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7)
>7 화>
매서운 눈매가 굳기까지 하니 한층 더 무섭게 보였다.
백작 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눈으로 카리나를 바라봤다.
“아벨리아에겐 괜한 짓을 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저도 피곤하니 저녁 식사는 거르고 쉬려고요.”
축객령이 분명한 카리나의 말에 망설이던 백작 부부와 페르던은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방을 나갔다.
굳은 표정이었던 카리나가 방문이 닫히자마자 표정을 무너뜨리곤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나쁘지 않아…….’
꾹꾹 참아 왔던 말을 드디어 내뱉은 것뿐이다.
단지 그뿐인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벨리아는 괜찮겠지.’
아벨리아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음식을 게워 내거나 탈수 증상이 오는 건 그녀가 최근 자주 겪고 있는 증상이었다.
겪어 봤으니 알 수 있다.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애써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손등에 핏기가 가시도록 시트를 꽉 쥐었다.
그녀는 저런 표정을 한 레오폴드 백작을 처음 봤다.
그런 표정을 한 레오폴드 백작에게 그런 대답을 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카리나가 베개에 머리를 퍽퍽 박았다.
그럼에도 쉽게 잠이 들지 못한 그녀는 오랜 시간 침대 위에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 벌떡 일어났다.
결국 그녀는 성마른 손길로 종이와 연필, 물감을 꺼내 창문 밑 달빛이 가장 환하게 비추는 공간에 도구를 늘어놓고 주저앉았다.
* * *
도화지를 바닥에 펼친 카리나가 익숙하게 연필을 쥐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선을 그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흔적을 남기듯 흑색의 선이 길을 만든다.
카리나는 제 답답함을 오로지 도화지 위에 풀어냈다.
그녀는 오랜 시간 하고 싶은 말을 속에 눌러 담고 그것을 도화지 위에 쏟아 내는 것을 배웠다.
흑색의 선은 순식간에 그녀가 바라보는 창문이 되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수많은 별이 도화지 속 창문 위에 뿌려지고 그 사이에 고개를 빼꼼 내민 달이 자리 잡았다.
코끝에 닿는 밤바람의 차가운 공기. 밤에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풀 냄새.
하늘을 메운 쪽빛 사이로 듬성 듬성 흐릿하게 보이는 구름까지 그녀는 도화지에 담아냈다.
연필 한 자루로 그렸다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다채로웠다.
그저 흑색의 선이 나열해 있는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꿇어앉은 다리가 저린 것도 모르고 땀까지 흘러가며 카리나는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참 만에 긴 숨을 내뱉으며 연필을 내려놨다.
도화지에는 창문 아래에 앉아 올려다보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다만 현실과 다른 것은 창틀에 앉아 있는 작은 요정 한 마리였다.
나비를 닮은 날개를 가진 요정이 새침하게 눈을 뜬 채 창틀에 걸터앉아 창문 아래에 있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나는 물감 몇 개를 팔레트에 짜 가볍게 색을 칠했다.
정적으로 보였던 흑백의 세계에 순식간에 반짝이는 별과 밤하늘이 스며들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과 그 뒤를 빛내듯 반짝이는 별 사이에 있는 요정은 아름다웠다.
붓과 팔레트를 내려놓은 카리나가 지친 듯 긴 숨을 뱉었다.
고개를 떨군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금색으로 물들어갔다.
동시에 종이가 옅은 금빛을 뿜으며 요정이 도화지 속에서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요정이 생긋 웃으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카리나는 자신을 향해 뻗어 오 는 작은 손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온기가 볼에 닿았다.
옅은 쪽빛의 요정이 종이 밖으로 나와 눈을 반달로 접어 웃으며 남은 한쪽 손도 카리나의 반대쪽 볼에 댔다.
“……안녕, 요정님.”
눈동자 가득 황금빛 눈으로 흐리게 웃으며 카리나가 인사를 건넸다.
요정은 말을 하진 못했지만 소리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염원을 담아, 오로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요정은 그런 카리나의 볼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방긋 웃는 얼굴로 쓰다듬었다.
카리나는 요정에게 매달리듯 요정을 손에 꼭 쥔 채 하염없이 그 쓰다듬을 받았다.
