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0)
>90 화>
* * *
‘으흠…… 괜히 쫓아냈나?’
카리나가 턱을 매만졌다.
나가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 했는데. 그래도 눈치를 보는 다른 이들이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밀라이언은 첫인상이 조금 무서운 편이니까.
“와, 카리나 진짜 대단하네요. 각하를 아주 강아지 다루듯 다루시네.”
“강아지요?”
“아, 그런 게 있습니다. 각하께서 카리나 말은 잘 들어주시니 한 말이에요.”
“아, 그런가요?”
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옅게 웃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밀라이언이 사라지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와, 저 인간 어떻게 길들였어? 쩔쩔매는 거 처음 보네.”
“길들……이지 않았는데요…….”
당황스러운 단어 선택에 그녀가 눈을 끔뻑였다.
옷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왜 밀라이언이 그토록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고 했는지 알겠다. 확실히 자신과 성향이 완전히 달랐다.
“아, 난 마린 에리얼. 자작이야. 마린으로 가볍게 불러 줘.”
“……어, 네. 잘 부탁해요. 마린.”
“아, 말 편하게 해. 나 그런 격식 잘 못 차리니까. 그래서 웬만 하면 수도에도 안 가고.”
“아…… 응. 마린.”
반말에 익숙하지 않은 카리나가 그래도 더듬더듬 대답하자 마린이 냉큼 어깨동무를 해 왔다.
정말 친화력 하나는 끝내 주는 사람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조금 따라가기가 힘들다.
“난 북부에서 유일하게 바닷가랑 맞닿아 있는 지역에 있어. 솔직히 마수보단 해수랑 싸우는 일이 더 많고. 해적이랑 맞붙는 일이 그보다 더 많아.”
시원시원한 설명에 카리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끈하고 호탕한 성격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둥글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무척 짓궂은 장난 꾸러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와…… 해수라면 바다에 사는 마수인가요?”
“맞아. 북부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닷물 온도는 낮은 편이라서 우리만큼은 계절과 관계없이 해수 토벌을 하는 편이야.”
“우와…….”
카리나가 놀란 눈을 했다.
어찌나 신기한 이야긴지 모른다. 바다도 본 적이 없는데 물 위에서 마수를 토벌한다니, 어쩐지 멋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순수한 놀람에 마린의 기분도 제법 좋아졌다. 순수한 것이 생각보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물론, 북부인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듯했지만.
“가끔 바다가 얼면 물속에서 기어 나오는 마수들도 있어서 짜증스러운 편이지. 바다는 본 적 있어?”
“아뇨, 한 번도 못 봐서 사실 상상이 잘 안 돼요.”
“그런데 왜 자꾸 다시 존댓말 써?”
“아……,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아니, 않아서…….”
“뭐야, 그래? 그럼 넌 그냥 편하게 해. 난 또 말 놓는 게 편한 줄 알았지.”
“아, 네. 괜찮다면 그럴게요.”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카리나는 책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그것을 따라서 그려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보고 싶다.’
카리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볼 수 없다. 그럴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을 거다.
세상엔 이렇게 보지 못한 것들이 가득한데 자신의 시계는 이미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시간이 있다. 자신만의 시계가 있다. 원래라면 이제 이른 아침을 살고 있어야 할 카리나는 그 모든 것을 잃었다.
“뭐야, 바다를 못 봤단 말이야?”
” 네.”
“바다는 엄청나. 숨겨진 자원도 무궁무진하고 그 안에서 튀어나 오는 것들도 다양하지. 언제 한 번 놀러 와. 여기서 말을 타고 일주일도 걸리지 않는 거리니까.”
“……네, 기회가 되면 꼭.”
“그래, 오면 맛있는 해산물을 대접해 주지. 북부의 해산물은 살이 단단해서 아주 맛있어.”
시원스럽게 웃는 마린을 보며 카리나가 마주 웃었다.
밝은 사람을 보고 있으면 자신까지도 밝아지는 기분이라 좋았다. 하나둘 인사를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훌쩍훌쩍 지나갔다.
“허허, 제가 마지막이군요.”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슐라이 레온 하르트 백작입니다.”
무척 예의 바른 노인이었다.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희끗 흰머리가 엿보이는 노인은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정정해 보였다. 카리나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카리나라고 해요. 잘……부탁드립니다.”
“네, 반갑습니다. 듣자 하니, 각하의 약혼녀이시라고.”
그의 물음에 카리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랬지만, 파혼 서류를 내밀었으니 비공식적으론 더 이상 그녀는 밀라이언의 약혼녀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발표되겠지만…… 각하와는 파혼했어요.”
