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76)
>76 화>
그녀가 냉큼 고개를 뒤로 돌려 밀라이언을 향했다.
그래 봐야 목이 180도로 돌아가지 않아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겨울의 끝이 뭐예요?”
“북부에도 마지막 지점이 있어. 바다가 어는 지점보다도 더 깊은 곳을 가면 거대한 산맥이 하나 똬리를 틀고 있지.”
그 너머로 가 본 사람은 없고 그 끝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그 산맥의 입구는 어딘지 모를 정도로 꽁꽁 감춰져 있고 절벽은 인간이 오르기엔 아주 큰 무리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어딘가에 입구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아. 어디까지나 상상일 수도 있겠지.”
카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볼을 붉히자 밀라이언이 낮게 웃었다.
새하얀 얼굴의 코와 볼이 벌겋게 물든 것이 안쓰러우면서도 자꾸 시선이 갔다.
“전해지는 구전은 많아.”
“어떤 종류의 구전이에요?”
“겨울의 끝은 세상 만물이 차별 없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낙원이라는 이야기부터 온갖 진귀한 약초가 있다거나 신이 살고 있다거나 멸종된 드래곤이 있다거나 혹은 마수와 악마들의 영역이라거나…….”
“와……, 정말 극과 극이네요.”
“그렇지.”
구전이라는 것은 대개 그렇듯 과장에 과장을 더하는 법이다.
밀라이언도 어렸을 때부터 겨울의 끝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예전에는 그것을 동경했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곳이 있으면 아름다울 것 같아요.”
놀랍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카리나를 보며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자신이 했던 생각을 말하진 않았다. 그녀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온통 절벽이야. 입구도 없는 무성한 산이라서 실체는 아무도 모르지.”
“네, 그리고 다른 얘기는 없어요?”
“글쎄. 이건 떠도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겨울의 끝……, 겨울 산맥 어딘가에는 동굴처럼 생긴 통로가 있다고 해.”
카리나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밀라이언이 웃음을 삼켰다. 도대체가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모른다.
정말 그대로 입술을 훔쳐서……
‘……’
생각하던 밀라이언이 주먹을 쥐고 제 뺨을 때렸다.
짝도 아니고 퍽 소리가 나는 것에 놀란 카리나가 놀란 눈을 한 채 고개를 홱 돌렸다.
“미, 밀라이언?”
“음?”
“괜찮아요? 방금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밀라이언의 표정은 여상했다.
마치 소리 따위는 듣지도 못했다는 듯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이다.
‘방금 뭐가 퍽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꿈이라고 하기엔 소리가 너무 생경했다. 그것도 바로 뒤에서 들린 커다란 소리였다. 도르르르 눈동자를 굴려 봐도 딱히 이상은 없다.
“무슨 일 없었어요?”
“말이 뭘 밟았나 보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몰랐어.”
“아, 그래요?”
말이 뭘 밟았다고 하기엔 아래가 아니라 뒤에서 들린 것 같긴 하지만…….
밀라이언 본인이 멀쩡해 보이고 못 봤다고 하니 더 캐물을 수도 없다.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앞을 향했다.
“어쨌든 겨울의 끝이라니 너무 좋은 이름이네요.”
“신기해?”
“네, 겨울의 끝은 봄이잖아요. 그 너머엔 봄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느새 편하게 제 품에 몸을 기대어 오는 카리나를 애써 모른 척하며 밀라이언이 놀란 표정을 했다.
겨울의 끝, 북부인에게 그것은 좋지 못한 의미로 쓰였다.
겨울마저 끝나 버린다면 세상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황폐한 대지나 얼어붙은 공기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끝났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했다.
영원한 죽음.
그래서 북부에서 그 단어는 잘 쓰지도 않았고 좋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설마 그것을…… 저런 발상으로 생각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지. 겨울이 끝나면 분명 봄이 오지.”
“맞아요. 겨울은 다음 해를 위해 대지가 한번 쉬어 가는 시간일 거예요.”
카리나의 말에 밀라이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군.’
당연하겠지만, 북부에도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
남부처럼 눈에 도드라질 정도의 푸릇푸릇함으로 영지가 뒤덮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린 눈이 녹고 얼어붙은 땅이 녹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땅속에서 싹이 움튼다.
“그대의 눈으로 세상을 한번쯤 보고 싶어.”
