
종종걸음으로 후다닥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본 기사가 다시 흙먼지를 휘날리는 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도착하셨군.”
기사가 열리는 문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색 빛깔의 하프를 뱀이 온몸으로 둘러싸고 있는 문양.
저 독특한 도료를 사용하는 가문은 제국에 오로지 단 한 가문 밖에 없었다.
“열었습니다!”
“지나가면 바로 닫도록 해.”
“알겠습니다!”
검문소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는지 말을 탄 무리가 속도를 높였다.
기사의 명령으로 적절한 때에 열린 검문소의 문 덕분에 달려오던 무리는 지체 없이 검문소를 통과했다. 동시에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가 빠르게 검문소의 문을 다시 걸어 잠갔다.
멀어지는 이들을 보던 병사가 다시 계단을 뛰어올랐다.
“대장님, 신분증도 확인하지 않고 보내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귀족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고 해도 보통은 확인하고 보내는 것이 규칙이었다.
만에 하나의 경우이지만 귀족이 습격을 당해 깃발을 빼앗겼을 수 도 있지 않은가.
“물론, 북부에 뭐 훔쳐 갈 게 있는 건 아니지만요.”
웬만한 사람들이 검을 다룰 줄 알아서, 어중이떠중이 따위는 근처 농사꾼도 이기기 힘들 것이다.
“저 깃발 제대로 봤나?”
“네, 반짝거리는 문양이 독특하더라고요.”
“햇빛을 받으면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독특한 물감을 사용 했다더군.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허어…….”
“그리고 그걸 쓰는 가문은 제국에도 단 한 가문 밖에 없다.”
기사가 병사에게 조용히 설명했다.
저 물감은 그 가문에서 직접 개발한 물감이었다. 특허권도 가져가 버려서 어디서 감히 유통할 수도 없고 제조법도 오로지 그 가문에서만 알고 있다고 들었다.
즉, 그 가문의 신분 증명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특수 물감이었다.
“그래서 어느 가문이랍니까?”
“칼로스 가문.”
“……그, 미친 가주가 있는 가문이요?”
병사가 무척 떨떠름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나라한 그 단어 선택에 기사가 슬쩍 그를 흘겨봤다. 병사가 뒤늦게 제 입술을 매만졌다.
“우리 각하 못지않은 성격이라고 하던데, 아닌가요?”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밀라이언이 몬스터와의 토벌에서 한 번 눈이 돌아가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는 여러 차례 밀라이언과 함께 토벌에 참여했고 그의 다양한 모습을 봤다.
그들의 주인은 분명 강하지만 아쉽게도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불친절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친구이신 거겠지.”
그는 백 마디 말보다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을 축약했다. 이미 흙먼지를 휘날리던 무리는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 * *
온몸을 괴롭히던 열은 하루 꼬박 그녀를 힘겹게 하곤 이틀째에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카리나는 3일째가 되어 서야 침대에서 나오는 것을 허락 받았다. 밀라이언이 절대 안정을 취하라며 그녀를 감시했으니까.
‘그림 그리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간신히 일어난 그녀는 주변을 휙휙 살피다 조심스럽게 책상으로 다가갔다.
필요한 물건을 책상 위에 늘어 놓고 붓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그려 뒀던 스케치를 꺼냈다.
시녀가 한 시간마다 들어오고 밀라이언이 간헐적으로 또 감시 하러 오다 보니 정말 이틀 내내 누워만 있어야 했다.
“걱정해 주는 건 좋았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아벨리아의 기분을 느낀 것만 같았다.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이마에 손을 얹는 밀라이언은 이제 버릇처럼 자신을 보면 열을 재려고 들었다.
또 그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의 냉기가 싫지 않아서 자신도 조금 즐기는 건 있었지만.
‘최근 더워졌지.’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 몸은 도리어 뜨겁게만 느껴지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뿐이 아니라 몸에 통증도 잦아졌다. 관절 사이사이가 아프다거나 불현듯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숨 쉬는 것이 버거워지기도 했다.
