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84)
>84 화>
“그래도 귀족이잖아요.”
“세상에 그들만큼 귀족답지 않은 귀족이 있을까.”
코웃음을 치며 밀라이언이 대답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그 표정에 카리나가 소처럼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말했잖아, 북부인은 그다지 격식이 없어. 혹시 만나서 무례한 짓거리를 하더라도 그대가 이해…….”
말을 하던 밀라이언이 제 턱을 쓰다듬었다.
“이해할 필요는 없지. 내게 곧장 말하도록 해.”
“네에…….”
그녀가 묘한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의심이라곤 하지 않는 얼굴이 순수하기 그지없다.
‘밀라이언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이겠구나.’ 하는 듯한 표정 이었다.
“그들 중에 제일 귀족 같은 건 나 정도일 거다.”
“그래요?”
“북부는 그다지 권력에 욕심이 없어. 중앙에서 가장 떨어져 있다 보니 그런 것도 있고 마수라는 지역 특성도 있지.”
호기심 짙은 카리나의 시선을 보던 밀라이언이 옅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뭣보다 날씨가 춥고 먹을 것이 제한적이었지. 예전에는 서로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어차피 죽기 밖에 안 했어.”
“네.”
이런 이야기가 뭐가 즐거운 걸까?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으려니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밀라이언은 카리나의 시선을 마주한 채 다시 입술을 뗐다.
“그런 특성이 오래도록 이어지다 보니 계급 따윈 상관도 없게 됐어. 말투에도 격식이 없고 행동에도 격식이 없지. 필요한 자리에 가면 나름대로 격식을 차리려고 노력하지만…….”
밀라이언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봐야 고양이 흉내내는 강아지에 지나지 않아.”
“그렇구나.”
밀라이언의 말을 듣는 카리나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가 옅은 미소를 띠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래도 친한 것 같아요.”
“오래 알기는 했지. 어릴 때부터 매번 봤던 이들도 있으니까.”
회의는 매년 행해지니 당연히 사이는 돈독해질 수밖에 없다. 돕지 않으면 무너진다. 북부의 생활은 대부분 그랬다.
“그들이 관심 있는 건 계급보다도 ‘얼마나 강한가.’야.”
“강한 거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래. 누가 작위를 얻었다는 것보단 저번 토벌에서 마수 몇 마리를 죽였는지가 더 관건이지.”
확실히 독특하기 짝이 없는 문화이긴 했다.
카리나가 낮게 웃었다. 밀라이언은 무척 질려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입가는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북부 사람들을 아끼는 것이 물씬 느껴졌다.
자신도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가 힘없이 웃어 버렸다.
‘언젠가’라는 단어를 쓰기엔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그래서 매년 이 시기만 되면 내기를 하지.”
“내기요?”
“그래, 가장 많은 마수를 토벌한 영주에게 각 지역 특산물을 주는 내기지.”
카리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기라니, 북부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수도나 남부에도 물론 내기가 종종 존재하긴 했다.
사실 내기라기보다는 ‘보여 주기’식의 친선 시합이었지만. 마상 대회라든가 아니면 검사들끼리 검을 나누는 검술 시합 같은 종류였는데, 그녀로선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작년에는 누가 이겼어요?”
“내가.”
밀라이언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뿌듯함이 깃들어 있다.
“재작년에는요?”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하나 있어.”
“능구렁이요?”
“그래, 아버지 대부터 토벌에 참여하시던 분이지. 노련함이라면 그를 따라갈 자가 없어.”
밀라이언의 대답이 뚱했다.
적어도 카리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그녀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마치 밀라이언이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분들에게도 물약을 하나씩 주겠다고 하면 화내실 거죠?”
“응.”
밀라이언의 대답에 카리나가 푸스스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이번 일에 한해선 그녀는 그다지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한 번의 거절에 깔끔하게 물러나기까지 한다.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릴 때부터 마수를 잡았던 이들이야. 쉽게 다칠 일은 없어.”
“그래도 이번엔 헤르타라는 변수가 있어서 고민하는 거잖아요.”
“…….”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밀라이언이 입을 닫았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웬만한 실력으로는 한 마리를 죽이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래서 피해가 적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녀의 그 물약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그는 그런 물건이 없이도 다양한 위기를 넘겨 왔으니까.
“난 그대가 그대의 생명을 대가로 능력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생명이라니…….”
카리나가 철렁한 마음을 숨긴 채 반문했다. 다행히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그대의 예술가로서의 생명이 끊기는 거잖아.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생길지 아직은 알 수 없 는 게 문제라면서.”
“아…….”
