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86)
>86 화>
“…….”
카리나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문 채 열릴 줄을 몰랐다.
페리얼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평소와는 다른 초조한 얼굴 위에 조급함이 덧씌워져 있었다.
속절없이 돌아간 몸에 카리나와 페리얼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카리나의 시선은 여전히 고요했다. 곤란함과 난감함이 엿보이긴 했지만 그 외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등줄기를 스치는 소름에 페리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묻잖아! 기적을 이용해서 사람을 만든 적이 있냐고!”
페리얼이 카리나의 어깨를 한차례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캔버스를 향해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그랬군. 당신의 시간이 왜 그것밖에 남지 않았는지 알겠어.”
페리얼이 이마를 짚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겨우 200장 남짓의 완성품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기억의 오차를 고려 하더라도 500장을 채 넘지 않을 거다. 특히나 카리나의 기적은 대부분 소소한 것들이었다.
헤르타를 제외하고선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을 만든 적이 있어서였군.”
사람을 만드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것이 금기시된 이유는 인간을 창조하는 것 자체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며 세상의 인과율을 깨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종이 속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반대로 조각도 마찬가지다.
두 생명체의 결합만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을 깼다.
“……그래서 미리 말했잖아요, 나는 죽을 거라고.”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밝히고 말았다.
카리나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죽음을 알고도 누군가를 탓할 수 없었던 것은 멋모르던 시절 스스로 만들어 낸 불행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크게 혼이 난 날이었어요. 아주 어렸죠.”
카리나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맞았고 처음으로 아팠고 처음으로…… 난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 날이었죠.”
뺨을 맞았던 그날, 빈민촌으로 쫓겨난다는 말을 들었던 그날, 그저 속절없이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던 날, 언제나처럼 연필과 붓을 꺼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건강한 자신을 탓하는 듯한 그 말이 너무 서글펐다. 마치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 죄라는 것처럼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싫었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그림을 그리려고 연필을 쥐는데 머릿속에 그려야 할 것이 떠올랐어요. 기적에 대해서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라서 잘 모르기도 했고요.”
사실 페리얼에게 듣는 순간까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죄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손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았고 다정한 부모님이 가지고 싶었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완성 한 후였어요.”
같은 얼굴에 같은 목소리 그러나 행동은 그렇게 바라던 다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종이 속에서 태어난 생명이 온기를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리고 기적이 발현된 지 얼마 안 돼서 기절했고…… 눈을 뜨니 저는 침대에 눕혀져 있었어요. 사방엔 빈 종이만 굴러다녔죠.”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고요……?”
“네, 아마도 그림에서 나온 두 사람이 해 준 걸 거예요.”
다정하고 곁에서 함께 잠도 자주는 부모를 원했다. 원한 대로 그것을 얻었으나 그 대가는 상당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쩌면 그 후 부터 서서히 몸이 좋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저는 그때의 저를 원망할 수 없어요.”
자신이 그날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렸는지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선연하게 떠올랐으니까.
그 기억 때문에 자신은 가족 관계가 개선되더라도 평생 그들을 의심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떠나는 것이 나았다. 그들은 자신의 사망 신고를 하고 그녀 역시 그들을 잊기로 했다. 용서할 자신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용서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지.
“어째서요?”
“그렇지 않으면 아마 스스로 제 목을 졸라 죽었을 테니까요.”
이미 숨통이 틀어 막혀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어린 아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나가도 끔찍한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도망갈 곳이 없는 거다.
“어른들은 참 무서워요.”
“무엇이요?”
“아이들에겐 오로지 부모가 전부이고 부모가 주는 것이 전부인데,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가 행동하지 않거나 부모가 화가 나면 그걸 인질로 삼아 협박하거든요.”
말을 듣지 않으면 밥이 없다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집에서 쫓아낼 거라거나 다음에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용돈을 주지 않겠다거나.
앉혀 놓고 대화를 나눈다면 조금 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어른들은 항상 인질이 필요하다.
인질이 있어야만 상대가 겁에 질려서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이 아니어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다정하게 한 번 안아 줬더라면,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더라면, 단 10분 만이라도 시간을 내줬더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지만.
“하지만 무지로 인한 한 번의 실수는 되돌릴 수 없는 거겠죠.”
