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62)
>62 화>
밀라이언의 검이 엎어진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헤르타의 드러난 철갑 밑 목덜미를 향했다.
단단하게 철갑으로 둘러싸인 모든 곳과 다르게 헤르타의 배 아래는 검이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부드러워 보였다.
문제는 그 약점을 지키기 위해 헤르타들의 방어가 상당하다는 거였다.
그 틈을 만들지 못해서 여태 골머리를 썩었는데, 설마 발톱으로 공격하기 위해 발을 힘껏 들었을 때 그 발과 발톱 사이의 틈을 노릴 수 있을 줄이야.
‘카리나에게 얘기를 듣곤 반신반의했는데……’
확실히 발을 들었을 때는 철옹성 같은 놈도 방어할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동료 의식이 있는 건가?’
밀라이언이 발을 쿵쿵 구르기 시작한 헤르타들의 분노를 느끼며 생각했다.
놈들이 화가 났다. 이유는 아마도 그가 헤르타 하나를 죽였기 때문에.
“우습군.”
피 냄새에 밀라이언의 눈이 한층 풀렸다.
오랜만의 피 냄새다. 오랜만의 전장이었다. 곧 시작될 토벌을 위한 식전 운동으론 완벽했다.
이를 드러내며 웃은 그가 곧장 방향을 틀어 다른 헤르타에게 달려들었다.
크와아아앙-!
울음소리와 동시에 헤르타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상대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을 뒤로 한 채 그들이 일제히 밀라이언을 향해 콧김을 훅훅 내뿜었다.
까드득, 까드득 땅을 긁어 대는 철갑 소리가 거슬릴 정도다.
밀라이언이 아랑곳하지 않고 눈 앞에서 공격하기 위해 날카롭게 발톱을 세운 채 발을 드는 헤르타의 발톱 밑을 노련하게 찔렀다.
끼에에에엑-!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른 헤르타 가 또다시 엎어졌다. 아까보단 훨씬 작은 크기의 헤르타였다.
밀라이언이 뒤집어진 놈의 목덜미를 찌르려는 순간 옆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살기에 황급히 몸을 틀어 검끝을 아래로 향했다.
까드드득-
코뿔소처럼 날카로운 철갑 재질의 뿔과 밀라이언의 검이 맞부딪쳤다. 빠른 속도로 달려든 놈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밀라이언의 몸이 상당히 밀렸다.
색소 옅은 노란색 눈동자.
닮고 달아 색이 빠진 남색 철갑, 철갑 위에 자리 잡은 몇몇 개의 깊은 자상의 흉터까지.
다른 헤르타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크기의 헤르타의 눈은 날카로웠고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살의와 살의와 살의 뿐. 순수한 악의가 밀라이언의 등줄기를 섬찟하게 했다.
“……네놈이 대장이군.”
콰드득-
밀라이언을 힘으로 밀어붙이며 나무 기둥으로 몰아붙인 헤르타가 크르르, 낮게 울었다.
크와아앙-!
다른 헤르타에 비해 짧은 울음이었지만 그 크기는 우레와 같았다.
밀라이언이 이를 악문 채 집채 만 한 몸으로 밀어붙이는 헤르타의 공격을 다리로 버텨 냈다.
대장 헤르타의 울음 때문인지 순식간에 몰려든 헤르타가 다쳐서 바닥을 뒹구는 어린 헤르타를 뿔로 일으켜 세워 절뚝거리는 녀석을 보호하며 숲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친, 쫓아가겠슴다!”
“헨리! 멈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론이 앳된 기사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도망가는 헤르타 대여섯 마리를 쫓아가려던 헨리가 가로막힌 길에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가 뒤를 돌아 헤르타와 대치하고 있는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밀라이언과 대치하고 있던 헤르타가 낮게 울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형형한 시선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공격을 감행할 눈이었다.
밀라이언이 검을 아래로 내리며 고민했다. 이대로 놈을 베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놈은 강했고 밀라이언은 다른 기사들을 지키며 놈과 싸울 자신이 없었다.
크왕-!
대장으로 보이는 헤르타가 한 차례 짧게 울자 순식간에 남아 있던 열댓 마리의 헤르타가 몸을 돌렸다.
마치 봐주겠다는 듯 혹은 다음을 기약하듯이.
형형한 눈빛은 끝까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던 헤르타와 밀라이언 중에 먼저 눈을 뗀 것은 헤르타였다.
헤르타 무리가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개 같군.”
