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56)
>56 화>
레오폴드 백작은 글을 끝까지 읽어 내린 후에 다시 한번 편지를 훑었다.
아버지라고도 어머니라고도 적지 않은 그 편지에는, 그저 온통 타인을 부르는 듯, ‘당신’이라는 말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건 그녀가 준 거리감이었다.
“……공작에게 카리나를 돌려보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북부는 이미 검문소를 닫았습니다. 더는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공작이 괜한 물을 들이고 있는 게 분명해. 협박을 당해서 썼을 수도 있다. 카리나는 이런 말을 할 애가 아니야.”
고개를 젓는 레오폴드 백작의 말에 집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이 저택에 가장 오래 근무 하고 있는 사용인 중의 한 명이었다.
“카리나 아가씨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병에 걸렸으니 사망 신고는 아무 때나 하고 저택으로 돌아갈 일 없으니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는군.”
편지를 던지듯 집사에게 넘긴 백작이 사납게 말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눈에 담았다. 낮게 가라앉은 백작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병이라니 대체 거짓말은! 여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무슨 병에 걸려!”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카리나는 변했다.
얼굴을 확 구긴 레오폴드 백작이 성마른 손길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사이 편지를 다 읽은 집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병에 걸리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네, 내 화를 더 돋우려는 게 아니라면 헛소리하지 말게. 녹턴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떠나기 전까지도 멀쩡한 얼굴로 식사를 한 걸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입술을 달싹이던 집사가 편지를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비슷한 보고를 받았던 기억이 있었으나 그것을 말해도 될지 아닐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 생각엔 사실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뭐?”
“몇 달 전에…… 시녀에게서 카리나 아가씨의 방에서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난다는 보고를 받았었습니다.”
집사의 말에 레오폴드 백작이 인상을 썼다.
집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집사를 보던 백작이 무겁게 닫힌 입술을 연다.
“내게 알리지 않고 뭐 했지?”
차가운 목소리에 집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도 억울한 일이긴 했다.
그는 몇 차례 보고를 올리려곤 했으나, 번번이 가로막혀 결국 나중엔 그도 잊게 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이유를 설명해.”
“보고하려고 할 때마다 공교롭게 자꾸 일이 겹쳤었습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숨을 삼킨 채 눈치를 살피는 집사의 이야기를 들은 백작이 기묘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일이라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되물음에 집사가 헛숨을 삼켰다. 그 뒤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진짜 기억을 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둘째 아가씨의 상태가 어떤지를 물으시거나 혹은 다른 일이 바쁘시다며 나중에 보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네, 큰 아가씨께선 나이도 있으니 알아서 하실 거라면서…….”
집사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백작은 여전히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집사가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입을 열었다.
“매번 그런 걸 일일이 보고하지 말라고 하셔서…….”
의아했으나 주인의 명령이었으니 집사로선 어떻게 말을 더할 순 없었다. 더는 보고하지 말라고 하는 사항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을 덧붙이는 순간 제 자리가 위태로울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사안이면……!”
입을 열던 레오폴드 백작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하긴, 자신이 보고하지 말라고 했는데 일개 집사가 어떻게 보고 할 수 있었겠는가.
“죄송합니다.”
집사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백작이 집사를 조금 노려보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최근 자꾸만 일이 흐트러지는 기분이다. 무언가가 망가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둔 건가?”
“아닙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더니 괜찮다고 하시기에…… 검진을 권유해 드렸으나 나중에 시간 날 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지 않았단 말이군.”
“…….”
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긴 했으나 사실 과연 그럴 만한 경황이 그녀에게 있었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다.
집사가 기억하는 카리나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책 한 권을 손에 들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멍한 표정으로 아벨리아의 곁에 멍하니 앉아 있었던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는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어린 카리나는 표정도 다양했고 사용인들에게도 재잘재잘 말을 걸 때가 많았다.
“아무리 서운했다고 한들, 굳이 부모 마음에 굳이 비수를 놓아야 하는건가. 대체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집사?”
