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87)
>87 화>
“……네?”
“푸흡.”
카리나의 반문과 페리얼의 비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보고 싶었다니.’
아침에 보지 않았던가. 얼굴을 본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보고 싶단 말인가.
그래도 그의 어감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어리광 같기도 하고.
“아침에 봤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리나는 반사적으로 페리얼의 등을 쓸어 줬듯이 밀라이언의 등을 쓸어 줬다.
페리얼이 웃음을 삼킨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보다 한참이나 덩치가 큰 그의 품에 안긴 카리나의 표정이 퍽 밝았다. 그다지 감정이 담기지 않았던 방금까지의 시선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로지 밀라이언만이 그녀를 웃게 했다.
‘정말 질투 나게 하네.’
저렇게 맹목적일 수가 있을까. 밀라이언은 타인에게 그다지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다.
필요에 의해 상대방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행동하긴 하지만 다정하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저으리라.
그는 기본적인 매너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어도 배려가 있다곤 표현할 수 없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만 본인이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물론, 웬만해서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한 번 집착하면 그것을 놓지 않지만.
저렇게 매섭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페리얼로서도 참 오랜만이었다.
살벌하게 자신을 노려보던 밀라이언도 어느새 카리나의 쓰다듬을 받으며 얌전해졌다. 마치 그녀가 맹수 조련사라도 되는 듯이 보인다.
“곧 그대가 참석하고 싶었던 연회가 시작될 거야. 슬슬 준비해야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그림을 그리느라 몰랐어요.”
“그림?”
밀라이언이 반문하며 캔버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큼직하게 떠졌다.
캔버스에 고정된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밀라이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카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홍당무도 이런 홍당무가 없으리라. 사실 홍당무보다는 잘 익은 사과에 더 가깝긴 했다.
카리나가 입술을 뻐끔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후다닥 도망을 가든, 캔버스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든 하고 싶었다.
문제는, 이 엄청난 체격 차이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다지 꽉 조인 것도 아니고 숨이 막힌 것도 아닌데, 도저히 자력으로는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쓸데없는 발버둥을 포기한 카리나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들려오는 심장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같았고.
“……잠시 시간 되나, 카리나?”
“네? 전 괜찮은데…….”
“10분만 실례하지.”
밀라이언이 그대로 카리나를 덥석 들어 올린 채 냉큼 화실을 벗어났다. 그가 카리나를 품에 안은 채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간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녀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를 깨달은 것만 같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린 그림에는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으니까.
캔버스에 그려져 있던 것은 오늘 아침 식탁에 앉아 있던 밀라이언의 모습이었다.
뒤로 비치는 테라스 밖의 풍경과 그 난간에 앉아 있던 새와 그것을 뒤로한 채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있는 자신.
그것이 너무나도 반짝여서 그녀의 시선을 엿본 기분이었다. 무엇하나 허투로 그린 것이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멋쩍어서 애꿎은 식탁을 바라보는 자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렇게 자세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시선을 피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그려 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가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사랑스럽다. 그 말의 의미를 밀라이언은 이제야 조금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카리나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
키스 후에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싫어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작고 사소한 버릇을, 잠시 드러났던 감정의 잔해를 캔버스에 옮겨 담을 사람은 없었다.
곧장 카리나의 방으로 들어온 밀라이언이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든 채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그의 입맞춤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밀…… 흡……!”
조급한 듯, 초조한 듯 입 안을 파고드는 혀에 카리나의 눈이 절로 감겼다.
어쩐지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를 매정한 말로 내칠 자신이 없었다.
알고 있다. 여기서 허락해주면, 감정을 더이상 추스를 수 없게 될 것이다.
터지고 터져서 언제까지 그 터진 부위를 다시 메울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번만.’
아직은 괜찮을 거다. 터지더라도 아직은 다시 기울 수 있을 거야. 아직은, 스스로 멈출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똑같은 변명을 하면서 카리나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밀라이언은 봐주지 않고 안을 헤집었다. 다정했던 첫 입맞춤과는 다르게 이번 입맞춤은 절박함에 가까웠다.
