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54)
>54 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곤란 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카리나가 입가를 허물어뜨리며 힘없이 웃었다.
창백한 피부와 창백한 입술, 새 하얀 손끝. 핏기 없는 손등과는 다르게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눈만큼은 언제나 환하게 빛이 났다.
“미리 말하지만…….”
“네?”
“난 밀라이언의 부탁을 받고 당신을 살려 보기 위해 왔습니다.”
페리얼이 천천히 대답하곤 입술을 일자로 꽉 다물었다. 카리나가 눈을 한 차례 깜빡이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몰아치는 파도처럼 의지를 담은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카리나가 한차례 눈을 다시 깜빡였다. 기적을 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이 순간 황금빛으로 물들어 반짝인 듯했다.
“과거의 기록에 사례가 남아 있지 않다고, 우리가 처음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아…….”
“인간은 생각하고 발전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될 것도 안 됩니다.”
페리얼의 목소리는 여전히 꿀처럼 달콤하고 사람을 녹일 듯 다정하고 상냥했지만, 흐물거리는 듯 들렸던 아까와는 다르게 단단한 심지가 들어간 듯 흔들림이 없었다.
“카리나.”
“네
“당신이 좁고 작았던 우리 문을 열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정했다면 나와 밀라이언은 기꺼이 당신이 걸어가는 길 곁을 지킬 겁니다.”
낮게 읊조려지는 목소리에 카리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더니, 페리얼 칼로스는 무척이나 밀라이언을 닮았다.
문득, 그의 얼굴 한편에서 보인 밀라이언의 심지 굳은 얼굴에 카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갈을 치워 주거나 돌부리를 걸러 주진 않겠지만……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게 손을 뻗을 거고 길을 찾는다면 함께 찾을 겁니다.”
페리얼의 말을 카리나는 조용히 경청했다.
밀라이언도 페리얼도 모두 좋은 말을 늘 아낌없이 해 준다.
“스스로 걸어 나가는 이는 아름다운 법입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공감했다. 언젠가 다친 날개를 치료해 줬던 새가 필사적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애를 쓰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남았다.
문득, 그 순간을 다시 보게 되면 감동이 사그라질까 봐, 차마 색을 칠하지 못한 그림이 떠올랐다.
“그리고 난 아름다운 걸 좋아하고요.”
“네?”
뜬금없는 페리얼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당신, 내가 봤던 그 어떤 때보다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어요.”
“아…… 네…… 감사, 합니다……?”
반짝거리던 페리얼의 뒤로 후광이 훅 비췄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전혀 감흥이 없다. 도리어 조금 놀림을 당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한없이 다정한 말이기도 했다.
“페리얼은 밀라이언을 닮았네요.”
“……그거 정말 끔찍한 모욕이군요.”
“밀라이언만큼 다정한걸요?”
덧붙인 그녀의 말에 페리얼 칼로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카리나가 그런 페리얼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햇빛이 쏟아지는 오후였다.
* * *
“……저택이 좀 어수선하군.”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레오폴드 백작이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저택 입구에서부터 시작해서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저택이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레오폴드 백작의 뒤를 쫓아 걷던 집사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낮에 조금 기묘한 일이 있었던 터라 아직 그 이야기로 떠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단단히 주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기묘한 일?”
레오폴드 백작이 집무실 문을 열며 반문했다. 집사가 다시 허리를 굽혔다.
설명하기엔 그도 차마 이해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주인이 명령하는데 감히 시종이 망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네, 일정 시간동안 저택에 있는 모두가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모두?”
“네, 저택 안에 있던 모두가…….”
“너도 말인가?”
레오폴드 백작의 지적에 집사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그사이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합해 봤을 때 어디선가 기묘한 플루트 소리가 들렸다는 것뿐이었다.
“송구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이게 무슨 실책이던가.
그는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였고 저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야 했으며, 주인의 궁금증에는 언제든지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플루트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잠들었다는 말 외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다.
“상황을 말해 보도록 해라.”
우두커니 집무실 앞 책상에 선 레오폴드 백작이 책상 위를 가만히 쳐다보며 입술만 움직였다.
집사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가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무척 기묘한 표정의 백작은 마호가니 나무로 된 책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입은 꾹 닫힌 채였으며 표정은 묘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백작이 고개를 들어 가늘어진 시선으로 집사를 바라왔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집사.”
“죄송합니다. 주변에서 플루트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론 어떤 기억도 없습니다. 설명해 드릴 게 더 없어 송구할 뿐입니다.”
불쾌감이 느껴지는 레오폴드 백작의 목소리에 집사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다시 내려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약간의 격식도 느껴지지 않는 새하얀 편지 봉투를 붙잡은 그가 그것을 앞뒤로 돌려 가며 살폈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오로지 공백만이 존재하는 새하얀 편지.
“이 편지는 자네가 내 책상에 가져다 둔 건가?”
“……아뇨,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낮게 중얼거린 레오폴드 백작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가 했을 리는 없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불명인 편지를 사전 허락도 없이 가져다 뒀을 리는 없을 테니.
“이건 언제부터 있었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집무실을 확인한 시간은?”
“플루트 소리가 들리기 직전입니다.”
레오폴드 백작의 미간에 깊은 골이 자리 잡았다.
집사의 말을 조합해 보자면 이야기는 간단했다.
누군가 일부러 어떠한 수작을 부렸다. 그리고 이 편지를 두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백작가에 악의가 있거나 적의가 있는 사람인가?’
그건 누구지?
굳이 몰래 편지만 두고 갈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아카데미에 다나는 파릇파릇한 청춘들의 연애편지가 아니고서야.
“없어진 물건이나 다친 사람 혹은 이상이 생긴 점은?”
“눈을 뜨자마자 혹시 몰라 전부 확인했으나 모두 이상이 없었습니다. 창고는 물론, 아벨리아 아가씨도 무사하셨고 사용인들도 모두 같았습니다.”
이상은 전혀 없었다. 레오폴드 백작은 다시 편지지를 뒤집었다.
상징이 될 만 한 건 없다.
하물며 밀봉조차 해 놓지 않은 편지는 도리어 성의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집사가 허리를 굽힌 채 양손을 내밀었다.
레오폴드 백작은 가볍게 편지를 흔들어 보곤 고개를 저었다.
무슨 장치가 되어 있을 리는 없다. 편지지는 가볍고 안에선 어떠한 장치의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작이 편지지를 손가락으로 휘릭 돌려 입구 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먼지라도 털어 내듯 편지지를 털어 내자 반으로 두 번 접힌 편지 한 장이 툭 책상 위로 떨어졌다.
레오폴드 백작이 그제야 손을 뻗어 천천히 편지를 붙잡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접힌 편지를 펼쳤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편지에는 아무런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도리어 웃음이 나올 정도로 간단하게 펼쳐졌다.
애초부터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오폴드 백작이 얼굴을 굳힌 채 그제야 편지를 두 손으로 붙잡아 제대로 펼쳤다.
[레오폴드 백작 각하께.]차가운 한마디로 시작한 편지의 첫 줄을 레오폴드 백작이 가만히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