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1)
>91 화>
“응. 북부는 뭐, 이렇다 보니 얼마나 강한지가 척도가 되는 경우가 있어서. 자기가 붙잡은 마수에게서 얻어 낸 하론을 선물하는 게 관습이야.”
에리얼 자작의 설명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슬쩍 슐라이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자 그가 모호한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 건강해지라는 의미로 선물한다곤 하지만 그게 뭐 아는 사람 병문안 갈 때 가져가는 그런 종류의 선물은 아냐.”
“아…….”
그냥 아픈 사람에게 선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몸이 좋지 않은 이에게 누구든, 가까운 사람이라면 인사의 의미로 주는 거라고. 근데 그게 아니었을 줄이야.
“하론은 가까운 가족이나 반려자에게 선물하는 경우가 흔해. 이성에게 주는 경우는 대개…… 뭐…….”
마린 에리얼이 제 팔을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소름이라도 돋는 듯 설명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카리나의 얼굴이 천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근데 언제 받았는데?”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카리나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녀의 목덜미가 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절로 민망해질 정도였다.
동시에 카리나는 두려워졌다.
밀라이언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 자신의 것과 같은 것일까 봐.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카리나는 밀라이언을 좋아하지만 밀라이언은 카리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 감정은 오롯이 자신만이 묻어서 가져가고 싶었다.
그토록 그에게 애정을 갈구했으면서, 비겁한 변명이다. 속으로는 어쩌면 그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지길 바랐으면서.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눈치채길 바라진 않았다.
‘……몰랐으면 좋겠는데.’
부디, 별 의미 없이 준 거길 바란다.
그러면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이중적인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카리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달칵.
동시에 연회장의 문이 다시 열렸다.
곁에 있던 슐라이 레온하르트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폈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정확히 30분 됐군.”
이쯤 되니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인 그라도 황당함이 목소리에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 꿀단지라도 묻어 둔 곰처럼 그가 성큼성큼 카리나를 향해 걸어갔다.
“카리나?”
흠칫.
카리나의 몸이 크게 떨렸다. 거의 발작하는 수준으로 제자리에서 펄쩍 뛴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다가가자 한 걸음 물러 난다. 밀라이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카리나, 무슨 일 있었나?”
“…….”
카리나가 대답 없이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밀라이언의 시선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살기가 뚝뚝 흐르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영주들을 향했다.
‘뭐 했어?’ 그렇게 묻는 눈빛이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벅찼다.
오로지 연회장에서 카리나만이 그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 하고 있었다.
크램버 남작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저 살겠다고 손바닥을 쭉 펼쳐 마린 에리얼을 가리 켰다.
밀라이언의 시선이 곧장 에리얼 자작에게 향했다. 불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에 마린 에리얼이 숨을 삼켰다.
‘이 새끼들, 같이 즐겨 놓고선.’
밀라이언 페스텔리오의 이야기에 전부 귀를 활짝 열어 놓고 있었던 거 누가 모를 줄 아는가.
마린 에리얼이 주먹을 꽉 쥐며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모른 척하는 주변을 한 차례 훑었다.
밀라이언이 다시 고개를 돌려 카리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카리나가 또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카리나.”
밀라이언이 결국 더 다가가는 것을 포기했다.
“……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나?”
그가 달래듯 한껏 부드럽게 풀어 낸 목소리로 물었다.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카리나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심장이 서서히 조여오는 듯한 느낌에 밀라이언이 주먹을 쥐었다. 초조함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 대해 뭔가 들었나?”
움찔.
대답 대신 그녀의 행동이 답을 말했다.
밀라이언이 이마를 짚었다. 그가 다시 한번 긴장한 듯 굳어 있는 이들을 노려봤다.
“……그, 밀라이언.”
“그래.”
카리나의 망설이는 듯한 부름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약간의 지체도 없는 재빠른 대답이었다. 서 있던 영주들이 혀를 내둘렀다.
“저……, 올라가도 돼요?”
“……왜? 기대하지 않았나.”
“그냥, 조금 피곤해졌어요.”
기분이 가라앉았다.
스스로의 이기심이 하찮고 우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가 줄곧 몰랐으면 하면서도 사실은 알아채 줬으면 하다니. 이 모순적인 감정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기심이 아닌 다른 단어를 그녀는 찾을 자신이 없었다.
“알겠어. 내가 데려다 줄게.”
“아뇨, 혼자 가도 될까요?”
“……그대만 방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 내려오는 것도 안 되겠나?”
고개 숙인 카리나를 위해 한쪽 무릎이라고 꿇고 싶을 지경이었다. 답답한 속을 주먹으로 내려 치고 싶었다.