“…….”
몰랐더라도 죄는 죄였다. 몰랐더라도 금기는 금기였다. 그 결과가 자신을 피해 가는 일은 없으리라.
페리얼이 답답한 듯 성마른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근데 언제 돌아왔어요?”
“카리나 손을 붙잡기 3초쯤 전에요.”
“한 발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네요.”
“알긴 아시는군요. 웬만하면 그림을 혼자 그리지 마세요. 어떻게든 당신을 살려 볼 테니까.”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의 눈매가 반으로 접혔다.
페리얼도 다정했다. 눈 밑에 그늘이 짙게 질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텐데 내색 하나 하지 않는다.
“그래도 신기하군요.”
“신기해요?”
“말을 들어 보면 카리나는 두 명의 사람을 그려 낸 것 아닙니까?”
“네.”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은 한 명의 인간에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나마도 가장 오래된 기록은 5분 정도죠.”
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겨우 5분으로 생명을 잃고 두 팔을 잃는 것인가.
경악에 젖은 카리나의 눈동자를 보며 페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리나의 말에 따르면…… 그들과 제법 이야기를 했다는 것 아닙니까?”
“네……. 한 10분 정도 대화했는데 그 뒤론 정신을 잃었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래도 온기가 남아 있었으니까…….”
아마도 제법 오랜 시간 곁에 있어 줬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날 카리나는 줄곧 바라던 대로 누군가의 곁에서 잠이 들었다. 비록 만들어 낸 가짜 부모이긴 했지만.
“제법 오랜 시간 있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잠재력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네요.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거예요.”
페리얼의 아쉬움이 담긴 말에 카리나가 말없이 웃었다.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지금 만난 것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앞으로 웬만해선 기적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노력하고 있어요.”
“난 어떻게든 당신을 살릴 겁니다. 그러기 위해 필사적일 거예요. 그러니 카리나도 살고 싶다고 생각해 주세요.”
페리얼의 말에 카리나의 눈동자가 커질 대로 커졌다.
제 손을 붙잡아 온 페리얼을 보며 카리나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 싶어요. 지금껏 바란 적 없을 정도로 간절하게요.”
“그거면 됐습니다.”
페리얼이 눈꼬리를 접어 예쁘게 웃었다.
그로선 실상 그저 웃은 것뿐이었지만 카리나는 페리얼의 뒤에서 후광이 비추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카리나, 슬슬 준비를…….”
안으로 들어오던 밀라이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카리나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아직 그녀와 손을 잡고 있던 페리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뭘 하는 거지?”
“아, 페리얼이 돌아와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요.”
해맑은 카리나의 대답에 페리얼이 그녀를 품에 냉큼 끌어안았다.
“맞아요, 보고 싶었습니다. 카리나.”
“네……? 음, 저도요.”
카리나가 페리얼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그렇게 반가웠었나 싶었다가 일부러 밀라이언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과장된 행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아……’
하긴, 괜히 심각한 분위기를 하고 있으면 밀라이언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많이 기다렸어요.”
덧붙인 말에 밀라이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북풍한설이 불어 닥치는 것같이 싸늘한 시선이 페리얼에게 꽂혔다. 페리얼이 몸을 떨었다.
‘저 살벌한 새끼.’
살기를 풀풀 풍기는 것이 정말 죽이기라도 할 기세다.
그제야 페리얼이 잠시 안았던 카리나를 놓아주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걸어와 카리나의 앞에 섰다.
“밀라이언?”
카리나의 부름에 밀라이언이 팔을 뻗어 그대로 카리나를 품에 꽉 끌어안는다.
이글거리는 시선은 여전히 페리얼에게 꽂힌 채다.
예상치도 못하게 그의 품에 안긴 카리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지……?’
무슨 일이 있나?
평소처럼 안아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품에 꽉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덕분에 비스듬히 돌아간 옆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묻혔다.
쿵. 쿵. 쿵.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이 무척 듣기 좋았다. 카리나가 숨을 삼킨 채 가만히 굳었다.
“왜 그래요……?”
그래도 역시 밀라이언답지 않다고 생각한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입술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카리나의 고개가 한 층 기울어졌다.
“그대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