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85)
>85 화>
* * *
식사를 마치자마자 발걸음은 당연하게도 화실로 향했다.
제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제집보다도 더 익숙해진 발걸음에 카리나가 화실 문 앞에서 뚝 멈춰 섰다.
당연하다는 듯 움직이는 발은 자신이 얼마나 이곳에 익숙해졌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깨닫고 나니 감정이 또 파도처럼 일렁였다.
마음을 주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굴어야 했을까? 다정함에 속절없이 기우는 몸을 바로 세우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이제 와서 다시 세워 보려고 해도 이미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뒤늦은 노력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것은 조금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것뿐이다.
“하아…….”
속이 답답했다. 털어놓을 곳이 없으니 또다시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언제나와 같은 일이다.
감정이 흔들리면 속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라는 충동질이 인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마다 그 충동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편해질 것을 알기에 그렇다. 집중하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랬다.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법이었다.
“조금만 그리자.”
완성만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카리나가 홀린 듯이 캔버스가 놓인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조차 아깝다. 최근 들어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새하얀 캔버스를 보고 있던 카리나가 이윽고 붓을 손에 쥐었다.
가장 떠오르는 것은 밀라이언과 봤던 그 호수였으나 그건 정말 기회가 된다면 그 자리에서 그리고 싶었다.
카리나가 손을 움직였다. 그저 본능적으로. 무엇을 그리는 것인지 본인조차 확실하지 않은 느낌이다. 카리나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캔버스 위에 색이 칠해지고 그 위에 또다시 새로운 색이 칠해진다. 단순한 장난이나 낙서로 보였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윤곽을 갖춰 갔다.
카리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완성하면 이것은 자신과 죽기 직전까지 함께할 수 있는 것 일까?
붓질 몇 번이면 캔버스는 완성 된다.
완성된다는 것은 즉,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
쿵,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누군가 자꾸만 그림을 완성하라고 충동질을 했다. 완성하지 않으면 괴로울 것 같았다.
반대로 완성하면 편해질 거라고. 완성하면 눈앞의 이는 영원히 곁에 있어 줄 거라고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카리나의 눈빛이 한층 탁해졌다. 이지를 상실한 듯 그녀는 기계처럼 붓을 들어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움직일 때마다 그림은 점점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괜찮을 거다.
완성만 하지 않으면 되잖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색을 칠하는 속도는 빨랐다.
‘조금만……’
카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광기와 닮아 있었다. 완성하면 통증도 없을 거다.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겠지.
해선 안 된다는 생각과 반드시 완성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조금만 더.’
이제 카리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배경을 그리고 인물의 마지막 덧칠을 시작했다.
“거의 다 됐어…….”
카리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천천히 붓을 들어 캔버스를 향해 움직였다.
탁- 꽈악.
누군가에게 손목이 붙잡히지만 않았다면.
카리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완성이 코앞이다. 조금만 더 하면 분명히 완성할 수 있다. 그러면 어쩐지 자유로워질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진 카리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당황한 기색을 채 감추지 못한 페리얼이 서 있었다.
“카리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페리얼의 말끝이 떨렸다.
눈앞에 있는 것이 카리나인지 혹은 그녀의 탈을 뒤집어쓴 다른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기에 차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마치 칼로스 가문에 전해지는 고서 속 다른 창조자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늘 총명하고 깨끗하게 빛을 반사하던 푸른 눈동자는 탁한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완성을…….”
완성을 해야 했다. 카리나는 페리얼을 한 번 쳐다보곤 오른손에 힘을 줬다.
그래 봐야 남자인 페리얼의 힘 을 보통 사람보다 약한 체력의 카리나가 이겨낼 순 없었다.
“이거 놔!”
“카리나! 내가 금기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저건 완성하면 안 됩니다.”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금기, 예술에 금기가 어딨는가. 자신은 창조자고 창조자는 신에게 선택받았다. 신과 같은 힘을 가진 것이다.
“죽을 거예요.”
