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44)
>44 화>
“네?”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오자 카리나가 번쩍 고개를 젖혔다.
밀라이언의 대답을 몇 번인가 곱씹던 카리나가 이윽고 눈을 내리 깔았다.
“제 물건이 아니잖아요. 밀라이언의 물건이니까요. 남의 물건을 부쉈으면 당연히 갚아야죠.”
하지만 밀라이언은 카리나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끝나는 것 아니던가.
아직 약혼자가 아니냐며 뻔뻔하게 나와도 좋다. 어느 쪽이든 별생각 없이 넘어갔을 거다.
이 방을 호화스럽게 새로 꾸민다고 해도 솔직히 밀라이언의 재정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개미가 무는 것보다 덜 간지러울 것이다.
“그대가 갚을 필요는 없어. 일부러 한 일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그래도 카리나는 조금도 밀라이언에게 빚을 진 기분이고 싶지 않았다. 그와는 언제나 동등한 자리에서 동등하게 있고 싶었다.
그래야 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몸이 아픈 곳은 없나? 어디 어지럽거나 열이 난다거나. 오늘 겨우 일어난 것 아닌가. 도대체…….”
카리나의 말을 끊은 밀라이언이 그녀를 이곳저곳 살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열을 재고 그녀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다행히 겉보기에 상처가 있는 곳은 없다.
“대체 이런 일은 왜 한 거지? 능력은 쓰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밀라이언이.”
카리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얇고 조금은 창백한 입술이 행복하다는 듯 호선을 그리고 천천히 벌어졌다.
그 안쪽으로 흘끗 보였던 새빨간 혀를 무심코 본 밀라이언이 숨을 삼켰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젓곤 카리나의 황금빛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것은 언제까지 빛나는 걸까?
입술도 눈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밀라이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카리나가 도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움찔거리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라고 하면 화낼 건가요?”
그제야 밀라이언은 그녀가 이 헤르타라는 마수를 그려 소환한 이유를 알게 됐다.
헤르타와의 전투에서 고전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말이다.
“당연한 소리를. 그대가 참견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밀라이언이 말했다.
이번에 처음 나온 마수이다보니 약점을 알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렇다고 고양이 손까지 필요할 수준은 아니다.
밀라이언은 저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었다. 굳이 그녀가 제 몸을 제물로 삼으며 능력 따위를 쓰지 않아도!
“애초에 난 그대에게 도와 달라고 한 적 없다.”
“알아요, 그래도 밀라이언이 다치지 않았으면 했어요.”
언뜻 매정한 말에도 카리나는 포스스 웃음을 흘릴 뿐이다.
매사에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저렇게 웃는지 어딜 가든지 딱 뒤통수를 맞기 좋은 성격이었다.
“다치지 않고 빨리 토벌했으면 했어요.”
“심심하면 이렇게 픽픽 쓰러지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이곳에 오는 것으로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을 포기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건 이제 밀라이언 한정이에요.”
“……뭐?”
“그런 게 있어요.”
카리나의 눈이 반달로 접혔다.
미소를 띤 채 고개를 홱 돌려 버린 카리나를 보며 밀라이언이 기묘한 표정을 했다.
“만약, 토벌이 끝나고 제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면…….”
카리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헤어질 때 저를 한 번 꽉 끌어 안아 주지 않을래요?”
그녀가 제 옷자락을 보이지 않게 꽉 쥔 채 밀라이언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온기를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끝을 준비하는 자신이 싫으면서도 그럼에도 손끝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작은 전기 충격과도 같은 기묘한 떨림이 설랬다.
“그러니까…… 제가 이 저택을 떠나는 날에요.”
“…….”
밀라이언은 아무런 대답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곧 가루처럼 바스러져 어디로 흩어져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은 아련한 음색에선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안…… 될까요?”
너무 욕심이 많았나?
아니면 너무 뜬금없었나?
어느 쪽이든 무슨 말이든 단번에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상대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으니 곤란할 따름이다.
“……좋아.”
밀라이언의 짧은 대답에 걱정으로 물들어 있던 카리나의 얼굴이 화악 펴졌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하지 마. 난 그대의 도움이 없어도 괜찮아.”
단호한 말에 카리나가 쓴웃음이 맺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타인이라고, 그렇게 선을 긋는 것 같아 속이 상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했다.
