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63)
>63 화>
* * *
“흡……!”
곤히 잠을 자던 카리나가 몸을 둥글게 웅크리며 번뜩 눈을 떴다. 심장을 조이는 통증에 순식간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허억……!”
카리나가 시트를 힘껏 그러쥐었다. 새하얀 손등이 한층 더 핏기 없이 질리고 카리나의 신음이 점점 커졌다.
밤에 약을 먹고 잤는데 벌어진 일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하고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녀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꽉 악문 잇새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여지없이 흘러나왔다.
“흐윽…….”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러고 있으면 언젠가 괜찮아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누군가 시커먼 구덩이로 밀어 넣어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괜찮…… 괜찮아…….”
잇새로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고 했었다. 단순히, 언제나처럼 찾아오는 발작이었다.
“아직…….”
버털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밤이 지나면 밀라이언이 돌아올 거다. 곁에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흣…….”
목걸이도 페리얼이 분석하겠다고 가져가서 손에 없다.
위안이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애꿎은 손은 갈 곳 없이 시트 위를 맴돌았다.
시트에 주름이 짙어질수록 카리나의 손은 점점 더 새하얗게 변해 갔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카리나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물기에 젖은 그녀의 시선이 협탁 위에 하나 가져다 둔 붓에 향했다.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으나 그녀는 마치 기갈에 허덕이는 난민과도 같은 눈빛으로 붓에 시선을 고정했다.
광기를 닮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곤 이윽고 붓을 쥐었다.
“그림을…….”
카리나의 짙푸른 눈동자가 살짝 탁해졌다.
“그려야…… 그리고 싶은…….”
어눌한 말이 기묘하게 들렸다.
다른 손으론 심장을 부여잡은 채, 또 다른 손으론 붓을 쥐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면서도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저택의 맨 꼭대기, 이제는 카리나의 작업실이 된 공간이었다.
카리나는 통증에 일그러진 얼굴로 힘겹게 화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남아 있는 유화의 냄새가 확 풍겼다.
그 냄새를 맡자마자 통증이 줄어들었다. 카리나가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댔다. 그녀는 붓을 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줬다.
“아…….”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끔찍한 통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사그라든 후였다.
그림을 그리면 통증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갉아 먹히겠지.
“창조자들이 단명한 이유는 기적을 너무 많이 일으켜서 많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페리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문득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눈앞에 달콤한 과실이 있는데 그것을 손에 쥐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리라는 거지?”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가 달빛에 비춰 유혹하듯 보였다. 그녀가 천천히 캔버스로 다가갔다.
독한 유화 냄새가 이토록 달게 느껴질 수가 있다니.
머릿속에는 딱 한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감을 짠 카리나가 천천히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이 가루를 뿌리듯 카리나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달빛 앞의 캔버스는 시야를 확보하기엔 충분했다. 카리나는 캔버스 두개를 붙여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카리나는 쉼 없이 손을 움직였다. 캔버스 위에 붓을 움직이면 색이 생겨났다.
그것을 수십 번 반복해서 칠하니 이윽고 형태가 나타났고 수백 수천 번 반복하자 윤곽이 잡혔다.
밖은 초겨울에 창문이 살짝 열 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턱을 타고 땀이 또르르 흘렀다.
탁.
그녀가 이윽고 붓을 내려놨다.
거대한 헤르타 한 마리가 캔버스 두 개를 이어 붙인 백지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눈을 번뜩이는, 위험이 그득해 보이는 마수였다.
“……왜 이걸 그리고 싶었지?”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머릿속에 온통 사라진 헤르타의 모습만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리긴 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려야만 할 것 같아서 그렸으니까.
‘아프지 않아.’
심장에 통증이 전혀 없었다.
카리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천천히 내쉬었다. 호흡이 불편하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다.
다만 캔버스가 빛나기 시작하면서 카리나의 짙푸른 눈동자가 황금빛 아지랑이에 잡아먹혔다.
순식간에 기묘한 황금색 눈동자가 되었다.
금수의 것보다 더 생생하고 반짝거리는 눈이었다.
쿵-
헤르타가 천천히 캔버스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낮에 봤던 것보다도 훨썬 더 거대하고 훨씬 더 기운이 셌다. 카리나가 이마를 짚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어지러워.’
