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70)
>70 화>
심지어 무슨 내용의 대화를 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판매 루트가 어떠니, 풍경화도 좋고 인물화도 좋다느니, 색감은 어떻다느니. 떠드는 말들이 파리처럼 귓가를 윙윙 맴돈다.
“최고의 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페리얼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움찔.
밀라이언의 손끝이 뚝 멈췄다.
페리얼이 뚫어져라 카리나의 옆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밀라이언을 힐끗 바라보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페리얼의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카리나의 볼에 살짝 닿았다.
그가 느릿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겼다.
쾅-!
밀라이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칠게 밀려난 소파에 장신구 하나가 부딪혀 크게 흔들렸다.
“밀라이언?”
페리얼의 입가가 비뚜름해졌다.
“왜 그래요? 뭐가 있어요?”
“아.”
밀라이언이 그제야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앉아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지만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페리얼은 밀라이언의 모습을 진심으로 영상구에 찍어 소장하고 싶었다.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살던 남자가 말 한마디 못하고 변명 거리를 찾고 있는 꼴이라니.
“그…….”
“그?”
“……벌레가 있었다.”
생각해 낸 변명이 어찌나 없어 보이는지.
밀라이언은 제 입 안을 세게 깨물며 제 멍청함을 탓했다.
“핫…….”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몸을 돌린 채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크게 새어 나오진 않지만 명백히 그녀는 웃고 있었다.
“……뭐가 웃겨?”
“큽, 아니…… 흡. 죄송……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키득거리는 소리가 사라지질 않는다.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려 버린 그녀가 제 입을 가리곤 크게 숨을 삼켰다.
“밀라이언도 무서워하는 게 있었군요.”
“……나도 사람이다.”
“지랄.”
밀라이언의 우스운 대답에 페리얼이 작은 목소리로 비꽜다.
다행히 카리나는 듣지 못한 듯 했다.
그녀가 푸스스 입가를 허물어뜨리며 밀라이언을 다정하게 바라봤다.
“어쩔 수 없네요. 벌레는 제가 잡아 드릴게요.”
“……그대가?”
“네.”
“그대는 벌레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당연하죠. 벌레 같은 건 무섭지 않아요. 저는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걸 알고 있거든요.”
밀라이언이 손을 뻗어 카리나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눈을 접으며 포르르 웃는 그 얼굴을 보며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페리얼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고정됐다. 숨을 멈춘 듯, 눈조 차 깜빡이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침부터 계속 화실에 있는 것 같던데, 식사는 했나?”
“으흠…….”
카리나가 대답 없이 또 웃는다.
그녀의 대답을 알아들은 밀라이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정오인 건 알고 있나?”
“벌써요?”
“그래.”
가늘어진 밀라이언의 시선을 카리나가 슬쩍슬쩍 피했다.
생각해 보니 이제야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하다. 밀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라도 하러 가지.”
“아, 식사 안 하셨어요?”
“아침은 했어. 점심을 안 했을 뿐.”
“아…….”
카리나가 배시시 웃는 것을 본 밀라이언이 멍하니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볼을 감쌌다. 밀라이언이 엄지로 볼을 한차례 쓰다듬었다.
“……밀, 라이언?”
카리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제야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든 밀라이언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황급히 그녀의 볼에서 손을 떼어 냈다.
“물감이, 묻어 있어서…….”
“아…… 그랬어요……?”
벌겋게 물든 얼굴로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이언이 표정에 드러난 당황함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제 입을 가렸다.
카리나가 볼을 긁적였다.
“아직도 묻어 있어요?”
“……아니, 없어.”
밀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물감은 묻어 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서 유화 특유의 냄새가 체향처럼 퍼졌을 뿐이다.
어쩐지 아랫배가 뻐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그럼, 시, 식사하러 갈까요?”
한껏 을라간 그녀의 목소리가 끝에서 살짝 삐끗했다.
당황한 듯 입을 가린 채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보던 밀라이언의 입가가 절로 풀어졌다.
‘뭐가 이렇게 귀엽지?’
병아리가 삐악거리는 것 같다.
앵앵거리는 소리는 싫어하는 쪽에 속할 텐데,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도리어……’
밀라이언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왔다.
그의 시선이 살짝 떨고 있는 그녀의 색 옅은 입술에 멈췄다. 조금 궁금해졌다.
저 입술에 입을 맞추면 무슨 맛이 날지, 원래는 역하기만 할 유화 냄새가 이렇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속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미쳤군.’
밀라이언이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미친거다. 아픈 사름을 상대로 대체 무슨 생각을.
뭣보다 그녀와 자신은 파혼을 목적으로 잠시간 동거하고 있을 뿐이었다.
‘끝이라……’
그녀는 미련 없이 떠난다고 했었다.
약속한 때가 되면 떠날 테니 몇 달만 있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제게 밝은 얼굴로 파혼 서류를 내밀었다.
생각하자 불쾌해졌다.
서류를 받을 땐 큰 짐 하나를 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무언가 내키지 않았다.
‘애초에 파혼 서류를 왜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준 거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민 서류였다. 생각하니 떨떠름하다.
밀라이언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카리나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슬쩍 옆으로 피한다.
‘……계속 보고 있었던 건가?’
밀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항상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면 언제나 눈이 마주쳤던 것 같다.
밀라이언의 입이 벌어졌다.
“친구들, 식사는 언제쯤 하러 갈 건가? 기다리다 지치겠어.”
한참이나 기다리던 페리얼이 결국 눈앞의 상황을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그제야 카리나가 낮게 탄성을 흘렸다.
“그러게요, 식사는 어디서 할까요?”
“식당…… 아니, 오랜만에 밖에서 할까? 영지에 제법 좋은 식당들이 많아.”
“정말요?”
밀라이언의 충동적인 발언에 페리얼의 입이 떡 벌어지고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기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밀라이언이 뿌듯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옷을 따뜻하게 입고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
“약속할게요!”
“그럼 준비하고 내려오도록 해. ”
“준비요?”
되묻는 카리나의 목소리에 밀라이언이 웃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 했다.
“물감 묻힌 작업복을 입은 채 나갈 순 없잖나.”
“아…….”
카리나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밀라이언이 웃음을 삼키며 마저 입을 열었다.
“기다릴 테니까 다녀와.”
“네!”
카리나는 황급히 대답하곤 냉큼 몸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보며 밀라이언이 참았던 웃음을 낮게 흘렸다. 들썩이는 어깨가 그의 유쾌함을 절로 보여 줬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기쁨의 삐악삐악 춤을 추다가 쪼르르 도망가는 것처럼 귀여웠다.
당황한 듯 제자리에서 짧은 다리로 도도도도 원을 그리며 도는 병아리를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네, 미쳤나?”
상상을 깨부수는 불법 침입자의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순식간에 감정이라곤 배제한 싸늘한 표정을 보며 페리얼이 헛웃음을 삼켰다.
“뭐가 말이지?”
“얼굴 말이네, 얼굴!”
“내 얼굴이 왜?”
전혀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밀라이언을 페리얼이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괜한 시치미가 아니라, 그는 정말로 제 얼굴이 어땠는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