“흣……!”
혀를 깨물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밀라이언에 카리나가 진정하라는 듯 더듬더듬 손을 올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밀라이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흉포했던 입맞춤이 천천히 느려진다. 카리나가 눈을 잘게 떨었다. 시뻘건 그의 눈동자 안에 붉게 상기된 자신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순수한 욕망이었다.
그림에 담아 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순수한 욕망.
쪽-.
아랫입술을 길게 빨아들인 접합부에서 민망한 소리가 났다. 카리나가 볼을 붉히자 그것만으로도 귀엽다는 듯 밀라이언이 낮게 웃었다.
한참이나 입 안을 헤집으며 짓밟듯 움직이던 밀라이언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대, 날 보고 있었군.”
물에 젖은 듯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카리나가 입을 닫았다.
아직 가까운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숨결이 서로 얽혔다. 그녀가 섞인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맞은편에 있는데 어떻게 안 봐요.”
변명하듯 덧붙이는 목소리에도 밀라이언이 웃었다.
그렇게 가볍게 본 것이 아니다.
그녀의 시선은 끈질기고 끈질겼다. 자신의 모든 모습을 눈에 담지 않고서야 그렇게 그려 낼 수 없을 테니까.
“그대를 어쩌면 좋지.”
카리나를 안아 든 채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밀라이언이 혼잣말을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제 품에 가둬 둘 수 있는 거지?
그녀가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은 더 이상 그녀가 떠나는 것을 반길 수 없게 됐다. 밀라이언이 이를 세워 그대로 카리나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리 아프지 않게 하지만 확실히 자국이 남도록. 따끔한 느낌에 카리나가 미간을 좁혔다.
옅게 흐르는 신음을 빠르게 잡은 밀라이언이 귀를 쫑긋거리곤 순순히 물러났다.
“준비는 간단히 해. 드레스보단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는 게 더 좋을 거야. 시녀들이 알아서 챙겨 줄 테니 걱정 말고.”
“……네.”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볼을 붉혔다. 여러모로 정말…… 부끄럽다. 붉게 물든 그녀의 볼을 커다란 손으로 감싼 밀라이언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준비가 다 끝나면 데리러 오지.”
“네.”
밀라이언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돌리려던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틀었다.
“너무 드러나는 옷은 입지 마.”
“네?”
“매너라곤 기본도 없는 놈들이 대부분이니까.”
밀라이언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름대로 귀족의 이름을 달고 있는 북부의 영주들이 들었으면 뒷목을 잡을 일이었지만 밀라이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깎아내렸다.
“아…… 알겠어요.”
카리나가 멍하니 대답하자 밀라이언이 마저 방을 나섰다.
‘시녀들에게도 당부하고 가야겠군.’
복도를 걸어 내려가며 밀라이언이 생각했다. 페리얼이 봤으면 지랄한다며 거친 언사를 서슴지 않았을,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 * *
“……뭐야.”
카리나가 비틀비틀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첫번째는 실수로 쳐도 방금 것까지 실수로 칠 순 없었다.
‘……아니, 실수할 수도 있지.’
카리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실수가 있으면 두 번 실수도 있는 법이다. 세 번까지는 아무래도 실수로 볼 수 없겠지만 겨우 두 번이 아닌가.
“그림에 너무 감동을 받았나……?”
누군가 초상화를 그려 준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치밀었다.
그래, 사람이 초상화를 받아 보지 못했으면 감동적일 수도 있지. 카리나가 혼자서 고개를 주억였다.
‘밀라이언에게 선물로 줘야지.’
완성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에게 이렇게나마 자신의 흔적을 남겨 주고 갈 수 있으니까.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아 머리를 굴리다가도 또 이래저래 풀어지는 스스로에 카리나가 헛웃음을 삼켰다. 이쯤 되니 자기 자신이 불쌍할 지경이다.
“바보 같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이 들려온 시녀들의 목소리에 카리나가 최대한 얼굴에 평정을 가장했다. 정말 여러모로 엉망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