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
>9 화>
팽이 나가고 문을 잠근 카리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로브를 벗어 던졌다.
두 달을 함께한 로브는 솔직히 먼지 구덩이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으며 그녀가 천 가방에서 가벼운 원피스를 꺼내 침대에 던졌다.
하나뿐인 속옷도 던지고 남은 돈을 셈했다.
금화는 아예 챙기질 않았으니 은화 십 수 개와 동화가 전부였다.
17실버 8페니. 옷가게의 시세를 알아본 적이 없어서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으음, 옷 두어 벌 정돈 살 수 있으려나?’
어차피 이곳에서 딱히 연회나 다과회에 참석할 것도 아니니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요컨대, 비싼 드레스가 필요하진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녀는 외출용으로 입을 가벼운 원피스와 새 로브와 속옷 몇 개가 필요할 뿐이었다.
“일단 씻자.”
카리나는 더러운 옷을 로브에 둘둘 감싸 멀리 던져 놓고 욕조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온몸이 노곤했다. 대체 제대로 된 목욕이 얼마 만인지.
‘……약이 세 알 남았지.’
약이 다 떨어진 뒤 몸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 그녀는 두려웠다.
카리나가 이제는 달달 외울 정도로 본 노의원의 주의 사항을 떠올렸다.
[일단 약은 넉넉히 넣었네. 약이 세 알 남았다면 먹는 것을 관두도록 해. 먹지 않고 3일이 지나면 큰 열병을 앓을게야. 억지로 막아 뒀던 둑이 터지듯, 몸 상태가 확연히 나빠질 테지.]악필로 작게 적힌 글씨는 무척 빽빽했다. 오랜 시간 고민하며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욱여넣은 것이 눈에 선히 보일 정도였다.
[열이 심하게 오르면 이틀에 한 번, 세 알 남은 알약을 한 개씩 먹도록 해. 열병은 대략 일주일이면 가라앉을 테고, 이틀에 한 번 약을 먹으면 고통을 조금 덜어 줄 걸세.]카리나는 그의 말대로 약을 세 알 남겼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일부러 약을 밤에 먹었으니 약 효과가 풀리는 시기도 밤일 확률이 높았다.
당장 오늘 밤부터 먹을 약이 없으니 몸 상태가 나빠지는 시기도 오늘 밤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추신. 쏟아지는 잠을 거부하지마! 미련하게 꼭 안자려고 용을 쓰는 놈들이 있더군. 잠은 몸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는 증거야. 그러니 잠은 푹 잘수록 좋아. 물론 최대 열 시간을 넘기면 그건 독이야. 그럴 땐 힘들더라도 적당히 움직이거나 바람을 쐬도록 해.]조부가 있었다면 혹시 그런 느낌이었을까, 싶은 생각에 조금 울적하거나 외로워질 때마다 꺼내서 읽곤 했다.
오죽하면 여행객들이 연인이 써 준 편지냐고 물어봐 왔을 정도였다.
“으음, 결국 다 외워 버렸어.”
카리나가 풀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카리나는 짧은 목욕을 끝냈다. 여행은 몸이 고되긴 했지만 무척 즐거웠다.
채색까진 무리였지만 작은 메모지에 스케치한 것도 여러 장이다.
‘하고 싶은 걸 하자.’
수건으로 몸을 닦은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은 겨우 1년뿐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삶이다.
혼자서 옷을 마저 갈아입은 그녀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팽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각하께 안내해 주세요.”
그녀는 집사의 안내에 따라 밀라이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온통 종이와 잉크 냄새로 가득했다. 게다가 딱 필요한 가구를 제외하곤 그 흔한 화병이나 장식품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삭막했다.
오죽 삭막했으면 꾸미는 것에 흥미가 없는 카리나조차 들어가자마자 탄식을 흘렸을 정도였다.
집무실은 온통 칙칙한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여기서 일을 하다 보면 우울증이 걸릴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실제로 그의 까칠함이 이런 우중충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녀는 일말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리나가 집무실에 발을 들이자 예민한 밀라이언의 고개가 단숨에 들렸다.
아까는 몰랐지만 카리나는 그의 피곤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눈에 핏줄이 서 있는 것이 까칠할만하게 보였다.
“차를 준비할까요?”
“그래.”
밀라이언이 펜을 놓고 집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도대체 여기까지 뭐 하러 왔는지나 듣지. 출가는 왜 했나?”
“……꼭 설명해야 하나요?”
