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2)
>92 화>
닿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것이 빤히 보였는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려고만 했다.
밀라이언은 그것이 괘씸하면서도 동시에 의아했다. 이 정도로 적나라한 감정을 왜 굳이 숨기려고 드는 것일까?
‘……내가 귀찮다고 해서?’
하지만 그건 분명히 사과를 했었다. 더 이상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없었으니까.
밀라이언이 붙잡은 손목에 힘을 줬다. 손가락 끝을 타고, 그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대의 심장, 곧 터질 것 같아.”
흠칫,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커다랗게 벌어진 그 눈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며 밀라이언이 천천히 몸을 떼어 냈다.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분명 그녀는 더욱 깊게 숨어 버릴 거다.
“내게 거짓말을 하려면 그것부터 숨겼어야지.”
“이건…… 그냥…….”
“오늘은 피곤한 것 같으니 푹 쉬도록 해. 사람을 올려 보낼게. 이야기는 내일 하자.”
밀라이언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등을 돌렸다.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카리나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탁.
완전히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바라보던 그녀가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참담하고 기뻐서, 모순적인 자신이 끔찍했다.
카리나가 그대로 무너지듯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 *
탁.
방문을 닫고 나온 밀라이언의 얼굴이 싸늘했다.
싸늘함이 아니라 살벌하다고 해도 부족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 열댓 명은 단숨에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움직였다. 그녀에게 화를 낼 뻔했다. 왜 그렇게 답답하게 구냐고. 소리를 칠 뻔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던 것은…… 카리나가 혹시나 놀라서 발작을 일으킬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손을 대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손목을 붙잡는 것도 혹시나 팔목이 부러지진 않을까 봐 신경 쓰였다.
최대한 힘을 뺐음에도 손을 뗄 때 본 카리나의 손목은 살짝 붉어졌다.
“귀찮고 조금 번거로운 태풍이 잠시 머물렀다가 간다고 생각하세요. 태풍은 언젠가 지나갈 거예요. 전 당신께 그냥 그런 존재로 남고 싶어요.”
밀라이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잠시 머물렀다 가는 태풍?
“헛소리.”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살벌한 목소리였다. 누가 놓아 주기나 한다고 했는가.
북부는 그의 영지였고 그는 그녀를 내보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자신을 정말로 싫어하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욕망하고 있었다. 가끔 그녀가 내비치는 시선에 담겨 있는 소유욕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아랫배가 묵직해지곤 했다.
그다지 큰 접점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멋대로 제 품에 들어 왔다. 하지만 들어올 때 마음 대로였다고 나갈 때까지 마음 대로 일 수는 없지.
나갈 때는 허락이 필요했다. 그리고 밀라이언은 그 허락을 결코 해 줄 마음이 없었고.
“개새끼들부터 족쳐야지.”
밀라이언이 드물게 험악한 말을 입에 올렸다. 웬만큼 피에 흥분하지 않으면 내뱉지 않는 욕설이었다.
다만 마수를 사냥하다 보면 종종 본성에 의지해야 할 때가 있었고 대개 그런 경우 이성이 끊기곤 했다.
그 상태에서 다시 이성을 붙잡을 때 그는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가끔은 눈이 풀리기도 해서 궐련을 피우며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는 것이었다.
밀라이언이 품 안에 있는 궐련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 대로 성큼성큼 연회장으로 향했다.
올라올 때완 다르게 조금의 지체도 망설임도 없는 재빠른 발걸음이었다.
“빠져나간 자는?”
“없습니다. 몇몇 분께서 나오려고 하셨으나 말씀 전하며 막아 두었습니다.”
“알겠다. 열어.”
밀라이언의 명령에 병사가 빠르게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쯤 쭉 찢어진 동공이 마치 자신들도 그렇게 찢어 버릴 듯이 보였으니까.
” 닫아.”
밀라이언이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가 다시 문을 닫았다.
굳게 닫힌 문을 힐끗 본 밀라이언이 몇 뭉치로 나뉘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씨발, 다 죽었어.”
밀라이언이 허리춤에서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들어오자마자 상황 설명도 없이 검을 뽑는 밀라이언에 영주와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개중에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한 것은 딱 한 사람이었다.
“고레든.”
“네, 각하.”
“무슨 일 있었는지 읊어.”
밀라이언의 말에 곧장 고개를 숙인 고레든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말 그대로 밀라이언이 사라진 직후부터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했다.
이윽고 말이 끝난 그가 고개를 숙이자 밀라이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가게 지켜. 고레든,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고레든이 대답하곤 테라스 쪽 문 앞에 문지기처럼 섰다.
덩치 큰 사내가 테라스 입구에 자리 잡자, 그곳은 말 그대로 도망칠 수 없는 출구가 되었다.
“오랜만이지. 검 뽑아.”
“이, 이봐 각하. 우리 얘기로 하자고. 말로 풀어야지. 따지고 보면 사실 우리는 하론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밖에 없단 말이야!”