제 몸을 이렇게 만든 것이 이 능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이 답답하고 죽을 것 같아서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림은 그녀의 삶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카리나에게 그림은 마치 마약과도 같았다. 제 몸을 망가뜨리는 원인이니 끊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감정을 털어 낼 곳이 없어서 결국 다시 손을 대게 되는 마약과도 같은 것.
손에서 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설령 이것이 제 삶을 갉아먹는다고 하더라도.
도화지에는 요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밤하늘을 담은 풍경만이 가득했다.
카리나는 한참이나 요정을 품에 끌어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윽고 힘을 잃은 요정이 금색의 빛무리에 휩싸여 다시 모습을 감출 때까지.
* * *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달려 와 준 녹턴 덕에 아벨리아는 금세 건강을 되찾았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아벨리아와 페르던이 함께 카리나를 찾아와 사과를 건넸다.
두 아이의 잘못은 아니었기에 카리나는 그 사과를 순순히 받아 줬다.
사실 조금 더 진심을 섞자면, 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내일이야.’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녀가 계획한 준비는 착착 실행이 돼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카리나는 침대 밑에 숨겨 둔 허름한 천 가방을 끄집어냈다. 안에는 갈아입을 옷 한 벌과 필요한 것들로 가득했다.
오늘 아침 일찍 의원에게 다녀왔더니 의원은 잔소리와 함께 주먹만 한 통 두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한 통에 한 달씩. 24시간에 한 알씩 꼭 먹어야 해, 알겠어? 하루에 5시간 이상 절대 걷지 말고 빈속에 먹는 것도 피해.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입고 가고.”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예술병을 만든 그 예술은 뭔가?”
“……그림이요. 뭔가를 보고 그리는 걸 좋아해요. 비록 아무도 모르지만요.”
카리나는 약을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적은 메모도 받았다. 까먹지 말라며 세심하게 써 준 의원의 글씨는 상당히 악필이었다.
오늘은 이 레오폴드 백작저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 그녀는 난생처음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발을 내디딘다.
그 때문에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미루던 저녁 만찬에는 참석하기로 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침대 밑에 가방을 밀어 넣고 곧장 아래층으로 향했다.
“어머, 아가씨! 오늘은 식당에서 식사하시는 건가요?”
“응.”
“다행이에요.”
맑게 웃은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식당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막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에는 웬만하면 참석하려고 하는 인프릭도 있었다.
그녀는 지정석인 인프릭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왔구나. 기분은 좀 풀린 거냐?”
“네.”
카리나가 대답하고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식사가 시작됐다.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카리나는 대각선 방향의 아벨리아 앞에 놓인 소화가 편한 종류의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의 앞에는 먹기 편한 음식 이라고 해 봐야 고작 샐러드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틀 뒤가 카리나, 네 생일이구나.”
“……네,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카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생일이었다. 그녀는 생일을 온전하게 보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벨리아가 아플 때도 있었고 인프릭의 졸업식이나 입단식이 있을 때도 있었다.
겹쳐도 하필이면 어떻게 그렇게 겹치는지, 심지어 카리나의 생일 전날 페르던의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제 날짜에 제대로 생일을 축하 받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카리나도 제 생일에 무심해졌다. 기대하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오랜 시간 노력 했다.
“이틀 뒤에 가족 다 같이 피크닉을 갈까 하는데, 인프릭이 그 때 휴가를 낼 수 있다고 해서 말이다. 네 생일 파티는 하루 이틀 정도 미뤄도 되겠느냐?”
“…….”
그리고 오늘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참석도 하지 못할 생일이지만 그렇다고 카리나가 제 생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너도 함께 가서 즐겁게 놀자꾸나. 네 생일겸 피크닉이라고 생각해 주렴. 파티는 잘 준비해주마.”
“피크닉에 전 참석 못할 것 같아요. 일이 있거든요.”
안 그래도 깨작거리던 카리나가 포크를 내려놨다.
“가족 행사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급한 것이냐?”
“네, 죄송해요. 저 빼고 즐기고 오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마쳤으니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인프릭이 몸을 돌리는 카리나를 보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둘 다 쉬거라.”
레오폴드 백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가 가족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그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쩐지 뒤가 꺼림칙한 기분에 레오폴드 백작이 미간을 좁혔지만 두 아이는 벌써 식당을 나선 후였다.
식당을 나온 카리나가 곧장 계단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카리나.”
뒤따라 나온 인프릭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