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75)
>75 화>
“……뭐?”
“밀라이언이 옆에 있으면 어쩐지 안심이 돼요. 밀라이언이 옆에 없어도, 밀라이언의 저택에만 있어도…… 안전할 것 같아요.”
이토록 단단한 곳을, 카리나는 알지 못한다.
밀라이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 줄 것만 같았다.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어쩐지 구하러 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밀라이언은 귀찮겠지만요.”
카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휘어진 눈꼬리라든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술이라든가, 그 어느 곳에도 유감이나 그늘이 보이진 않았다.
“왜…….”
“네?”
“왜 내가 그대를 귀찮아할 거라고 생각해?”
밀라이언은 묻고도 참 모순이라고 했다.
그녀에게 대놓고 귀찮다고 말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녀는 그것을 아직도 까먹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
처음에는 분명히 귀찮았다.
원래는 지금까지도 귀찮았어야 옳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싫다.
북부에서 태어나 북부의 자유분방함과 거친 삶을 배운 밀라이언으로선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싫었다.
특히 그것이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 생각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페리얼은 귀찮았고 귀족들의 다양한 요청은 보는 것 만으로도 질렸다.
멋도 모르고 북부에 들어오고 싶다고 요청하는 이들의 문서를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다.
그중에 예외가 있다면 그녀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녀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곁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워졌다.
단 한 번도 나서서 누군가를 챙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먼 곳에 사는 악연에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고 이번에 나오는 하론은 전부 공작저 소유라고 못까지 박았다.
그 대신 평소보다 보수를 더 올려 주긴 했지만 그조차도 아깝지 않았다.
매일매일 괜찮은지 살펴보러 올 정도고 훈련을 하다가도 생각이 나면 화실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장담하건대 그것은 단 한 번도 그가 겪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냥, 귀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밀라이언이랑 저는 성향이 너무 다르잖아요.”
하나는 앉아서 온종일 그림이나 그리고 한 명은 또 온종일 밖에서 몸을 움직인다.
전혀 다른 성향인 것은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누가 봐도 제가 밀라이언한테 폐를 끼치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귀찮지 않으면 당연히 거짓말이죠.”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해서 멋대로 그의 일상에 파고들었다.
밀라이언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밀라이언 본인이 책임감이 넘치는 데다가 마침 북부도 닫히는 시기였으니까.
“귀찮지 않아.”
그가 귀찮아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고 있던 카리나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는 귀찮지 않아. 그러니 얼마든지 날 귀찮게 해.”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주길 바랐고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상담해 주길 바랐다.
묻지 않으면 꽁꽁 숨긴 채 말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상처였다.
“난 그대가 싫지 않아.”
밀라이언의 커다란 손이 카리나의 볼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닿아 오는 온기에 그녀가 느리게 눈을 감고 반사적으로 손에 볼을 비볐다.
이제는 익숙해진 서로의 행동에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대는 내가 싫나?”
참 재밌는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포스스 허물어진 입가로 애써 웃음을 삼킨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그가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밀라이언을 싫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는 유일하게 제게 마지막까지 떠올리고 싶은 사람이 되겠지.
“모레 연회가 있는 건 알지?”
“네, 오늘 밖이 조금 시끄러웠던 이유가 있구나.”
“일찍 도착한 이들이 있으니까. 그들은 뒤쪽에 있는 별택에 자리를 마련해 줬어. 아마 쉽게 마주치진 않을 거야.”
밀라이언의 설명에 그녀가 고개 를 끄덕였다.
그가 빙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밀어진 손을 보던 카리나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밀라이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대는 이 손이 뭔 줄 알고 묻지도 않고 붙잡아?”
“밀라이언의 손이잖아요.”
“…….”
이 맹목적인 믿음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쩐지 아랫배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밀라이언이 애써 생각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아주 가끔, 맹목적으로 자신을 믿는 그녀의 믿음을 배신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이렇게 순수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볼 때면 더욱더. 밀라이언이 심호흡을 했다.
“아까 말한 호수에 가지.”
“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챙겨 가도록 해. 그림을 그릴 거면 미술 도구도 좋고.”