눈치를 본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의 집에 얹혀 살 생각을 했으면 당연히 설득할 생각도 해야 하지 않나?”
“…….”
또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카리나가 딱 달라붙은 입술을 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그의 정곡을 찌른 말에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과 싸우기라도 했나?”
“비슷하지만 달라요.”
“그럼?”
“…….”
“영애가 공작령까지 두 달이나 걸려 왔을 정도로 의지가 확고한 건 알겠어. 그렇게 큰 싸움이었나?”
밀라이언의 머릿속엔 그녀가 싸움을 벌이고 왔다는 가설이 기정 사실처럼 쫙 펼쳐진 듯했다.
그러나 그 말은 맞으면서 틀렸다.
그녀는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 조용히 있을 곳이 필요했고 가족들과 멀리 떨어질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언젠가 자신이 죽으면 후회하길 바라는 괘씸한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고집스럽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치졸하네.’
유치하고 치졸하다. 스스로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러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치하면 어떻고 치졸하면 좀 어떤가. 그것이 카리나 자신이었다.
카리나는 제 감정에 조금이나마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시기가 나빠. 겨울은 내 영지가 가장 바쁜 때야. 영애에게 신경 써 줄 틈이 없어.”
“그거 좋네요.”
생각지도 못하게 원하던 답을 들은 카리나가 눈을 빛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밀라이언이 헛웃음을 삼켰다. 이 작달막한 여인이 대체 뭐라고 중얼거리는 건가.
그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버릇처럼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뭐라고?”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별택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면 별택을 내 주시면 안 될까요? 각하의 옆방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서로 마주치면 불편할 것 같아서요.”
“별택을? 거긴 사용되지 않은지 조금 돼서 정리가 필요해.”
밀라이언도 카리나의 권유가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지 아까보단 순순히 대답했다.
“정리가 안 됐다는 게…… 먼지가 쌓여 있나요?”
“아니, 그 정도는 하고 있다. 다만 사용인 배정도 해야 하고 필요한 짐도 들여놔야 해. 오래된 곳이라 비어 있는 비품도 많을 테고 재정비가 필요할 거다.”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짧은 고민을 했다.
그녀는 일단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뭣보다 일주일간 앓을 것이 뻔한데 굳이 귀찮은 짐 덩어리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딱 좋아요. 어차피 반년 정도 있는 건데 굳이 꾸미지 않아도 되고 당장 불 있고 따뜻한 물 나오면 됐죠. 시녀도 괜찮아요. 원래부터 혼자서 잘하는 편이라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카리나가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귀찮은 시선을 숨기지 않는 밀라이언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그동안 본 모습 중에 제일 의욕적 이군.”
“첫 만남 때 오징어라는 폭언을 한 각하에게 그런 칭찬을 듣다니 놀랍네요.”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속도 좁군.
밀라이언의 시선에서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리나가 눈을 끔뻑였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까칠한지. 피곤해서 그런 건 알겠지만 그녀의 심기도 조금 비틀렸다.
“언어 선택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머릿속에 곽 박혀 있었거든요.”
할 수 있는 한 방긋 웃어 보인 카리나가 대답했다.
밀라이언이 입을 닫았다.
눈앞에서 재잘거리는 여자가 자신이 아는 여인이 맞나 싶은 의문이 들 정도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때는 의지라곤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
그린 듯한 웃음을 짓고 틀에 정해진 말만 내뱉는 것이 퍽 고까웠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때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밀라이언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괜찮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사용은 바로 가능하니 팽에게 말해 두도록 하지. 원할 때 언제든지 가도 좋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허락 없이 절대 공작령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마. 공작령은 내가 지키니 언제나 안전할 거다.”
“네.”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한층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며 밀라이언이 반쯤 식은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어떻게 이 시기에 공작령까지 올 생각을 했는지. 미련하기 짝이 없군.”
대화가 끝나자 신랄한 비판이 시작됐다. 그녀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겨울이 왜 그렇게 큰 문제예요?”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밀라이언의 한심스러운 시선이 카리나에게 닿았다.
멍청함을 탓하기라도 하는 시선이었다. 그 적나라한 시선에 그녀는 조금 아연해졌다.
아니, 드넓은 영지를 총괄하는 공작 각하가 감정을 저렇게 숨기지 못해도 되는가?
물론 북부는 다른 지역보다 신분 체계가 약하다곤 들었지만.
카리나의 기분이 조금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