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8)
>8 화>
장담하건대 그녀는 정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그냥 몸을 돌려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인프릭은 그녀의 마음을 그나마 이해해 주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비록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왜?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이번에 일이 있어서 아버지께 한소리 들었다고 들었는데, 괜찮니?”
“응, 그 건은 사과했어.”
“아벨리아가 자주 아파서 근심이 많으신가 봐. 네가 이해하렴.”
인프릭의 말에 카리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해했다. 이해했으니 지금까지 참고 사과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가.
“알고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그래. 사실, 뭐든 이해하라고 하면 화가 나긴 하지. 생일도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해도 돼.”
“말하면 뭐해, 그래 봐야…….”
아무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아직도 철이 덜 들었냐는 타박만 돌아올 테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물론 오늘 그런 말을 실제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카리나는 돌아올 말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두려웠다.
그것이 제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를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는 건 오라버니와 동생들이야. 건강하고 특출한 재능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내가 아니라.”
“카리나.”
인프릭의 타박하는 듯한 부름에 카리나가 이마를 짚었다.
마지막 식사 자리였다. 좋은 기억 하나라도 남기고 가자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역시 한마디 말 정도는 하고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전부 산산조각이 났다.
“오라버니, 나 머리 아파. 다음에 얘기하자.”
“피크닉 같이 가자.”
“싫어. 안 가.”
인프릭의 제안에 카리나가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 봤다. 벌꿀이 흘러내리는 듯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
동화 속 왕자님을 꼭 빼닮은 그는 언제나 부드럽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사교계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두 분은 너도 사랑해.”
“나도 두 분의 자식인데, 당연히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선 사랑하고 있겠지. 그 사실을 굳이 어린애처럼 부정하진 않아.”
카리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형한 시선이 그녀 답지 않게 매섭다.
부릅뜬 카리나의 눈을 바라보며 인프릭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깨물었을 때 더 아픈 손가락은 아벨리아고 페르던이고 오라버니지. 내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아니, 그래. 제발 날 그냥 둬. 혼자 있게 해 줘.”
인프릭의 말이 위로됐던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카리나는 자신이 벼랑 끝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카리나.”
“제발!”
카리나가 소리쳤다. 소리를 내 지른 목이 아팠다. 그녀가 목을 매만지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제발이라고 말하잖아.”
“……알겠다. 다음에 얘기하자.”
“그래.”
그녀가 인프릭을 뒤로하곤 곧장 2층으로 향했다.
망설이고 있는 뒤통수를 누군가 후려친 듯했다. 멍청한 생각을 한 자신을 벌주는 듯했다.
‘서러울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일인데. 왜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없는 거야?
당연히 허락할 것이라고 믿는 태도가 서글폈다.
‘도대체 왜 마지막 기억이 이렇게 최악인 거야?’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그녀는 신발을 내던지듯 벗고 이불 속으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차라리 그림으로 유명해졌다면 외롭지 않았을까?’
친구를 사귀었으면 가족에게 이렇게 집착하거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까?
카리나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아벨리아를 돌보느라 또래 친구의 다과회에 제대로 참석 해 보지 못한 자신에게 무슨 친구가 생길 수 있었을까.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외로운 흐느낌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사이, 저택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새벽이 밝았다.
그녀는 짧은 고민 끝에 여행을 떠나겠다는 한 줄의 편지만 남기기로 했다.
괜히 납치라는 이야기가 오가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병을 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사정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이 합쳐져 결국 적고 온 것은 한 줄뿐이었다.
카리나는 미리 사 둔 로브를 뒤집어쓰고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에 맞춰 저택을 빠져나왔다.
미리 시간을 계산해 둔 덕에 그녀는 탱탱 부어 벌겋게 짓무른 눈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올 수 있었다.
미리 이야기해 둔 단체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제국 수도, 아이오스행 이었다. 거기서 마차를 갈아타고 허브 역할을 하는 린로크 마을에 간다.
거기서부턴 상단이나 작은 개인 마차를 빌려 북부로 가야 했다.
그녀가 떨리는 듯 긴 한숨을 뱉었다.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 * *
의원의 약은 긴 여행에 무척 도움이 됐다.
그의 말대로 오랜 시간 찬 바람을 쐬며 불편한 마차 여행을 하자 카리나의 몸은 시시각각 나빠졌다.
그나마 약을 먹고 나면 밤에 잠이 잘 와서 통증을 느끼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어느 샌가부터 카리나는 거의 중독된 것처럼 약을 찾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약을 먹는다고 음식을 입에 잘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대개 잘 끓인 물은 죽이나 혹은 삶은 채소 정도라 여행이 계속될수록 말라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럼에도 카리나는 즐거웠다.
평생 다시는 없을, 어쩌면 마지막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풍경 하나하나가 색다르게 보였다.
여행객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거나 상단의 잡일꾼을 하며 얹혀 와야 했지만 그만한 존중을 받았다.
모두가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존재감 없는 아가씨도 아니고 음침한 여자도 아니고 재미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카리나였다. 모두가 그렇게 대해 줬다.
카리나는 긴 여행을 제 발로 끝내 갔다. 그렇게 그녀는 공작저에 도착했다.
* * *
“팽, 당장 쓸 만한 빈방을 그녀에게 내줘. 그리고 시중을 들 시녀에게 욕조에 물을 받아 놓으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영애는 일단 씻고 나서 말하지.”
난감한 표정으로 축객령을 내뱉는 밀라이언의 목소리에 카리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을 하는 두 달간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녀의 성격이었다.
본래는 말이 없고 참는 경우가 많은 카리나였으나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며 조금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별다른 훈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단과 마차는 무척 바쁘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필요하거나 불편한 것을 제대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누구 하나 제대로 들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를 내어 말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녀에게 눈을 돌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줬다.
카리나는 그렇게 대화의 중요성을 조금 깨달았다.
“당장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정돈이 된 방은 공작 각하의 옆 방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오폴드 영애?”
“카리나로 충분해요. 방은 어디든 괜찮지만 기왕이면 여기랑 떨어져 있는 별택이 좋을 것 같아요. 갑자기 찾아뵀으니 아무래도 각하께서도 심기가 불편하실 테니까요.”
그녀가 그의 깐깐한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저택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몸을 녹이신 후에 별택 건은 주인님께 부탁해 보시는 걸 권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녀가 가볍게 수긍했다.
방안은 무척 깔끔했다. 바깥이 온통 대리석인 것과는 다르게 그녀가 안내받은 방은 목조로 되어 있었다.
코끝에 나무 향이 멤돌았다.
“……특이하네요.”
“이곳은 가끔 주인님께서 심신을 다스리고 싶으실 때 사용하는 방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불편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아.”
확실히 방 안 가득 스며든 나무 향을 맡으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같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 시중을 들 시녀를 금방 올려 보내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몸을 녹이고 나갈 테니 한 시간쯤 뒤에 다시 와 줄래요?”
“……시중 없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팽의 의아한 목소리에 눈동자를 도르르 굴린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도움은 필요 없고 뭣보다 남은 약을 살펴야 했기에 괜히 짐을 만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알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팽이 잠시 망설이다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