밀라이언의 말에 탄성을 흘린 카리나의 입이 꾹 닫혔다.
아마도 페리얼이 그렇게 적당히 말을 얼버무려 둔 것이 분명했다.
예술병이 앗아가는 것은 통증이 오는 부위다.
예술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없어질 곳에 통증이 인다. 예술 병에 걸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팔에 잦은 통증이 오면 팔의 감각이 사라지고 팔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반대로 다리나 눈에 통증이 온다면 그 부위를 곧 잃게 된다는 의미였다. 예술병의 아픔은 의외로 직관적이다.
카리나가 눈매를 접어 방긋 웃었다.
“맞아요, 하지만 그분들 중 누군가가 죽으면 밀라이언이 슬퍼 할 것 같아서요.”
“…….”
담담하게 입을 열었던 카리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늘 아침에 했던 다짐이 떠오른 참이다.
“그러니까 도와주고 싶었어요. 밀라이언은 제 은인이니까요.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고 하니까 더 말하진 않을게요.”
그녀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은인에게는 응당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식의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괜히 더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입을 닫았다.
“난 그대가 죽어도 크게 슬퍼할 거야.”
“네?”
“그러니까 그대도 죽지 마.”
담담한 말을 던지듯 내뱉은 밀라이언이 다시 식기를 손에 쥐었다. 뒤늦게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이미 식탁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
목구멍에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먹먹해지는 기분에 그녀가 애써 숨을 몰아쉬었다.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 한 마디였다. 어쩌면 과거에는 그토록 가족들에게 듣고 싶어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숨이 막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에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밀어내려니 목구멍이 뻑뻑할 정도로 아파져 왔다.
그녀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들었다.
“배고프네요. 얼른 먹어요.”
목구멍에 차오른 수많은 말 중에 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말을 뱉든지 그에게 괜한 구실을 제공할 거다. 계획은 여전했다.
때가 되면 이곳을 떠나는 거다.
다행히 그녀에겐 그림이 있었다. 붓을 들 힘조차 없어지기 전에 미리 도망갈 곳을 그려 놓을 생각이었다. 편지를 남기고 떠나면 된다.
수도로 돌아간다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밀라이언은 분명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봄이 오면 북부의 폭포에 데려 가 주지.”
“폭포요?”
“그래. 봄에 한번 보고 여름에 한번 보면 감회가 새로울 거야. 여름에는 폭포 근처로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오르거든.”
“우와, 그거 엄청 예쁘겠네요.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카리나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와 무지개를 바라보는 것도 무척 행복하겠지. 미소 짓는 카리나를 보며 밀라이언이 마주 웃었다.
“가을에도 겨울에도 북부엔 볼 것이 많아. 땅이 넓어서 몇 년 동안 계절마다 돌아다녀도 볼 게 더 많을 거다.”
“그러다가 제가 아주 북부에 눌러앉겠어요.”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카리나는 웃었다. 그녀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가볍게 대답했다.
여름은 오지 않는다. 그녀의 여름은 영원히 과거에 머무를 것이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이 계절이 끝나면 그녀에게는 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웃는 카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밀라이언이 말했다.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카리나가 웃음기를 머금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가 원한다면 계속 있어도 괜찮아.”
양동이 가득 채워 찰랑거리는 마음이 덜어내고 덜어내도 자꾸만 넘쳐흘렀다.
끝이 있는 삶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그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거 정말 파격적인 제안이네요.”
목구멍이 아팠다. 차오르는 감정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다 삼켜 내지 못해서 목구멍 안에서 부푼 듯이 아팠다.
이 감정은 어떻게 해야만 덜어 낼 수 있는 걸까.
당신에게 해야 하는 거짓말이 점점 부피를 늘려 간다.
처음에는 단 하나였을 거짓말이, 지금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진심이다. 그러니 생각해 봐. 북부는 남부만큼 따뜻하고 먹을 것이 다양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다고 장담하지.”
“……네.”
“그대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다양한 곳을 보여 줄게. 돌아가기 싫다면 억지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식기를 내려놓은 밀라이언의 시선이 꿰뚫듯 카리나를 향했다.
시선을 마주한 카리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에게 더는 거짓말을 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그저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당장 대답하라는 건 아니야, 한번 생각해 봐.”
“그럴게요.”
밀라이언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카리나는 대답할 수 있었다. 억지로 웃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카리나는 밀라이언에게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녀는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가 없다.
‘좋아해요.’
그 한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카리나는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얼굴로 천천히 식기를 손에 쥐었다.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는 음식은 무슨 맛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느끼는 맛없는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