삭막하기 짝이 없는 겨울이, 다시 돌아올 봄을 위해 쉬어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남부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이 정도의 추위를 겪는 것은 처음일텐데도 그녀에게 겨울의 끝은 그런 의미였다.
“제 눈으로요? 재미없을 거예요.”
“재미는 없어도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해.”
“…….”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숨을 멈춘 채 쓰게 웃었다.
그는 늘 다정한 말을 해 준다.
언제나 다정한 말을 해 줘서 가끔은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카리나는 밀라이언의 말에 대답 하지 않았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맞다. 다행히 그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춥지는 않나?”
“괜찮아요, 풍경이 아름다워서 느껴지지도 않아요.”
불만 한 번 내뱉지 않는 강인한 그녀를 아쉽다고 표현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삭막하기만 한 겨울의 풍경의 어디가 아름다운지 그에게는 확연히 와닿지 않았으니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다른 건가?’
그에겐 공기도 풍경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눈에 익어 새삼스럽지 않은 것들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아름답다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거의 다 왔다.”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로 둘러싸인 숲 안으로 조금 들어가자 주변이 뻥 뚫린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확 눈에 들어온 풍경에 카리나의 시선이 멈췄다. 숲 너머에 존재하는 넓은 호수였다.
그의 말대로 그곳의 호숫가는 얼지 않았다.
‘조금 따뜻하네.’
나무가 바람을 막아 주어서 그런 것인지, 추위가 조금 덜했다.
방금까지 두툼한 숄에 로브까지 두른 상태에서도 추웠던 것에 비하면 몸이 녹을 정도였다.
밀라이언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가 그를 따라 내리려다 상당한 높이에 내리길 포기했다. 밀라이언이 그녀를 덥석 들어 땅에 내려 줬다.
인형처럼 덜렁 들렸다가 내려지는 감각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 하질 않다. 마치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물을 만져 봐.”
밀라이언이 웃으며 권유했다.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몸을 웅크려 앉아 호수 속에 손을 담갔다.
“아, 차가워!”
얼음장 같은 물에 그녀가 황급히 손을 빼 로브 속으로 냉큼 집어 넣었다.
겨울의 물은 차갑기 그지없다. 순간 손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엄청 차가운데……?’
바깥 공기보다 더 차가운 느낌이다. 마치 얼음 속에 손을 집어 넣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밀라이언을 바라보자 어느새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린 밀라이언이 그녀를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밀라이언……?”
그가 냉큼 카리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저번에는 왕자가 공주를 안듯이 안아 올리더니 이번에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듯이 허벅지를 받쳐 안아 든다.
찰박, 찰박-.
“지금 뭐하는 거예요?!”
카리나를 안아 든 밀라이언이 그대로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지만 그녀는 호수가 얼마나 얼음장처럼 차가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밀라이언, 나가요. 얼른.”
” 괜찮아.”
“괜찮긴요, 엄청 차가웠어요. 동상에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밀라이언이 튼튼한 건 알지만…….”
촤악, 촤악-
말라이언의 걸음을 따라 밀려나는 물이 귀를 자극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얼음을 발로 가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카리나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밀라이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밀라이언!”
언성을 높인 카리나에 밀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귀가 조금 아플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그제야 밀라이언이 걸음을 멈췄다.
“제발, 나가자고요.”
카리나의 투정이라고 생각했던 밀라이언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깜짝 놀라게 해 주기 위한 장난이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카리나?”
“진짜 동상이라도 걸리면…….”
아픈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어떤 아픔이든, 누군가 아픈 것은 싫다.
자신은 매일 밤 숨을 죽인 채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도 끔찍했는데, 이 남자는 스스로 왜 고통 속에 발을 들이미는 것인가.
밀라이언이 낮게 한숨을 쉬곤 한 팔로 그녀를 지탱한 채 다른 손으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새하얗게 질렸는지 얼굴이 차가울 정도다.
그가 카리나의 원피스 자락을 손에 쥐곤 작게 웃었다.
“옷을 좀 위로 올려 묶어 봐.”
“네?”
“날 믿고 어서.”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옷자락을 무릎 위쪽으로 묶었다.
그녀의 떨리는 손을 보며 밀라이언이 입가에서 웃음을 없앴다.
“놀라지 마.”
밀라이언이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카리나를 호수 위에 내려놨다. 카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밀라이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낮은 호수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