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67)
>67 화>
“…….”
어깨너머로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페리얼이 카리나와 밀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나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페리얼이 눈을 반으로 접으며 상냥하게 웃었다.
“나중에 봐요, 카리나.”
뒤로 닿는 그 인사에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이언의 시선이 잠시 페리얼과 카리나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페리얼과 제법 친해졌군.”
“아, 그래 보여요?”
카리나가 설핏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딘가 부끄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한 그 작은 행동에 밀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술렁였다.
“페리얼과 친구를 하기로 했어요.”
“친구?”
“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 무척 기뻐요. 물론, 친구끼리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렇군.”
밀라이언의 짤막한 대답에 카리나가 입을 닫았다. 그가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굳이 밀라이언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대, 자꾸 무리를 하는 이유를 물어도 되나?”
“네?”
“내가 예술병이나 예술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저런 거대한 것을 만들어 내려면 꽤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어.”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방문을 열며 말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카리나가 꼬물꼬물 일어나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는 것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굳이 저렇게 거대한 것을 그린 이유가 뭐지?”
진지한 눈이 그녀를 향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올곧고 또렷하고 맑은 눈이었다.
아파서 그랬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장이 아파서,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그는 분명 이해하지 못할 거다.
혹여 이해한다고 해도……
“저도 모르겠어요.”
카리나는 설핏 웃으며 또다시 익숙한 거짓말을 입에 올렸다.
“그냥 자다가 일어났는데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 거예요.”
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밀라이언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헤르타를 그냥 없앴던 게 아쉬웠나 봐요.”
흔한 거짓말이었다.
아쉬움은 없었다. 그녀라고 스스로의 목숨을 줄이는 행위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저런 거대한 것을 그리면 그 반동은 오래지 않아 찾아온다.
‘……또 언제 찾아올는지.’
벌써 그 시간이 두려웠다.
충동을 이겨냈다면 분명 조금 나았겠지만……
심장이 조여 들고 숨이 멎어 가는 그 고통을 참을 용기가 없었다. 그 통증이 쉽게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 더욱더.
“최대한 하지 않을게요.”
“그대의 예술병이 뭔지, 아직도 내게 말해 줄 마음은 없는 거지?”
그의 물음에 카리나가 쓰게 웃었다.
말해 줄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말을 해 줬을 거다. 말할 수 없는 것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은 무척 쓸쓸했다.
“싫어요, 밀라이언은 알게 되면 어쩐지 깨질 것 같은 유리구슬 대하듯 절 대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녀가 애써 퉁명스럽게 입을 연다.
주제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밀라이언은 입을 닫았다.
“그렇게까진 아니야.”
“밀라이언은 상냥하니까 그럴걸요.”
“상냥함으로 따지면 페리얼 칼로스가 더하지 않나?”
뜬금없이 나온 페리얼의 이름에 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라이언이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낭패감 짙은 표정을 했다.
“페리얼의 상냥함과 밀라이언의 상냥함은 좀 다르죠.”
“달라?”
“페리얼은 누구에게나 다정해요. 아마, 필요하면 언제나 다정하지 않을까요? 사람을 상대하는 게 무척 익숙한 사람이니까, 상대가 원하는 말도 어렵지 않게 눈치채거든요.”
그녀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머릿속에 페리얼 칼로스를 그렸다.
뭘 해도 능숙한 사람이다. 그는 무엇을 하든 어디에서든 분명히 상대를 휘어잡을 수 있을 거다.
“아마, 페리얼은…… 어딜 가든 누구와 있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중심에 설 수 있는 사람일 거예요.”
“입만 살긴 했지.”
페리얼의 사교성을 밀라이언이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 박한 평가에도 카리나는 무엇이 좋은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밀라이언은 자신의 재미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가서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페리얼처럼 누군가의 입 안의 혀처럼 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했고 아닌 것을 따를 마음은 없다.
페리얼은 그런 밀라이언을 보고 거센 바람이 불면 부러질 나무라고 했다. 가끔은 억새처럼 휘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러나 밀라이언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거센 바람이 분다면 그만큼 더 굳건하게 서 있으면 되는 일이다. 더 깊이 뿌리를 박고 더 거대한 고목처럼 단단해지면 될 일이었다.
