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55)
>55 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도대체……’
[이렇게 시작하면, 분명 당신께서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고민하시겠지요.]수신인을 알린 후 다음 줄에 적힌 한마디에 그는 또 다른 이유로 멈칫했다.
편지에 적힌 상대가 자신을 꿰뚫고 있는 듯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실제 자신의 행동이 편지의 주인이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대체 뭐지?”
불쾌감이 섞인 의아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레오폴드 백작은 곧장 다음 줄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묻어 놨던 말도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다 의미 없어졌네요.]담담하게 읊조리기 시작한 뜬금 없는 말에 백작은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몸을 낮춰 의자에 앉았다.
집무실 의자에 앉으면서도 그는 이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전 병에 걸렸어요. 아마 다시 그 저택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겠죠. 페리얼을 통해 보내주신 편지에 대답은 이걸로 됐으리라 생각해요.]“……카리나?”
편지의 다음 줄을 읽은 레오폴드 백작의 입술에서 뜬금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집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큰 아가씨의 편지인가요?”
집사의 질문에도 백작은 대답도 없이 다음 줄로 시선을 내렸다.
카리나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카리나이든 칼로스 공작이든 둘 중 하나는 이곳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다.
‘……플루트 소리라면 칼로스 공작인가?’
그는 흔하지 않은 상아로 된 플루트를 이용해 기적이라는 것을 일으킨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서 저택 사용인을 전부 재웠음이 분명했다. 레오폴드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괴물 같은…….”
제국은 예술로 유명한 나라지만 기적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경향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경지에 다다른 이들을 신성시하곤 하지만, 나이가 있는 이들 중에 그러한 힘을 사용하는 자들을 두려워하고 기분 나쁘게 여기기도 했다.
인간이 가진 신의 힘이라니. 그토록 달콤하면서도 두려운 말이 어디에 있을까.
[이 편지는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해 주세요.]짤막한 말은 짧은 고민의 흔적도 엿보이지 않을 정도로 망설임이라곤 없이 깔끔한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저는 카리나 레오폴드가 아닌 ‘카리나’로서 유명해질 거예요. 제가 그린 그림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거예요. 그러려고 생각해요.]레오폴드 백작의 머릿속에 언제나 조용했던 카리나를 떠을렸다.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고 차가운 말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가?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애교도 없고 말수도 적지만 시키는 말은 잘 듣는 아이였다.
레오폴드 백작이 숨을 삼키며 다음 줄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아마도 이 먼 북부에서 당신께서 있는 그곳까지 내 이름이 울려 퍼지겠죠.]힘이 실린,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담담한 편지는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망설임이나 떨림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협박 당해서 적었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당신께선 늘 내게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셨죠. 무슨 행동을 해도 언제나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백작은 편지에서 거리감을 느꼈다. 마치 단단한 벽을 쌓아올려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그 애가 그럴 리가 없지.’
레오폴드 백작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럴 담력이 있는 아이가 아니다.
분명히 부모에게 사과를 듣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것이 분명 했다.
굽혀 주길 바라니 이런 편지를 적은 것이겠지. 그가 생각하며 다음 줄을 바라봤다.
[이번엔 제가 부탁할게요. 부디 앞으로 울려 퍼질 제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고스란히 돌려주는 듯한 말에 백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누군가 조곤조곤하게 저를 돌려 깐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에 그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사망 처리는 언제든 편하게 하세요.]“……뭐?”
편지 너머로 느껴지는 냉기에 레오폴드 백작의 시선이 그 줄에 멈췄다. 그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져 펴질 기미가 없었다.
황당한 눈으로 읽어 내리던 백작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저는 지금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 기분 좋은 짝사랑을 하고 있어요. 오랜 짝사랑에 기다리다 지쳤거든요. 두 분의 안에선 언제나 제 자리는 없을 테니까요.]단호했던 위의 글씨들과 다르게 그 줄만큼은 고민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글씨의 굵기가 다르고 미묘하지만 진하기가 달랐다.
