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61)
>61 화>
“자네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행복해요. 너무 행복해서, 최근엔 원래의 저였다면 절대 하지 못할 일도 벌였어요.”
“무슨 일을?”
고개를 기울인 윈스턴이 의아하게 물었다.
“가족들에게 절 키워 준 돈을 돌려주고 완전히 독립하려고요. 카리나 레오폴드가 아니라, ‘카리나’의 이름이 세상에 남도록 할 거예요.”
“키워 준 돈을 갚았다고?”
“정확히는 갚을 예정이에요. 그림으로 유명해져 볼 생각이거든요. 가족 모두가 무시했던 그림으로요.”
칭찬 한 번 받지 못했던 그림이 세상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되는지 그들에게 보여 줄 거다.
듣기 싫어도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명해질 거다.
“그러니 저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면 좋아요.”
다가올 죽음을 막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충분했다. 이 이름이 어디까지 퍼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은 내게 늘 못해 준 게 어디 있느냐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 뒤로 얼마 전까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카리나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윈스턴은 편해서 그런가, 항상 가족사를 얘기하게 된다. 그는 언제나 진지한 눈으로 들어 준다. 아무도 고민해 주지 않았던 것을 함께 고민해 주려고 한다.
그때야 깨달았다. 이것이 의지하는 것이라는 걸. 이것이 제대로 된 이야기 상대라는 것을.
누구도 제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중간에 끊지도 않으며, 눈을 마주치고 하는 것이 진짜 대화였다. 바쁘다고 매번 대화를 피하는 것도 한숨을 내쉬는 것도 아니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받은 건 의식주밖에 없는 것 같은 거예요.”
카리나가 웃었다.
“간병인 대신 형제라는 이름 아래에서 무료 노동을 해 준 거면 몰라도.”
비식거리는 웃음이 그녀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는 의외로 싸늘했다. 정에 약해서 계속해서 무르게 굴 것이라고 생각했던 윈스턴의 생각은 제대로 빗나간 것이다.
“어쩌면 두 분에게도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죠. 알게 모르게 사랑해 줬을지도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카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흥미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였다. 예전에 보였던 미련이라곤 보이지도 않는다.
“근데 밀라이언과 대화를 나누고 페리얼과 윈스턴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카리나가 나직히 말했다.
“세 사람이 나를 걱정하는 건 잘 알겠어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려가 느껴지거든요.”
카리나는 그만큼 예민했다.
예민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처음 만난 이들에게도 하루 만에 느꼈던 다정함 혹은 배려 등을.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걸 만난 지 하루 된 윈스턴이나 밀라이언에게 느꼈다는 걸 생각하니 더는 의미가 없더라고요.”
카리나의 시선은 이미 굳건했다. 뿌리가 내린 식물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이제 와서 사과를 받아도 사라진 제 시간이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요.”
바람에 휘둘렸던 가지가 드디어 땅에 뿌리를 박았다. 언젠가 또 봉오리를 만들고 꽃을 피울 테지. 윈스턴은 그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냥 저도 잊으려고요. 잊고 버리려고 해요.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어요.”
담담한 눈빛은 이미 과거를 보고 있지 않았다.
“태어나게 해 준 것을 걸고넘어 진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낳아준 것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카리나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토록 아팠던 이야기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아까웠다.
남은 시간 동안 버킷 리스트에 적을 목록을 얼마나 완벽하게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시간 안에 그 아쉬운 것들을 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과거에 발목을 잡히고 싶진 않다.
“오랜 시간 품어서 배 아파 낳은 것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그것이 제 인생을 저당 잡을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윈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층 안도한 표정을 한 카리나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모는 자식의 주인이 아니잖아요.”
“그래, 아가씨의 말이 맞네. 부모는 자식의 주인이 될 순 없지.”
그의 말에 카리나가 눈꼬리를 휘어 부드럽게 웃었다.
잔뜩 긴장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녀를 보던 윈스턴이 제 허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부모는 길잡이야. 자식의 손을 잡고 이끌어 줄 수는 있어도 아이는 언젠가는 그 손을 놓고 떠나가기 마련이지.”
아이는 떠난다.