“근데 밀라이언은 좀 달라요.”
“어떻게?”
“으음. 요령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눈치를 살살 보던 카리나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밀라이언이 하고 있던 팔짱을 풀며 입을 벌리자 그녀가 푸스스 입가를 무너뜨렸다.
“……뭐?”
“어디에 가도 페리얼처럼 쉽게 중심에 설 순 없을 것 같아요.”
“평이 박하군 그래.”
헤실헤실 웃음을 흘린 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밀라이언이 말 없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반드시 중심에 설 거예요. 함께하다 보면 머지않아 모두가 당신의 좋은 점을 알게 될 테니까요.”
“내 좋은 점?”
“험한 말투는 상대를 걱정하기 때문이고 위험한 일엔 직접 뛰어 들고 중요한 곳에선 사람을 내치지 못해요.”
뜬금없이 찾아온 자신을 결국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카리나가 다시 밀라이언을 바라보며 설핏 웃었다.
“쉬도록 해.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몸을 아끼는 걸 추천해. 아프지 말고.”
“걱정해 주는 거예요?”
“그래, 걱정 돼. 그대가 건강했으면 좋겠어.”
밀라이언의 말에 어색하게나마 웃으려던 카리나가 표정을 굳혔다.
욱신-.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켠 채 숨을 멈췄다.
카리나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구어졌다.
통증이, 심장에 통증이 일었다. 이것이 무엇의 대가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카리나?”
“쉴…… 쉴게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밀라이언도 얼른 가서 쉬세요. 오늘 아침에 막 돌아왔잖아요. 그…… 처리할…… 흡…….”
빠르게 말을 잇던 그녀가 황급히 제 심장을 부여잡았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숨길 수 없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절망에 물들었다.
“……카리나!”
밀라이언이 황급히 심장을 부여 잡고 몸을 웅크린 그녀를 살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물론 깨문 아랫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진 채였다.
“그 예술병 때문인가? 의원과 페리얼을 불러을 테니……!”
“전, 괜찮…… 괜찮아요.”
카리나가 손을 뻗어 밀라이언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으로도 심장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 거다.
이 통증은 페리얼에게 얘기해도 윈스턴에게 얘기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오롯이 그녀가 버려 내야 하는 고통이었다.
“미련하게 굴지 말고!”
“정말 괜…… 흑…….”
밀라이언의 손을 붙잡고 있던 카리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툭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다급히 붙잡은 밀라이언의 눈이 떨렸다.
“카리나.”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카리나가 결국 고집을 꺾었다.
순순히 물러나는 그를 보며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 검으로 심장을 쑤시는 기분이었다. 뺏다가 다시 쑤시고 또다시 검을 빼길 반복하는 그 과정에 있었다. 그것이 그저 수없이 반복된다.
언젠가 멎을 때까지.
숨이 멎고 다시 트이고 또 트이면 트인 대로 고통스러워서 가끔은 영원히 이대로 숨이 멎었으면 할 때도 있었다.
차라리 이런 고통을 끊임없이 겪을 거라면 이대로 멎게 해 달라고 바랄 때도 있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카리나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마디를 내뱉을 힘이 없었다.
사실은 가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는 분명 제가 아파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밀라이언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익숙하다는 듯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침대 시트를 꽉 쥔 그녀를 쳐다봤다.
한두 번 이런 통증을 겪은 것이 아니라는 듯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눈빛에선 체념의 기색이 엿보였다.
심장 한쪽이 지끈거렸다. 이유 모를 감각에 그는 몸서리를 쳐야 했다.
마치 발밑이 뻥 뚫려서 끝도 없는 무저갱으로 빨려 드는 것 같은 소름이 끼치는 감각이다.
“젠장!”
밖으로 나가려던 밀라이언이 결국 발걸음을 돌려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어린아이를 안 듯 그녀의 허벅지를 받쳐서 한 손으로 든 그가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