[당신께서는 알고 계셨나요? 밖에는 아벨리아나 페르던이나 오라버니가 아닌, 내가 주인공인 세계도 있었어요.]위에서 그 수많은 비수 같은 말을 쏟아 낼 땐 느껴지지 않던 망설임이 이런 내용에서야 느껴지다니.
레오폴드 백작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나갔다.
“……도대체 키워 준 부모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레오폴드 백작의 거친 일갈에 집사가 더 몸을 숙이며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백작을 살폈다.
백작이 목덜미를 붙잡으며 벌겋게 물든 얼굴로 씩씩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밖에서 무슨 물이 들고 있는 거냐고!”
벌겋게 물든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보였다.
집사가 탕비실로 가 냉수를 가져와 백작의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었다.
“진정하십시오, 각하. 몸에 좋지 않습니다.”
집사가 가져온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레오폴드 백작이 그제야 심호흡을 하곤 다음 줄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몇 줄 남지 않은 편지는 다 읽으면 한층 더 혈압이 오를 것만 같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읽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거나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하지 않아도, 널 사랑해서 그렇다는 말을 방패로 삼지 않는 다정한 호통도 있었어요.]결국 다음 줄로 시선을 내린 레오폴드 백작의 표정이 다시 단단해졌다.
불만을 토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불만이 있었으면 미리 말했으면 됐을 것을……!”
이런 식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그런 기분 나쁜 능력까지 빌려 가면서, 대체 뭐 하러.
[당신께선 분명 키워 준 은혜도 모른다고 크게 화를 내시겠죠. 어쩌면 도대체 뭐가 문제였냐며, 미리 말하지 않은 저를 탓할지도 모르겠고 이상한 물이 들었다고 할지도요.]다음 줄로 시선을 내린 백작의 입이 완전히 다물어졌다.
카리나는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백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든다. 정곡이 찔렸다는 짜증과 담담한 듯한 말투가 어쩐지 속을 뒤집었다.
[제가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나요? 저는 언제나 정말 모든 일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나요? 나는 정말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울지 않는 착한 아이였나요?]줄곧 묻고 싶었던 답을 카리나는 고민 끝에 펜 끝을 적셔 새하얀 종이에 묻혔다.
그것을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는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들께 내 이야기를 하길 포기 한 거예요. 그리고 이제, 절 오랜 시간 저택에 가둬 둔 그림자를 포기하려고 해요.]그 ‘그림자’가 도대체 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 내용은 다음 줄에 나와 있었으니까.
[그러니 저를 보길 원한다면 북부 검문소가 열리면 직접 오세요. 전 내 발로 다시 거기 안 갈 겁니다.]카리나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제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참아 왔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다.
“…….”
그쯤 되어서야 레오폴드 백작의 표정이 굳고 한층 심각해졌다. 그것은 협박이나 아집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경고라도 하는 듯했다.
그녀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순종적이고 어떤 말이든 잘 듣는, 착한 아이였을 터다.
정략결혼에도 잡음이라곤 없었다. 그저 순순하게 행동했다.
[궁금해서 묻는데 당신께선 늘 내게 부족하지 않게 모든 걸 해 주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건 돈인가요? 날 키울 유모를 고용하는데 필요했던 돈, 먹고 자고 사는데 필요했던 돈.]그 물음을 보는 순간 레오폴드 백작의 시선이 멈췄다.
돈? 이렇게 차갑고 매정한 말이 다 있나.
돈이라니. 겨우 그 아이와 자신의 관계가 돈 하나로 정의될 정도로 가벼운 관계였던가.
‘돈을 돌려받으면 남는 거라니……’
입을 다문 백작이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당장 딱 떠오르는 것은 없다. 하지만 없을 리가 없지.
뭔가가 있을 것 아닌가.
자신이 부모고 그녀가 자식인 이상은.
[기억하세요. 나는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인형도, 두 분이 설계한 인생을 살아가는 당신의 두 번째 인생도 체스판 위의 체스말도 아니에요.]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편지는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