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5)
>5 화>
“카리나! 저 위에 있던 물건, 네가 가져갔니?!”
“네? 아뇨?”
“그럼 그 물건을 왜 아벨리아가 들고 있어! 위험한 물건이라고 말했잖니!”
“제가 안 했ㅇ…….”
“언니가 돼서 도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왜 그렇게 속을 썩이니!”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아벨리아가 제 눈치를 보며 어머니의 뒤에 숨어 울먹이는 꼴이 보여서, 그걸 가져온 건 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어차피 제 목소리는 어머니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아 버렸으니까.
심장이 아팠다.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서 허공에 손을 휘젓는데, 또다시 장면이 뒤바뀌었다.
“내일은 인프릭의 졸업식이라 네 생일 파티는 며칠 뒤에 할까 하는데 괜찮으냐? 카리나?”
“네, 괜찮아요. 아버지.”
“카리나, 미안하다. 네가 주최하는 다과회가 급한 게 아니라면 조금 미뤄도 되겠니? 아벨리아가 몸이 좋지 않아서. ”
“네, 어머니.”
뒤바뀐 장면에는 더 이상 상처 받지 않는 언제나 같은 표정의 자신이 무심하게 앉아 있었다.
어느새 괜찮다는 말은 카리나의 당연한 대답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서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해하면 못된 아이가 되는 듯했다.
동생이 아프니까, 오라버니가 다쳤으니까.
자신이 그저 외로워서 같이 있어 달라고 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가 아닌가?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오라버니의 대단함에 비하면 내가 그리는 그림 따위는.’
‘나보단 어머니랑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오라버니가 더 대단해.’
‘나보단 동생이 더 아프니까 내가 양보해야 해.’
‘며칠 지나서 생일을 축하한다고 음식의 가짓수가 줄어드는 것도 선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야.’
‘나는 튼튼하니까 괜찮아.’
‘나는…… 괜찮아.’
카리나가 그리는 그림의 수는 점점 늘어 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몇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그림은 온힘을 다해 정성스레 그려야만 생명을 얻었으며,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하루까지 있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녀가 일으키는 기적의 개수도 늘어났다. 수많은 그림이 생명을 얻었다가 이옥고 사라졌다.
카리나는 아무리 불러도 제대로 돌아봐 주지 않는 가족 대신, 부르면 곧장 돌아봐주는 그림 속 생명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때때로 외로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친구가 되었고 그녀를 위로해 주는 애완동물이 되기도 했으며 슬퍼하는 부모님을 위해 종종 쌍둥이와 인프릭의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가 되어 주었다.
외로움의 크기만큼, 소녀의 생명력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점점 깎여 나갔다. 이윽고 되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 * *
“도착했습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카리나가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 짧은 사이 꾼 꿈 때문인지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누른 카리나가 표정을 갈무리 한 채 마차에서 내렸다.
돌아갈 땐 마차 정류소를 이용하면 되니 마부는 돌려보냈다. 마차에 앉아 오는 내내 눈을 감고 속을 다스리려 노력했는데 그 새 잠이 들어 그런 꿈을 꿀 줄이야.
“그냥 좀 편하게 생각하면 되는 일을.”
하루이틀도 아닌데. 그녀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러한 생각 끝에 내리는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아벨리아와 페르던은 어리고 동생이니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카리나였다.
‘의원이나 가야지.’
괜히 혼자 우울해져 봐야 소용 없었다. 어차피 울어도 아무도 달래 주지 않는다.
어린 카리나는 채 열 살도 되지 않아 그 사실을 자각했다.
“뭐야, 하루 만에 살고 싶어진 거야?”
카리나가 의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를 금세 알아본 통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다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카리나는 상냥한 가족보다 험악한 말투의 의원이 훨씬 편했다.
마음을 정한 그녀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백발이 성성한 의원은 새하얀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무척 건강하게 보였다.
“아뇨, 약이 필요해서요.”
“약? 무슨 약?”
“떠나려고요.”
그녀의 간결하고 뜬금없는 대답에 의원은 헛웃음을 터뜨리려다가 홀가분해 보이는 카리나의 눈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난 한 번도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늘 내가 아닌 무언가가 제 삶의 주인이었는데……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요.”
“그래서 떠나겠다?”
“네.”
죽을상이었던 어제보다야 낫지만 그렇다고 그 몸으로 여행을 가겠다니.