“……음? 파혼 말입니까?”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축하라도 해 주기 위해 말을 꺼냈더니 들려오는 것은 뜬금없는 파혼 얘기다.
‘……파혼한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주 긴 시간 만에 마음을 준 상대가 나타났구나 싶어서 제법 흡족한 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밀라이언 페스텔리오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전부 지켜봐 왔으니까.
“네, 절 도와주는 대가로 파혼을 하기로 했어요. 제가 조금 곤란한 부탁을 드렸거든요. 친절하신 분이에요.”
“……그랬군요.”
“네, 그러니까 더는 약혼녀가 아니에요. 북부 검문소가 다시 열리고 조금 있다가 저택도 떠날 예정이고요.”
카리나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렇게라도 얘기를 하고 다녀야 나중에 무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만 알고 있는 약속보단 모두가 알고 있는 약속이 더 지켜질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으음…… 그거 그 인…… 아니, 각하랑도 합의된 사항입니까?”
“맞아. 그…… 런 건 혼자 정하면 안 되지.”
크램버 남작과 에리얼 자작이 덧붙였다.
어쩐지 조금 새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애초에 들어올 때 합의된 사항이었다.
“네, 여기 머무르기로 할 때부터 합의된 사항이었어요.”
“……그 뒤엔? 혹시 최근엔 얘기 해 봤어?”
마린 에리얼이 무척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직접 그것에 관해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음, 그래.”
아까의 그 모습을 봐서 밀라이언 페스텔리오가 그녀를 놓아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까지 내숭을 떠는 이유가 그녀를 쫓아내기 위함이 아니라면 말이다.
“요즘 그 인간이 좀 미친 것 같더니…….”
마린 에리얼의 거친 언사에 카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한동안은 조금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밀라이언은 그렇게 욕을 자주 하진 않으니까.’
실제로 그와 전쟁터에서 굴러 본 이들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카리나의 생각을 정정해 줄 사람은 없었다.
“아, 맞다! 카리나, 이번 토벌에서 수집하는 하론을 전부 공작령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왜 그런지 압니까?”
크램버 남작의 가벼운 목소리에 카리나가 볼을 긁적였다.
앓고 있는 병에 대해 말하기엔 민망하고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자니 괜히 숨기는 것 같다.
“으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카리나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기왕이면 밀라이언을 욕먹게 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변명해야 했다.
카리나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걸 보며 영주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체 이런 아가씨가 뭐가 좋아서 저 인간을……’
‘무슨 내숭을 떨고 있는 거야?’
‘이거 참, 목줄 잡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카리나가 한참 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병에 관해선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고 그의 선행으로 포장하고 싶었다.
“어떤 불치병이 있는데, 그 치료제가 하론이랑 연관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개발하려고 모으는 것 같아요.”
“아가씨께서도 그 병에 걸리셨나?”
슐라이 레온하르트가 노련하게 물어 왔다.
밀라이언 페스텔리오는 중립적인 사람이었다.
선하지도 그렇다고 악하지도 않은.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아주 약간 선에 기울어 있는 사람.
그는 굳이 타인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 눈앞에서 곤란에 처한 이를 모른 척하지는 못하나 곤란한 이를 부러 찾아다니거나 그런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음……. 네, 부끄럽지만요. 밀라이언……. 각하께 하론을 선물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허, 각하께서 아가씨께 하론을 선물하셨나?”
“네.”
카리나의 말에 슐라이 레온하르트가 손으로 제 턱수염을 문질렀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린다.
에리얼 자작과 크램버 남작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걸 듣기라도 한 듯 일그러졌다.
“뭐……, 그 인간…… 아니 각하께서 별말은 없으셨어, 카리나?”
마린 에리얼이 듣지 못할 것을 들은 것과도 같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물어 왔다.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아.”
카리나가 낮게 탄성을 흘렸다.
“그, 몸이 약한 사람에게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던데요. 몸이 낫는다는 미신이 있다고…….”
크램버 남작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황급히 미안하다고 허리를 숙여 오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가 멎을 기미는 없어 보였다.
그뿐이랴, 마린 에리얼의 표정도 슐라이 레온하르트의 표정도 미묘했다.
“……음, 혹시 다른 말은 없었어?”
“네, 무슨 다른 의미가 있나요?”
“뭐, 확실히 그런 의미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마린 에리얼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늘였다.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확실히 그런 용도도 있기는 했다. 물론, 그런 것보다 더 보편적으로 쓰이는 용도는 따로 있었다.
“네.”
“보통은 반려자한테 준단 말이지, 그거…….”
“……반려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