혹시나 밀라이언의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윈스턴의 존재였다. 그가 매일매일 몸을 살펴 주고 꾸준히 통증을 줄이는 약을 달여 주기 때문인지, 적어도 혼자일 때보단 안심이 됐다.
카리나가 제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매만지곤 옆에 올려 둔 하론을 꽉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붓을 잡았다. 순식간에 미소 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오로지 시선에는 흑백의 선만이 담겼다.
그녀가 천천히 붓에 물감을 찍어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카리나의 붓 터치는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웠다.
웃음기라곤 조금도 남지 않은 그녀의 시선 끝에는 오로지 그림 뿐이었다.
그녀의 붓 터치 몇 번에 흑백으로 죽어 있던 헤르타의 눈동자에 생기가 생겼다.
분명히 그림 속에만 존재하는 헤르타일진데, 살벌했던 살기가 고스란히 새어 나오는 듯했다.
투박한 남색의 철갑이 반짝이고 굴곡진 곳의 음영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카리나의 손길이 조급해졌다.
빨리, 조금 더 빠르게.
완성된 작품을 어서 확인하고 싶다는 듯 빠른 손길이었다.
틈 하나 없이 꼼꼼하게 빈 공간을 메운 색채를 내려다보며 카리나는 천천히 붓을 내려놨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가 황금빛 태양을 머금은 듯 반짝이며 서서히 제 색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아쿠아마린을 닮은 푸른 눈동자 속에 황금빛 물감이 풀어진 듯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서서히 아지랑이가 눈동자를 잠식하더니 이윽고 오래지 않아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카리나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쿵-!
방이 크게 울렸다.
커다란 진동을 느끼며 카리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를 찢어발길 듯 거대한 발 하나가 종이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바닥에 닿았다.
쿵-!
반대쪽 앞발이 튀어나와 또 거대한 소리로 방을 울렸다.
발 두 개가 차지한 공간이 무려 방의 2 분의 1 이었다.
“어?”
그제야 카리나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쳐졌다.
무척 먼 거리에서 헤르타의 모습을 본 덕에 실제로 이렇게 덩치가 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카리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쿵-!
뒷다리가 튀어나와 또다시 방을 크게 울렸다.
콰득-!
우지끈-
무언가 부서졌다.
방에 있는 가구가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부서졌는지 짐작은 금방 할 수 있었다.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자신이 없을 뿐이다.
거대한 몸체가 반쯤 드러나자 카리나의 표정이 점점 새하얗게 질렸다.
여기저기서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우당탕탕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이한 황금빛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담겼다.
불쏙-!
살기와 악의로 점철된 헤르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날카로운 뿔을 카리나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크르릉-!
헤르타의 코에 돋아난 날카로운 뿔이 카리나의 코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이윽고 마지막 뒷발이 종이에서 스윽 나왔다.
쿵-!
네 번째로 방이 흔들렸다.
거친 숨소리와 순수한 살기로 점철된, 생기가 빠져나간 듯한 죽은 눈이었지만 카리나는 눈앞의 헤르타가 무섭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워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려낸 생명은 그녀의 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의 친구이자 상담사가 되어 줄,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을 읽어 주는 유일한 이해자.
카리나가 힘없이 늘어진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새하얀 손끝이 조심스럽게 헤르타의 날카로운 코 뿔을 건드렸다.
크릉-!
잔인하게 사람을 도륙하기로 유명한 헤르타는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살기와는 다르게 카리나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그것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카리나를 바라봤다.
작고 연약한 생물.
헤르타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것은 지켜 줘야 할 생물이다.
자신의 힘이 필요해 저 편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을 뽑아내 자신을 창조했다.
작은 온기가 헤르타의 볼을 쓰다듬었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철갑 위를 쓰다듬기 때문인지 손길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벌컥-!
노크도 없이 다급하게 문이 열렸다.
“카리나, 저택이 몇 차례 흔들…….”
저택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에 밀라이언은 집사인 팽에게 몇 가지 명령을 하고 다급히 그녀의 안부를 살피러 달려온 참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밀라이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