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46)
>46 화>
그가 손을 뻗어 헤르타의 등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크르르, 위협적인 목울음 소리가 들렸다.
“역시 창조의 기적을 가지고 계시네요.”
“……창조의 기적이요?”
“세상에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저 보고 이해하면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드문 기적의 종류입니다.”
페리얼 칼로스가 정말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는 헤르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느낌의 능력이에요.”
“창조의 기적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합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창조의 기적을 가졌던 예술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가 의아한 눈을 했다.
그가 마저 설명을 이어하려는 순간 헤르타가 움직였다.
“흐억!”
“……팽?”
“가, 각하? 세상에, 이, 이게 무슨…….”
놀란 팽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밀라이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딱딱하게 얼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다.
카리나가 헤르타에게 얼른 나가라고 얘기하자 밀라이언이 팽에게 가볍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팽이 여전히 헤르타의 꽁무니에서 눈을 떼지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뒷정리를 그에게 맡긴 밀라이언이 페리얼과 카리나를 돌아봤다.
“일단 응접실로 가서 대화하도록 하지.”
그의 제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 사람이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로 향하는 내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카리나는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조용했고 곁에 있는 밀라이언과 페리얼도 굳이 그녀의 사색을 깨진 않았다.
어차피 밀라이언과 페리얼 칼로스, 두 사람은 둘이서 나눌 이야기가 따로 있었다.
“차와 커피 중에 어느 게 좋지?”
“전 차로요.”
“난 물이면 돼.”
밀라이언이 오로지 카리나를 향해 물은 질문에 쓸데없는 대답도 함께 돌아왔다.
“그래서 말씀을 계속 들을 수 있을까요?”
카리나가 묻자 페리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긴 눈썹이 살짝 내리깔렸다가 이윽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창조의 기적을 가진 예술가들은 제 목숨보다 예술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예술을요?”
“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그 힘이 자신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놓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카리나는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도리어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더 그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강했다.
‘곤란해.’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아름답다고 표현할 만한 기이한 황금색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죽어 가고 있어.’
페리얼은 카리나가 만들어 낸 생명체의 완성도와 그녀의 눈동자를 보곤 확신했다.
창조의 기적을 가진 이들은 생명을 담보로 한다. 지금껏 그것에 예외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인 모양이지.’
페리얼에겐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죽음의 냄새가.
그는 음률을 통해 생(生)과 사(死)를 관장한다. 그녀에게는 생기보다는 사기가 더 짙었다.
“창조의 기적…….”
그렇게 말하니 거창하게 들렸다.
“예술병에 관해서는 천천히 듣는 걸로 하죠, 카리나.”
페리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편지를 볼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그가 순순히 품에서 편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그가 카리나의 앞으로 편지를 천천히 밀어 주었다. 붉은 밀랍을 녹여 봉한 편지는 흠이 난 곳도 없이 무척 깨끗했다.
“먼 곳까지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오는 길이었으니 상관없습니다.”
카리나의 인사에 페리얼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밀라이언이 말없이 편지 칼을 내밀었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곤 편지 칼을 손에 쥐었다.
그녀가 편지 봉투를 뜯어 편지를 열었다. 편지를 펼치자 눈에 익은 필체가 보였다.
쿵광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카리나가 천천히 글자를 눈으로 읽어 내렸다.
무엇이 쓰여 있을까, 어떤 내용이 있을까.
칼을 들고 편지 봉투를 뜯고 편지를 꺼내 펼치는 그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막상 첫 글자를 보는 순간 떨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릿속은 차분하게 가라앉았으며 긴장은 없어졌다. 그저 글자 만이 비춰 보였다.
“…….”
주변은 적막했다.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간간히 페리얼과 밀라이언의 찻잔이 기울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뿐이었다.
페리얼과 밀라이언은 가만히 카리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뜯은 편지 봉투에서 나온 편지는 겨우 한 장이었다. 먼 길을 떠난 딸에게 보냈다고 하기에는 무척 짧은 편지다.
귀족의 관습이라는 것이 있다.