밀라이언의 주먹 쥔 손등에 힘줄이 투둑 돋아났다.
“……응, 카리나?”
망설이듯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이언이 그제야 허락받은 사람처럼 카리나와의 거리를 냉큼 좁혔다. 그러곤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밀라이언이 영주들을 한번 훑어보곤 그대로 연회장을 나섰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밀라이언이 명령했다.
“연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연회를 잘 즐길 수 있도록 해. 혹시나 연회장을 잘못, 벗어나시는 일이 없도록.”
“네, 알겠습니다!”
살벌한 데다 서늘하기까지 한 밀라이언의 목소리에 긴장한 기사가 차려 자세를 취하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밀라이언이 그대로 그녀의 등을 받치며 2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용하군.’
평소라면 혼자 걸을 수 있다는 말이라도 했을 거다. 그러나 카리나는 말이 없었다.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저 제 옷자락만 붙잡은 채 몸을 기대지도 않고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있었다.
“……카리나.”
“있잖아요, 밀라이언. 나는 참 비겁한 것 같아요.”
“그대가 뭐가 비겁해. 내가 말했잖아. 비겁한 건…….”
“알아요, 밀라이언이 해 준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요.”
무엇하나 빼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도 줄곧 기억할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밀라이언일 테니까. 발작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먼저 떠올랐고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고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하론을 떠올리면 그것을 품에 안는 것이다.
“밀라이언이 날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
“너무 이기적인 말이겠지만 신이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한다면…… 난 그 소원을 빌 것 같아요.”
“어째서?”
“밀라이언은 제 생에 첫 봄날에 만난 따스한 봄 같은 사람이에요. 당신의 세계가 언제나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다정한 사람으로 가득 차서,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하며 그렇게 살아갔으면 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카리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사실 정말 그를 위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저택을 떠나면 될 일이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사라지면 될 일이었다.
진심으로 밀라이언을 위하고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두 세 번 붓질할 힘이 남아 있을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밀라이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밀라이언이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천천히 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가 입을 열었다.
“봄을, 그대와 함께 맞이하면 안 되는 건가?”
“말했잖아요. 전 때가 되면 떠날 거라고. 여러모로 고민했는데 여행을 떠날까 해요.”
“몸도 좋지 않은데, 어딜.”
“아니면, 아는 사람의 집에라도 가죠.”
“누구.”
“비밀이에요.”
한 번 한 거짓말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가 언제나 늠름하게 그 자리에 있었으면 했다.
자신은 그저 그에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으면 했다.
아주 조금 작은 태풍 같은 존재.
그러니까 태풍이 지나고 평소보다 더 청명한 하늘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그에겐 그저 그 정도의 존재면 충분했다.
사랑받지 않는 것은 익숙하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도 익숙했다. 그녀는 수없이 상처를 받아서 이제와 생채기가 하나둘 정도 더 생긴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밀라이언은 분명 아닐 거다.
그는 충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주변은 그를 신뢰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애초부터 모든 것이 다른 위치였다.
“귀찮고 조금 번거로운 태풍이 잠시 머물렀다가 간다고 생각하세요. 태풍은 언젠가 지나갈 거예요. 전 당신께 그냥 그런 존재로 남고 싶어요.”
“…….”
밀라이언의 걸음이 느려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가 마저 성큼성큼 걸어 그녀를 침대 위에 앉혔다.
밀라이언이 카리나를 가만히 내려다 봤다.
“태풍은 가끔 많은 걸 떨어뜨리고 가.”
“…….”
“그곳에 바람 한 점 남기고 가지 않을 수는 없지.”
“남기지 않을 거예요.”
“난 남길 거라고 확신해.”
밀라이언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언제나처럼 카리나의 볼을 감싼다. 그가 다른 손으론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카리나.”
밀라이언의 입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카리나가 숨을 들이켜면서도 그 입술을 피하지 못했다.
붉은 눈동자에 사로잡혀 눈조차 피할 수가 없다. 감는 것조차 용서받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쿵, 쿵, 쿵, 쿵.
규칙적이던 심장 소리가 순식간에 빠른 박자로 바뀌었다. 카리나가 제 귀에 들리는 심장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대가 날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알아?”
낮은 목소리가, 그의 숨결이 카리나의 숨결과 섞여 들어갔다. 최근 깨달은 것이다.
최근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알게 됐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대도 날 좋아하잖아.”
“…….”
‘그대도?’
밀라이언의 단어 선택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동시에 정곡을 찔러 오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 아니라고, 그렇게 한마디 내뱉어야 하는데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날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은 눈으로 보고 있어.”
소유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