주인의 물음에 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유명해져서 돈을 갚겠다니.”
백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그 돈이 얼마나 될 줄 알고 저리 가볍게 입을 여는 것인지.
아집인지, 아직 덜 자라 철이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편지를 가져와라. 밀라이언 페스텔리오 공작에게 편지를 써야 겠다.”
“편지 말입니까?”
“그래, 돌려 보내라고 해야겠어. 만약 걸린 병이 진짜라면 그곳보단 여기가 더 치료하기에도 걸맞을 테니.”
레오폴드 백작이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곤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들께 내 이야기를 하길 포기 한 거예요. 그리고 이제, 절 오랜 시간 저택에 가둬 둔 그림자를 포기하려고 해요.”
무엇을 얼마나, 어떤 이야기를 했다고 포기한다는 것인지.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투정이라고 생각하지.’
나름대로 그 아이도 서운한 게 있었으니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병에 관해서도, 만나서 물어보면 될 테고.
“죽을병이라니.”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기엔 편지에 절박함이 없었고 마지막 떠나기 전 나왔던 식사도 제법 멀쩡한 모습으로 먹지 않았던가.
‘대화를 나눠 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오폴드 백작이 한숨을 삼켰다. 어긋난 것이 있으면 다시 맞추면 될 일이다.
이미 그 조각이 완전히 망가져 다시 이어 붙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모르는 백작은 편지에 쓸 문구를 천천히 생각했다.
남부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렸다.
* * *
“오늘은 뭘 할 예정이지?”
“아…….”
“카리나는 오늘 나랑 공부할 예정이네만.”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냉큼 페리얼이 웃으며 대답을 가로챘다.
카리나가 느리게 눈동자를 굴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페리얼이 언제나처럼 반짝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게 묻지 않았다.”
“카리나에게 묻는 말도 아니었잖아?”
“그녀에게 묻는 말이었어.”
“이런, 주어가 없어서 무심코 나한테 묻는 줄 알았지 뭔가.”
능글맞은 목소리의 페리얼이 밀라이언의 말을 가볍게 쳐 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카리나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 정도로 소리내서 웃는 카리나는 무척 드문 모습이었기 때문인지 페리얼과 밀라이언이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곤 바람 빠지듯 가벼운 웃음을 흘린다.
“왜 웃지?”
그녀의 웃음이 끊기자 밀라이언이 물었다.
“그냥, 두 분은 정말 친한 친구구나 싶어서요.”
“악연이다.”
“악연입니다.”
동시에 들려온 단호하면서도 똑같은 대답에 카리나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전혀 믿는 기색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니 믿어 주겠다는 의미가 역력했다.
“정말이다만.”
“아무 말 안 했어요.”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라서.”
추운 겨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테라스에서 들어오는 햇볕만큼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카리나가 물끄러미 밀라이언을 보다가 포스스 웃음을 흘렸다.
“왜 웃지?”
“그냥, 좋아서요.”
당신이 좋아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는 이 시간이 좋아서.
차마 거기까지 말을 내뱉진 못한 카리나는 그저 웃었다.
모든 상황이 그저 행복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웃으며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그것이 제가 마음에 둔 사람이라는 사실도.
상대가 알아줬으면 하는 감정이면서도, 평생 몰랐으면 하는 감정이기도 했다. 이 찌르르 심장을 울리는 듯한 간지러운 감정은 언젠가 그를 아프게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실없기는.”
이제는 습관처럼 손을 뻗은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한차례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자연스럽게 열을 재듯 손바닥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리하지 말고 몸 상태가 안 좋으면 곧바로 말해서 돌아오도록 해.”
“네.”
걱정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에 이마를 손끝으로 훑던 카리나가 포르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한 목소리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는 모르겠지만.
식탁에 앉아 고기를 썰던 페리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상 기류를 어렵지 않게 눈치챈 탓이다.
‘곧 파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치기에 이 달콤한 기류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