친하지 않은 상대에게 편지를 보낼 때도 귀족들은 격식을 차려 안부를 물으며 최소 두세 장을 기본으로 보냈다.
페리얼도 밀라이언도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집을 나간 딸에게 한 장의 편지라니.
편지의 장수가 애정의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야박하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바스락-
편지를 움켜쥐고 있던 카리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하얀 손 등 위에 핏줄이 돋아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이윽고 내용을 전부 읽은 카리나가 편지를 쥔 손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단순히 내렸다고 표현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마치 그녀를 연결하고 있던 실이 툭 끊긴 것처럼 보였으니까.
“…….”
편지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카리나는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괜한 기대가 실망을 낳았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판결봉으로 딱딱 내려친 기분이었다.
“……페리얼.”
“네.”
“내게 백작저에 갔던 이야기를 말해 줘요.”
카리나가 느리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생기 넘치게 반짝이던 황금빛 눈동자가 어느새 탁하게 어두워졌다.
페리얼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소식을 전해 줄 겸, 당신이 그렸던 그림을 보러 갔습니다.”
카리나는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고 페리얼을 가만히 직시했다.
“밀라이언이 전해 준 그림을 보니 완성본이 보고 싶어졌거든요.”
“네.”
카리나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편지에 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페리얼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어떤 말도 귀 기울여 듣지 않던, 자못 오만하게 보이던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는 분명 집 나간 자식을 걱정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결코 굽히지 않는 잘못된 믿음이 있었다.
페리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적나라하게 얼굴이 굳어진 것은 밀라이언 쪽이었다.
도리어 카리나는 처음과 크게 다름없는 눈빛으로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윽고 이야기가 다 끝나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늘 그런 분이셨어요.”
한참이나 말이 없던 카리나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증거까지 함께 들이밀지 않는 이상 믿지 않으시거든요.”
물론 뜬금없이 딸이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반발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그런 믿음에서 우러나는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다.
[네가 북부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대체 겁도 없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리 약혼을 한 사이라도 괜한 소문이 날 것은 생각하지 못했느냐?]따뜻한 안부로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설마 수많은 말 중에서 가문 걱정이 먼저 튀어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정신이 멍했다.
한 장짜리의 짧은 편지는 채 꽉 채워져 있지도 않았으니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했으면 될 것이 아니냐? 말도 없이 이렇게 집을 나가서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야? 아벨리아가 널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한 번도 별다른 것을 바란 적은 없다. 과한 것을 원했다고 생각 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에 누군가 얼음물을 부은 듯 차분하게 식어 갔다. 마지막 남은 것을 누군가 단칼에 잘라 낸 듯했다.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것이냐? ……어쨌든, 잠시 약혼자를 보러 갔다가 검문소가 닫혀 버렸다고 이야기해 둘 테니 말을 맞추고 이 이상 가문에 먹칠하지 말거라.]카리나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 굴러다니는 편지를 다시 주웠다.
그것을 다시 똑같이 접어 편지 봉투 안에 집어넣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닥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를 그녀가 가만히 바라봤다.
물끄러미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 보던 카리나는 소맷자락 안에서 작고 낡은 곰 얼굴 모양의 지갑을 꺼냈다.
페리얼과 밀라이언이 말없이 벽난로를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고급스럽거나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간 것도 아닌 투박한 지갑이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들고 있었을까.
[그리고 정말 가문에서 쫓겨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검문소가 열리는 즉시 돌아오도록 해!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꾸나.]그것이 전부였다. 괜찮으냐는 한마디도 없었다.
페리얼에게 뜬금없이 병이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며 되묻는 말도 없었다. 글자에서 보이는 것은 아벨리아와 가문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저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페리얼의 말을 듣고 편지의 신뢰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는 믿지 않는 거다. 레오폴드 백작은,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직접 보지 않아서?
아니, 그 사실이 정말이라면 귀찮아질 테니까.
그녀는 손에 쥔 편지와 이곳저곳이 기워진 지갑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그대로 벽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