누군가가 영혼을 일부분을 빨아들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휘청이는 카리나를 빠져나온 헤르타의 뿔이 받쳤다. 그것은 일전에 카리나가 만들어 냈던 헤르타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화실이 넓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붕을 반쯤 부수고도 남았을 크기였다.
“……어떻게 내보내지.”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내보내면 좋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쿵-
고민하는 사이, 헤르타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콰득, 그에게 밟힌 캔버스가 형체도 없이 일그러졌다. 커도 너무 크다.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멀리서부터 들리는 경종 소리에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깥에선 기사들의 움직임 소리 가 들렸고 저택 이곳저곳의 불이 켜졌다.
적막해야 할 새벽녘이 시끄러워졌다.
헤르타의 코 뿔을 붙잡고 있으려니 한층 어지럼증이 가셨다. 카리나가 그제야 제 발로 몸을 세웠다.
마주한 헤르타의 생기 없는 눈동자가 정확히 카리나에게 꽂혔다.
“무슨 일 있는 걸까?”
카리나가 헤르타의 얼굴을 팔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크릉-
낮게 운 헤르타가 카리나를 뿔로 들어 올려 등에 태우더니 그대로 테라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웅-
육중한 몸이 생각보다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나 바닥의 떨림을 막을 순 없었다. 헤르타의 발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작은 지진이 일었다.
“잠……!”
그녀가 무슨 소리도 더 지르기 전에 헤르타가 그대로 다시 한번 크게 도약했다.
육중한 몸과는 정반대로 날아오르듯 도약한 헤르타는 공작저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어디를 가는……!”
묻기도 전에 헤르타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번쩍이며 흘러 들어왔다.
헤르타의 등에 타 울퉁불퉁하게 난 등껍질 중 하나를 끌어안은 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해서 그래?”
그녀를 태운 헤르타는 지금 성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수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쌓아 둔 성문으로. 그녀가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했기 때문에.
“……다 좋은데, 널 보면 놀랄 거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 줄 수 있어?”
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얼굴 부근에 열심히 속삭였더니 헤르타가 낮게 울며 방향을 크게 틀었다.
의외로 헤르타는 운동신경이 좋은 것인지 몸이 가벼운 것인지, 움직임이 날렵하고 육중한 느낌이 덜했다.
‘원래 헤르타도 이런 느낌인가?’
헤르타의 무게가 적게 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녀석의 착지는 어쩐지 조용했고 작은 지진과도 같은 진동이 일긴 했지만 주변을 부수거나 파괴하진 않는다.
“이렇게 높이 점프할 수 있구나.”
헤르타가 성벽 앞에서 다시 도약했다.
한 번에 오르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헤르타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한 차례 성벽에 발을 꽂더니 그대로 한 번 더 도약했다.
“허업……!”
숨을 크게 들이켠 카리나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낮췄다.
헤르타가 성벽 위에 발톱을 세운 채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몸체가 성벽 한쪽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콰앙-! 쾅-! 콰득-!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카리나가 눈을 한 차례 끔뻑였다. 그녀가 탄 헤르타는 움직이고 있지도 않은데 성벽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녀가 헤르타에 매달린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작은 산등성이 같은 헤르타의 등 사이에서 몸을 살짝 비틀어 목을 쭉 내민 카리나의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헤르타?”
어둠에 잘 보이진 않지만 드문 드문 달빛에 반짝이는 등껍질이나 코 뿔 등이 보였다.
땡땡땡-! 땡땡땡-!
경종이 쉼 없이 울리고 여기저 기서 횃불이 밝혀졌다. 자다 깬 기사들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헤르타는 머리가 좋은지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가 진 곳에 한껏 몸을 낮춘 채 있었다.
“마수다! 마수가 나타났어!”
“헤르타야!”
“젠장, 지금은 웬만한 기사들이 다 사전 토벌에 동원됐다고!”
“성벽이 부서질 것 같아!”
“무슨 힘이……!”
어둑어둑했던 영지가 순식간에 횃불로 가득 찼다.
영지민들도 하나둘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 생각보다 큰 소란이 되는 모양이다.
“헤르타, 재들 왜 저렇게 화가 났어?”
콧김을 흑흑 내뿜으며 성벽을 공격하는 헤르타들의 성난 느낌이 아프게 느껴졌다.
살기와 악의가 가득했다. 카리나의 물음을 들은 헤르타가 고개를 젓는다.
“다들 진정하도록.”
낮은 목소리에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낮지만 무척 힘 있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