페리얼의 목소리에 카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씩 웃었다. 페리얼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내 생명을 대가로 해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요?”
광기에 젖은 목소리였다.
페리얼은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 카리나인지 혹은 악귀에 씐 인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카리나는 계속 팔을 빼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런 가짜가…… 가지고 싶습니까?”
“…….”
“밀라이언이 보고 싶으면 차라리 이 방을 나가십시오. 카리나가 달려가 안기면 그는 두 팔 벌려 당신을 안아 줄 겁니다.”
페리얼의 목소리에 카리나의 눈빛이 한층 누그러졌다. 붓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가짜는 진짜를 대신할 수 없어요.”
툭, 데구루루-.
붓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카리나는 그제야 지친 듯 고개를 떨군다. 무언가에 홀린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광기에 번들거리던 눈동자가 한 층 진정되었다.
“카리나.”
“……네.”
붓과 팔레트를 모두 바닥에 떨어뜨린 그녀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는 방금까지 그녀가 그리던 그림이 있었다.
“……아.”
카리나가 이마를 짚었다. 그림 속에 클로즈업되어 그려져 있는 것은 밀라이언이었다.
자신은 밀라이언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왜?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가.
창조한 것은 그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를 소유하길 바랐다.
마치 주인만을 온전히 바라보는 헤르타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서.
카리나가 벌벌 떨리는 두 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끔찍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처음에는 그저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을 뿐인데. 완성되어 갈수록 점점 사고가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페리얼.”
페리얼이 아니었다면 무슨 사태가 벌어졌을지 상상이 됐다.
자신은 밀라이언을 기만하려고 한 거다. 다정한 그 사람을 가지지 못한다는 슬픔에 휩싸여서 본능에 이성을 맡겼다.
“아니, 괜찮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셨습니까?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광기에 젖은 예술가.
그 단어야말로 조금 전 카리나를 표현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 한다.
그녀는 정말 광기에 젖어 있었다. 그림을 그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고문서와 똑같았지.’
하지만 그보단 상태가 덜 심각한 듯했다.
그래도 제 말 몇 마디에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가. 보통은 막았을 때 심하면 자해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하니까.
‘창조자들은 모두 광증을 가지고 있는 건가?’
유독 창조의 기적을 가진 예술병 환자에게서만 그런 보고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광증, 광기, 그런 단어가 쉬지 않고 언급되는 경우는 고문서에서도 오직 창조자를 언급할 때 뿐이었다.
‘밀라이언의 이름이 그녀를 멈추게 하는군.’
그녀의 안에서 그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이 났다. 파고들 틈도 없는 것이다. 그 점만큼은 입 안이 썼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카리나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왜 그랬냐고 하면 그녀도 설명 할 길이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옳을까.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누가 자꾸 완성하라고 하는 것 같았으니까.”
완성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한 번씩 멈춰야겠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심장에 통증이 올라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끔찍한 통증을 겪고 싶지 않아서 한 번만, 한 번만 더 하면서 붓을 움직였다.
“누가 완성하라고 했다고요?”
“그냥 설명하자면 그런 느낌이 었어요.”
“……멈추려고는 했어요?”
“하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멈추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던 건지, 또 다른 핑계를 찾아낸 건지.”
알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그림을 그려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지친 듯 고개를 숙인 카리나를 보며 페리얼이 한숨을 삼켰다. 그가 캔버스를 바라봤다.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두어 번, 붓질 두어 번이었으면 이미 그림은 완성됐을 것이다.
한 발만 늦었다면 어떻게 됐을 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예전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예전이요?”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중얼거리는 카리나의 옆얼굴을 보며 페리얼이 되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지쳐서, 넋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이겨 내질 못했었는데.”
누군가가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그림을 완성하자,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거라고.
혼자 쓸쓸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때라니? 언제 말입니까.”
“어렸을…….”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카리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숨을 멈추는 그녀를 보며 페리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카리나, 당신…… 사람을…… 사람에 생명을 불어넣은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