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59)
>59 화>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판매할 수 없다.
“사실 이건 몇몇 작품에 한해서의 편법입니다.”
카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페리얼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말이 없을 땐 무표정한 그녀는 한 번 표정이 무너지면 무척 다양한 표정을 짓곤 했다.
“예를 들어서, 음악의 경우는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기적이 시작되지요?”
“네.”
“그런 종류는 편법을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림은 완성이 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네.”
“그 점을 노리는 겁니다. 완성 되기 직전, 붓 터치 한 번을 포기하면 그건 완성작이 아니게 되니까요.”
페리얼의 의외의 제안에 카리나가 눈을 끔뻑였다.
올곧게만 살 것 같은 남자도 저런 편법을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확실히 그렇겠네요.”
“네. 최선을 다해 그런 그림을 그려 주면, 내가 당신을 유명하게 해 줄 게요. 그러기 위한 인맥이니까요.”
페리얼의 칼로스 가문에는 유능한 인재들의 작품을 제값을 치러 그들이 유명한 예술가가 될 때까지 지원해 주는 루트가 있었다.
처음에는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에 작품을 팔게 되는 신인 예술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 루트를 이용하면 그녀의 그림을 유명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가치는 상당했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되 완성을 지양하세요.”
“……어려운 주문이네요.”
붓 터치 한 번을 하지 말고 참아야 한다니.
그런 욕망을 과연 참을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고 없고가 아니다.
스스로의 가치를 알려 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했다.
“그리고 원스턴을 불러올 테니 검사를 받고요.”
“……네.”
카리나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검사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무슨 말이 돌아올지 모르니까.
‘설마…… 시간이 줄었단 얘긴 아니겠지.’
그 뒤론 그래도 최대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참고 있으니까.
“그 목에 걸고 있는 건 뭔가요?”
“아, 밀라이언이 준 하론이라는 북부의 광석이에요.”
“으흠…….”
눈을 가늘게 뜬 페리얼이 시선 끝으로 투박한 광석을 살폈다.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다채롭게 빛나는 광석은 무척 독특했다. 그리고 확실히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종류의 광석이었다.
‘미술 재료로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다채롭게 빛나는 것이 무척 독특했다.
북부에 이런 광석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페리얼이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죠.”
“뭐가 말입니까?”
허리를 굽힌 채 하론을 보던 페리얼의 시선이 쓱 올라갔다.
“하론을 손에 쥐면 몸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착각이긴 하겠지만…… 사람 생각이 참 신기해요. 믿는 것 만으로도 신비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니까요.”
페리얼이 가늘어진 눈으로 카리나와 페리얼을 번갈아 바라봤다.
“……몸이 편해진다고요?”
“네.”
“정확히 어떤 식으로 편해지는 것 같나요?”
페리얼의 물음에 그제야 카리나가 진중해진 눈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플 때마다 그냥 반사적으로 잡은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기억이 많지는 않았다.
“음…… 심장이 조이듯 아플 때가 있는데 그 통증이 완화되거나 울렁거림이 조금 줄어든다거나…… 그 정도인 것 같아요.”
유의미한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통증이 줄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
혼자만의 착각이라도 힘이 되어 주는 뭔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카리나?”
옅은 미소를 띤 그의 말에 카리나가 순순히 목걸이를 빼 그에게 내밀었다. 페리얼이 목걸이를 받아 들며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폈다.
“특이한 돌이군요. 이렇게 봐선 별다른 건 없어 보이긴 하는데…….”
“아마 제가 그냥 그렇게 믿어서 느끼는 걸 거예요.”
페리얼이 하론을 꽉 쥐었다가 느릿하게 펼쳤다. 그의 눈이 한 차례 가늘어졌다.
“카리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걸 가져가서 한번 분석 해봐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긴 한데 제 말 때문이라면 너무 진지하게 듣지 않아도 괜찮아요.”
혼자만의 착각일 거예요.
덧붙인 카리나의 말을 들으면서도 페리얼은 그녀의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미지의 광석이니 알아 볼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윈스턴을 불러 줄 테니 일단 그에게 진단을 받아 보세요.”
“……알겠어요.”
페리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카리나를 따라 고개를 돌린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말을 타고 출발하고 있는 밀라이언의 원정대가 있었다.
페리얼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리나는 밀라이언을 정말 좋아하는군요.”
“……네?”
페리얼의 지적에 화들짝 놀란 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밀라이언에겐 비밀이에요.”