뒤뚱뒤뚱 걷던 아이에게 발맞춰 걸어 주고 있던 부모는 언젠가 아이에게 뒤처지고 마는 것이다.
부모는 늙고 아이는 건장한 청년이 되어 가니까.
아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모는 결국 뒤처지고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성장을 뒤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어떤 부모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혼자 걷기 시작한 아이는 이제 돌아갈 필요가 없어.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으니까.”
혼자가 된 아이는 새로운 가족을 찾아 떠난다.
그 사이 부모는 늙고 아이는 이제 온전히 혼자 힘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다시 돌아와 늙은 부모의 손을 다시 잡아 준다면 그건 그들이 아이에게 좋은 부모였기 때문이라네.”
“…….”
“아이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하지 못했다면 그 부모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
윈스턴의 말에 카리나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은 없다. 그러니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있는 이 상황은 어쩌면 조금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혼자 우뚝 서서 당당히 걸어가는 아이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잔잔한 울림이 파도가 되었다.
카리나는 그저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귀에 담으며 주먹을 쥐었다.
“아쉽게도 그런 부모가 많지 못하다는 것이 서글플 뿐이야.”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런 부모를, 적어도 그녀에 한해서는 그런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 카리나가 입을 다문 채 느리게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밀라이언이 보고 싶어요.”
“이른 봄이 왔구먼.”
윈스턴이 그녀의 어깨를 살살 두드렸다. 이제야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밤은 아직도 멀었다는 듯이.
* * *
“거리를 벌려서 뒤쪽을 잡아라!”
“으아악! 이런 얘긴 없었잖슴까!”
채앵-!
챙-!
콰드득-!
검날이 부딪치며 사방이 번쩍였다.
달려드는 헤르타로 인해 성인 남자 셋이 둘러싸도 충분할 정도의 나무가 반쯤 으깨져 위태롭게 서 있었다.
“대장! 쉬지 않고 몰려듭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며 헤르타의 흔적을 쫓고 있을 때였다. 한 마리를 발견한 순간 놈이 비명처럼 울음소리를 내지르더니, 이윽고 5분도 되지 않아 헤르타에게 둘러싸였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달려온 헤르타들은 척후대를 둘러싸고 퇴로를 차단했다. 지능이 없는 마수의 짓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무리를 부를 줄이야.
“…….”
밀라이언이 대답 없이 눈앞에서 콧김을 훅훅 내뽐는 헤르타를 향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몇 걸음 사이를 좁힌 그의 검이 헤르타의 높게 치켜든 발과 발톱 사이를 노리며 내질러졌다.
뒤늦게 눈치첸 헤르타가 몸을 빼려 뒷걸음질을 쳤으나 밀라이언이 훨씬 빨랐다.
그의 안광이 번쩍 빛나더니 이내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헤르타의 발톱 밑에 칼을 꽂아 넣었다.
크와아아아악-!
비명과도 같은 위협적인 울음소리에도 밀라이언은 놈의 샛노란 눈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밀라이언이 짐승처럼 이를 드러 냈다. 균형을 잃은 헤르타가 공격당한 발을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한 채 세 발로 서서 형형한 눈빛으로 밀라이언을 노려봤다.
“와, 저게 효과가 있긴 하구나.”
“다들 봤으면 제대로 임해라.”
서릿발 같은 그의 목소리가 예리한 칼날처럼 날을 세운 채 뱉어졌다.
밀라이언의 경고 아닌 경고에 기사들이 다시 검을 바로잡았다.
밀라이언이 그대로 놈의 다른쪽 발의 발톱 밑을 찔렀다.
끼야아이아악-!
쿵-!
아까보다 더 끔찍한 비명을 지르던 헤르타가 옆으로 넘어졌다. 비명에 다른 헤르타들의 샛노란 시선이 곧장 밀라이언에게 돌아 갔다.
밀라이언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이제야 좀 마수 새끼의 비명 같군.”
낮게 중얼거린 밀라이언의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것인지 제 발을 핥으며 낑낑거리던 헤르타가 샛노란 눈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 봤다.
밀라이언이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눈깔아, 주제도 모르는 마수 따위가.”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헤르타의 피를 뒤집어쓴 채 밀라이언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붉은 안광이 그가 지나간 자리에 잔상처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