“그대의 얼마나 남았을지도 모를 예술가의 생명을 날 위해 깎아 낼 필요는 없어.”
밀라이언이 덧붙여 말했다.
‘밀라이언이니까 그러는 건데.’
한 순간 불타오르고 사라져 버릴 그 다정함에 잠시 홀렸을 뿐인 순간의 콩깍지라고 해도 망설일 시간은 없다.
최선을 다해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껴 보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밀라이언이 싫다면 하지 않을게요.”
카리나가 순순히 대답했다.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결코 쓰지 않았을 힘이다.
앞으로 힘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쓰기로 결정했으니까.
누군가에게 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깎아 가며 타인의 생명을 살리고 싶지 않았다.
“그 전에 일단 이걸 끌어내도록 하지.”
지루한 듯 어느새 주변에 있는 물건을 코 뿔로 쿡쿡 찔러 보고 있는 헤르타를 보며 밀라이언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 길만 비워 주세요.”
카리나가 헤르타의 등을 한 차례 쓰다듬자 헤르타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한 듯 냉큼 몸을 굽혀 배를 바닥에 붙였다.
쿵-!
그 와중에 커다란 소리가 또 몇 차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몸을 낮춘 헤르타의 위로 카리나가 올라가기 위해 끙끙거렸다.
뿔을 밟고 어떻게든 올라가 보려고 했지만 체력이 떨어진 그녀로선 뿔 하나를 붙잡고 있는 것도 문제가 많았다.
그러자 당황한 헤르타가 사지를 쫙 펴며 좀 더 몸을 낮추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카리나.”
“네, 금방 올라갈게요.”
밀라이언의 말이 재촉이라고 생각한 카리나가 성마른 손길로 재촉하며 철갑 위에 난 뿔 두 개를 양 손으로 붙잡았다.
한 번쯤은 도움을 청할 법도 한데 뒤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인지, 도움을 청할 줄 모르는 것인지, 자신을 잊고 있는 것인지 모를 카리나는 뒤도 돌아봐 주지 않았다.
밀라이언이 결국 먼저 손을 뻗 었다. 그가 미끄러지는 그녀의 허리를 재빠르게 붙잡았다.
‘……저번보다 좀 더 가벼워진 것 같은데.’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혔다.
“아, 놀랐어요.”
“도와 달라고 하면 될 것을.”
밀라이언이 불만을 입에 올리며 헤르타 위에 카리나를 올려 줬다. 그러자 헤르타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카리나가 헤르타의 뿔을 끌어안으며 단단히 몸을 지탱했다.
밀라이언이 어쩐지 어정쩡하게 보이는 카리나를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가자, 헤르.”
카리나가 어딘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헤르타가 거대하고 육중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쿠웅-.
묵직한 몸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방 전체를 울리고 저택을 울렸다.
카리나의 방문은 아무리 활짝 열어도 헤르타가 나가기엔 비좁았고 당연하게도 문은 거의 뜯겨 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윽. 정말, 죄송해요. 밀라이언.”
잔뜩 몸을 움츠리고 헤르타의 뿔 사이에 납작 엎드린 카리나가 우지끈거리는 소음 사이로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밀라이언의 시선은 카리나의 뒤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그녀가 혹여나 추락하지 않을까 그의 신경은 온통 그녀의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사용인들이 전부 밖으로 나와 있어서 뭔가 했더니 이건 또 재밌는 일이군.”
달콤한 꿀을 발라 놓은 듯, 귀가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라이언의 표정이 거의 반사적으로 왈칵 찡그려졌고 헤르타는 이를 드러내며 다시 살기를 흩뿌렸다.
갑작스럽게 거칠어진 분위기에 카리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일단 잔뜩 흥분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헤르타를 달래려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카리나로선 헤르타의 덩치에 가려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당연하지만 목소리의 주인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카리나.”
“네.”
“이리와, 일단 내려오도록 해.”
밀라이언이 카리나가 있는 곳으로 양팔을 쭉 뻗었다.
명백한 어린아이 취급처럼 느껴졌지만 그의 표정도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가 헤르타의 등을 툭툭 두드리자 헤르타가 순순히 몸을 낮춘다.
그녀는 밀라이언의 품에 안겨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때에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자 시야를 가린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카리나는 상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굳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