피가 덕지덕지 묻은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흩뜨리며, 밀라이언이 거칠게 언성을 높였다.
건진 건 결국 헤르타 시체 한마리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제론이 달려와 말했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어서 그런지 정신없이 예전에 부르던대로 밀 라이언을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쫓아갔으면 그놈은 죽일 수 있었을 거 아님까, 마지막 그 놈. 아깝게.”
“쫓아갔으면 개죽음을 당했을거다.”
밀라이언이 낮게 말했다.
밀라이언과 몇몇 기사들의 실력이라면 능력껏 도망을 갔겠지만 특출난 능력을 갖춘 기사들 안에서도 헤르타를 상대하기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상대하기엔 수적으로도 단순한 힘으로도 불리했다.
“젠장!”
짜증스럽게 횡으로 그은 밀라이언의 검이 곁에 있는 나무를 베었다.
헤르타의 공격에 반쯤 꺾여 있던 나무가 쿵 소리를 내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헤르타가 이번 토벌의 관건이겠군.”
“네, 저 정도로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놈이 대체 몇 마리나 있을지.”
밀라이언이 머리를 짚었다. 헤르타의 수가 저것뿐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병사 여러 명을 맞먹을 텐데 압도적으로 수가 부족했다.
“근데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네요.”
“놓아준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밀라이언이 자연스럽게 품 안에서 궐련을 꺼내 입술에 물었다.
제론이 다가와 그의 궐련에 불을 붙인다. 화르륵 타오르다 순식간에 잦아든 불길을 보며 밀라이언이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 정도의 지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밀라이언이 눈을 감은 채 자신을 몰아붙이던 헤르타를 떠올렸다.
그 눈은 포기한 눈이 아니다. 어떻게든 제 목을 물어뜯으러 올 눈이었다.
“이번 토벌은 평탄할 것 같지가 않군.”
영주들과의 모임을 조금 더 앞당겨야 할 듯했다.
밀라이언의 입술 사이로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형형하게 빛나던 밀라이언의 눈이 살짝 풀어졌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온 걸까요?”
“글쎄, 겨울의 끝에서부터 여기까지 밀려났다는 가정도 있을 수 있지.”
대장인 헤르타는 상당히 나이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여태 토벌하면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 정도의 수를 단 한 마리도 목격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겨울의 끝은…… 설마요. 그 동굴은 막힌 채입니다.”
“할 일이 많겠어.”
겨울의 끝.
마수들이 들어오는 통로라고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지만 북부의 다양한 설화에 전해져 온다.
북부 끝에는 거대한 산맥이 있고 그 산맥엔 유일하게 동굴처럼 생긴 통로가 하나 있는데, 그곳은 영원한 겨울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
밀라이언 역시 가 본 적이 있지만 그곳은 정말 인간이 차마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절벽과도 같은 산맥이었다.
단단하게 막힌 그 뒤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아니면 땅속에서 솟아났나 보지.”
궐련 한 대를 전부 피운 밀라이언이 그것을 바닥에 던졌다.
발끝으로 비벼 끈 그가 배를 뒤집은 채 혀를 빼고 죽어 있는 헤르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에 그게 있을까?”
“그게 뭡니까?”
“하론.”
“열어 보지 않으면 모르겠습니다. 열어 볼까요?”
“그래.”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론이 곧장 거대한 헤르타의 배 위로 올라탔다.
검을 획 돌려 검끝을 아래로 향한 그가 그대로 배를 찔러 넣었다.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살덩어리를 써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타 한 마리를 잡은 것도 큰 수확이긴 했다. 다른 약한 부위가 있는지 알아볼 수도 있을 테니.
“아, 있습니다!”
“있나? 크기는?”
“음, 주먹만 합니다. 그리 크진 않네요.”
헤르타의 심장 부근에 박혀 있던 하론을 뽑아내며 말했다. 말이 주먹만 하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었다.
“닦아서 챙겨 둬.”
“알겠습니다.”
제론이 의아한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하론을 감싸는 것을 보며 밀라이언이 몸을 돌렸다.
“근데 대장님, 원래 하론 안 가져가잖슴까?”
“줄 사람이 있다.”
“누구…… 아! 그분이시구나? 최근에 오셨다는 몸 약한 예비 마님!”
밀라이언이 헨리를 힐끗 쳐다보곤 몸을 돌렸다.
오늘은 이 이상 수색을 하는 건 무리였다. 뭣보다 피 냄새를 맡고 마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니.
“돌아간다.”
밀라이언이 집합 장소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진 것 같은 느낌이 짙었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