의원은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결연했고 흔들림이 없다.
“얼마나 여행을 가는데?”
“음…… 북부 끝에 있는 젠타르라고 아세요?”
의원의 눈매가 대번에 둥글게 접혔다. 순간 녹턴이 떠올라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노인의 얼굴에서 왜 갑자기 그 젊디 젊은 남자가 떠오른단 말인가.
“차라리 죽으러 간다고 말하게. 그럼 단숨에 죽는 약이라도 지어줄 테니.”
의원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꽂았다.
카리나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걸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신랄하고 직설적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말주변 없는 그녀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눈을 도르르 굴렸다.
“뭐! 죽여 달라고 온 거면 잘못 찾아왔어. 훠이, 나가!”
“아니, 그게 아니라…….”
벼 이삭을 뜯어 먹는 새를 쫓아 내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젓는 의원에 카리나는 당황했다.
“혹시 죽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두 달 정도 넉넉히 여행 기간을 잡을게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한 이틀씩 여관에서 푹 쉰다고 해도 어려울까요?”
“왜 굳이 북부야? 쉬고 싶으면 차라리 배를 타. 그편이 낫겠군.”
“음…… 의탁할 곳이 북부에 있어서요.”
“아서라 아서, 거기가 얼마나 추운지 아느냐. 두 달 뒤면 곧 겨울이 다가올 시기다.”
“으음, 겨울이 문제가 되나요? 어차피 방에만 있을 거라서…….”
의원의 시선이 불만스럽게 카리나를 향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확히 뭘 원하는 거야?”
“길 가다 쓰러져서 객사하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요.”
“언제 갈 건데?”
“일주일 뒤에요.”
“……쯧, 시간도 빡빡하구먼. 알겠네. 예술병으로 갉아 먹은 생명력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잠시 진행을 늦춰 줄 순 있지.”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약을 끊으면 약을 먹는 기간동안 악화하지 않은 만큼 더 악화할 거야. 난 약을 단 두 달분 밖에 지어 주지 않을 거고.”
“그거면 충분해요.”
카리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답을 얻은 그녀가 금화를 넉넉하게 올려 뒀다.
“무슨 돈을 이렇게 자꾸 줘?”
“두 달 치 약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겐 필요 없네!”
“그럼 감사함의 의미로 제가 드리는 걸로 할게요. 어차피 쓸데도 없어서요. 그럼 6일 뒤에 들를게요.”
카리나가 웃어 보이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대답도 듣지 않고 금화 열댓 개를 아무렇지도 않게 놓고 가는 카리나를 보며 의원이 혀를 끌끌 찼다.
“어린 게 포기가 빨라.”
그러나 그는 의원이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살리지만, 죽고자 하는 인간의 삶을 일부러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의원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슨 삶을 살았기에 죽고자 마음먹으니 저리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 것인지…….”
의원은 금화를 대충 서랍에 쓸어 넣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는 창문 밖으로 멀어져 가는 카리나를 보며 턱을 괴었다.
* * *
카리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벨리아에게 줄 꼬치구이를 몇 개 포장했다.
입이 까다로운 부모님이나 오라비는 평민들이나 먹을 것 같은 이 음식을 먹진 않겠지만, 호기심 많은 쌍둥이는 분명 즐거이 먹을 것이다.
“……꼬치나 주스 같은 거요! 먹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선하게 웃어 보이던 아벨리아가 떠올랐다.
“언니는 맨날 밖으로 나가서 좋겠다…….”
동시에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놨던 말도 떠올랐다.
아벨리아에게 큰 악의가 없다는 건 안다. 이유를 모르지만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진심으로 웃어 줄 수가 없었다.
문득 든 미안함에 카리나는 아벨리아가 먹고 싶다고 했던 과일 주스도 두 잔 샀다.
그녀는 정류소로 가서 마차 한 대를 빌렸다. 처음에는 건성이었던 마차 정류소의 마부도 목적지를 말하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카리나는 허름한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낡고 오래된 데다가 안에서 퀴퀴한 냄새도 났다.
덜컹거림은 어찌나 심한지 오래 앉아 있지도 않았는데 엉덩이와 허리가 아팠다.
백작령 내의 큰 시장이 저택과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저녁 식사 전 간식으로 적당하겠네.”
카리나가 한숨처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