“왜 사람 쫓아내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
툭, 기울어진 밀라이언의 목소리가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마린 에리얼이 입을 떡 벌렸다.
순순히 물러날 기미는 전혀 없다. 가장 먼저 포기하고 검을 뽑은 것은 슐라이 레온하르트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밀라이언을 봐 온 만큼, 그가 한 번 정한 일을 결코 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년에 고생이군.’
얼른 제 조카가 자라 줬으면 하지만…… 아직까지 혼자 몫을 하려면 멀었다.
슐라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른 영주들과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자리 잡았다.
“나머진 안 뽑나? 조용히 뒤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던가.”
“아아! 씨발, 누가 안 뽑는대! 진짜 지랄도 풍년이네. 거참, 아가씨가 아깝다, 아까워! 어쩌다 이런 괴물 새끼한테 걸려 가지곤.”
마린 에리얼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커틀러스를 꺼내 들었다. 독특하게도 양손에 검을 쥔 모양 새로 그녀가 이를 드러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으아아……, 진짜 난 각하랑 싸우고 싶지 않다고! 개 패듯 맞을 게 뻔한데 젠장!”
그러면서도 크램버 남작 역시 냉큼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영주들을 보던 기사들도 하나둘 씩 검을 뽑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표정만큼은 완벽히 겁에 질려 있었다.
밀라이언이 한 번 돌아 미치면 어떤 식으로 마수를 갈기갈기 찢어 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훑어본 밀라이언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카리나가 아깝지. 누가 아깝지 않다고 했나?”
밀라이언이 낮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녀가 자신에게 아깝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 미친놈에게 잘못 걸린 거지.
“그녀가 미친놈에게 잘못 걸리긴 했지.”
밀라이언이 들고 있던 검 끝을 바닥을 향하게 내렸다. 사선으로 내려진 검을 바라보며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숨을 삼켰다.
“근데 카리나는 평생 모를 테니 상관없는 일이지.”
“저, 미친…… 저게 왜 북부의 구심점이야?”
거친 욕설을 내뱉은 마린 에리얼이 그대로 밀라이언을 향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두 개의 커틀러스를 가볍게 휘두르며 그녀가 밀라이언에게 빠르게 공격했다.
쇄도하는 공격을 한 손으로 쥔 검으로 턱턱 막아 내며 밀라이언이 그대로 힘을 줘 검을 횡으로 그었다.
에리얼이 황급히 검을 X자로 교차시키며 밀라이언의 공격을 막아 냈다.
“저 괴물…….”
슐라이가 밀려난 에리얼의 뒤에 몸을 숨겼다가 밀라이언의 빈틈을 노렸다.
밀라이언이 가볍게 몸을 피하고 그대로 검을 갈무리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 그었다.
대개 북부란 이랬다. 격식이란 없고 일이 있으면 일단 검부터 뽑는다.
우두머리부터가 이런 식이었으니 그들의 호전적인 성격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했을지는 알만한 일이었다.
밀라이언은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개미 떼 같은 기사들을 발로 퍽퍽 차며 상대했다.
다치지 않게 손에 자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그들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속절없이 나가떨어지는 기사들 사이에 영주들 중에서는 크램버 남작이 결국 가장 먼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부러 자신을 보내도록 카리나를 부추긴 것을 뻔히 알기에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걸어가 크램버 남작의 배를 발로 거세게 찼다.
“으악! 아프다고요!”
데굴데굴 연회장 바닥을 구르며 크램버 남작이 낑낑 약한 소리를 했다. 그리곤 냉큼 테이블 뒤로 쪼르르 도망간다.
애초에 이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밀라이언이 정말 봐주지 않았다면 이곳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채앵-!
에리얼의 커틀러스도 허공을 뱅글뱅글 돌아 날아가다가 테이블 위에 푹 소리를 내며 꽂혔다.
그녀가 두 손을 들곤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 졌습니다.”
마린 에리얼이 빠르게 항복 의사를 표현했다.
그들은 호승심이 강하고 쉽게 달아오르긴 하지만 그래도 싸움 을 더럽게 질질 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즉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 거리낌은 없다.
강한 것은 강한 것이다.
모든 이들이 쓰러지고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적당히 치고 빠지던 슐라이 레온하르트와 밀라이언 그리고 테라스로 도망가려는 이들을 방지하기 위해 세워 뒀던 고레든이었다.
“적당히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각하.”
슐라이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
밀라이언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도 아까보단 목소리에 독기가 꽤 빠져나간 후였다. 밀라이언이 쯧 혀를 차고선 검을 허리 춤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 이상 계속하면 그다지 분위기에 좋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곧 토벌이 시작 될 시기인데 부상이라도 생기면 여러모로 곤란해졌다.
그걸 알기에 밀라이언도 슐라이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가 검을 집어넣고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가지고 있던 성냥을 태워 불을 붙인 그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테라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