밀라이언의 파격적인 제안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화실 한번을 둘러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왜? 괜찮아. 마차에 실으면 된다.”
“음, 오늘은 그냥 밀라이언이랑 둘이 가고 싶어요. 스케치는 수첩에 해도 되고…….”
“괜찮겠나?”
“네, 아름다우면 두 번째 갔을 때요. 그때 가지고 가도 될까요?”
만약 두 번째가 있다는 전제 하의 얘기가 되겠지만. 카리나가 밀라이언을 올곧게 바라봤다.
어느새 황금빛이 사라진 눈동자는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만큼이나 새파랬다.
밀라이언은 빠져 버릴 듯한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가볍게 주억였다.
“그래, 언제든지.”
대답을 들은 카리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엇이 그렇게 좋으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밝은 표정이었다.
“준비하고 내려갈게요.”
“그래, 따뜻하게 입는 거 잊지 말도록 해.”
“노력할게요.”
그녀가 냉큼 대답했다.
재빠른 그녀의 대답에 미심쩍은 눈을 한 밀라이언이 카리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녀를 제 방으로 들여보낸 밀라이언이 말없이 한참이나 닫힌 그녀의 방문을 바라봤다.
* * *
“앗…….”
카리나는 말 위에 앉은 밀라이언의 양팔 사이에 자리 잡았다.
말이 달릴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찌푸렸다. 메마른 모래가 공중에 날아와 눈에 들어 왔다.
“괜찮아?”
“네, 모래가 좀.”
카리나가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문질렀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자 다행히 생리적으로 나온 눈물과 함께 모래가 빠져나간 듯 따끔함이 없어졌다.
“겨울이 엄청 다가왔네요.”
“춥지?”
“네, 호수가 아직 얼진 않았겠죠?”
꽁꽁 얼었다면, 물론 그것도 장관이긴 하겠지만 그녀는 아직 물결이 찰랑거리는 호수를 보고 싶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엔 생명체를 찾아보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울 것이다.
“그 호수는 얼지 않아.”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지 않는 물이 어디에 있는가.
그나마 흔히 바다는 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나마도 북부 끝의 바다는 얼기도 한다고 들었다.
“얼지 않는 물이 있어요? 바닷물과 같은 건가요?”
“북부의 바다는 얼기도 해. 하지만 그 호수는 얼지 않지.”
밀라이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사실을 숨기며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장난꾸러기의 표정이다.
카리나가 뚱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허리를 굽혀 귓가에 대고 쿡쿡 낮게 웃었다.
“내가 말해 주는 것보단 직접 가서 보는 게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거야.”
“……궁금한데.”
“그대는 큰 감동을 느낄수록 더 아름다운 작품을 그리던데. 난 그대의 작품을 위해 입을 다물겠어.”
후하디 후한 그의 평가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했다.
페리얼의 말을 매번 들을 때도 그렇지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참 신기한 기분이었다.
남들은 칭찬을 받으면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기뻐하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부끄럽고 온몸이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 감동을 그렇게 표정과 말로 표현할 자신이 그녀에겐 없었다.
심지어 가끔은 칭찬을 받으면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기쁘면서 도 불편한감정이라니, 아이러니 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마수들이 대부분 눈을 떴을 시기야.”
“마수는 왜 봄이나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활동하는 걸까요?”
“글쎄, 이곳은 북부니까 그들에겐 봄, 여름, 가을보단 겨울이 더 활동하기에 편한 시기일 수도 있지.”
카리나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인 밀라이언이 묵묵히 대답해 줬다.
사실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단지, 북부는 애초부터 추웠고 이곳에서 서식하는 마수들도 날씨가 따뜻할 때보다는 추울 때가 더 활동하기 편한 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지.
“신기하네요.”
“북부엔 마수와 연관된 신기한 일화가 많아.”
“신기한 일화요?”
“그래, 그중에 가장 유명한 일화는 ‘겨울의 끝’이라고 불리는 ‘겨울 산맥’에 대한 일화야.”
밀라이언의 이야기에 고개만 빼꼼 내민 카리나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