“친우에게 비밀로 해야 할 게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미안해요.”
카리나의 대답에 페리얼이 장난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맹목적인 시선은, 마치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각인한 병아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페리얼은 누군가 좋아해 본 적 있어요?”
“글쎄요.”
“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런 감정을 가져 본 건 난생처음이라 그냥 모든 게 다 좋아요.”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프던 심장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니, 이토록 신기한 감정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서운 감정도 처음이고.
“윈스턴을 부를게요.”
“네, 고마워요. 페리얼.”
무덤덤한 듯 입가에 설핏 미소만 있던 카리나의 얼굴에서 눈꼬리가 휙 휘어지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페리얼이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네.”
페리얼이 몸을 돌리고 방을 나섰다.
* * *
“기다릴게요, 다녀오세요.”
귓가에 속삭이듯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용인에게도 언제나 비슷한 인사를 받곤 했지만 유달리 그녀의 인사는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대장님,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문제 있나?”
“문제…….”
밀라이언을 호위하는 기사가 흘끗 뒤를 바라봤다.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밀라이언이 너무 빨리 달린 탓에 나머지가 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의 말이 조금 버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급한 일정은 아니니 여유롭게 움직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정오까지 돌아가는 게 목표다. 속도를 더 높이라고 해.”
밀라이언이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나누느라 늦췄던 속도를 다시 빠르게 했다.
“내일 정오 말입니까?”
기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황급히 밀라이언을 쫓았다.
느려진 속도에 한숨 돌리고 있던 토벌대가 다시 빨라지는 제 대장을 쫓아 고삐를 흔들었다.
이번 토벌대는 정예들로만 구성된 토벌대로서 척후병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척후대였다.
실제로 마수 토벌을 나서기 전에 실력 있는 기사들만 소수 모아서 마수의 동향이나 종류, 서식지 등을 탐색하고 가끔은 새로운 마수의 토벌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 후 북부의 각 영지들과 정보를 공유, 이야기를 나눠서 본격적인 토벌대를 편성하곤 한다.
척후대는 어떤 상황에든 임기응변을 발휘해서라도 대처해야 하므로 각 영지에서 뛰어난 기사들만 차줄하곤 했다.
그리고 척후대의 뒤를 따라 후발대가 한 무리 더 온다. 식사를 준비하거나 척후대의 말을 관리 하는 등 각종 편의를 봐주는 이들과 의료병이었다.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처음 말씀하셨던 일정도 휴식을 거의 줄이고 빠듯하게 한……!”
“명령 불복종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할 수 있다. 내가 직접 선두에서 지휘할 테니까.”
무뚝뚝한 말에 기사가 눈을 빛냈다.
자신감 가득한 그 목소리에 뒤따라오던 다른 기사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호위 기사가 쓰게 웃으며 결국 물러났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서른 명 남짓의 말을 탄 척후대가 빠르게 움직여 북부를 에워싼 숲 초입에 도착했다.
스산한 숲 입구는 위험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겨울에는 허락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울바람이 불어 닥치자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오오오-!
그 바람에 섞여 넓은 숲 어딘가에서 들리는 마수의 울음소리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젖혔다.
곧 토벌이 시작된다. 그 고양감이 절로 병사들의 사기를 증진시켰다.
북부는 마수의 둥지라고 불릴 정도로 겨울이 되면 위험 요소가 다분했다. 허가가 없으면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래된 구전에 의하면 원래는 마수의 영역이었던 이곳에 영웅이 태어나 마수를 몰아내고 지금 인간의 영역을 구축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왜 하필이면 모두가 움츠러드는 겨울에 마수가 눈을 뜨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었지만.
“이곳을 집합 장소로 한다. 전원 말에서 내려서 채비하도록.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후발대가 오면 바로 들어가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을 들으며 밀라이언이 말에서 내렸다.
검을 뽑아 한차례 상태를 살핀 그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나무에 기댔다.
‘헤르타를 찾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마수가 하나둘 여름잠에서 깨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소수 정예로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까지 내려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 붙으면, 그때부터 마수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여름 내내 굶주린 마수는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그 흉포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만약 토벌이 끝나고 제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면…… 헤어질 때 한 번 꽉 끌어안아 주지 않을래요?”
“안…… 될까요?”
가만히 찬바람을 맞으며 있으려니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무엇이 그렇게 긴장됐는지,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하론, 찾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