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6)
>96 화>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카리나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사실은 그다지 괜찮지 않았다.
미친 것처럼 이어지던 통증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미약한 통증 만큼은 여전했다.
카리나의 대답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라면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방금까지 자신이 몇 번이나 죽자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는 걸 페리얼은 분명히 모를 테지.
차마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페리얼.”
“네.”
“미안해요. 페리얼뿐만이 아니라 밀라이언에게도 미안하고요. 그냥 저랑 엮인 모든 사람에게 미안해서요.”
카리나가 고개를 떨궜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엮인 사람은 전부 어찌할 것이며, 이미 자신에게 휘말린 사람은 또 어떡할 것인가.
안일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고 싶어진다.
“미안할 거 없습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페리얼은 상냥하네요.”
“상냥하지 않습니다. 제가 상냥한 건…….”
오직 당신에 한해서라고, 페리얼이 목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억눌렀다.
페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카리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지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전 지금 밀라이언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이대로 떠나는 게 옳을 것도 같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입술을 달싹이던 페리얼이 결국 아무런 대답 없이 입을 닫았다.
차라리 떠나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마저 들었다.
카리나가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페리얼, 난 죽어요.”
무척이나 지친 목소리로 그녀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제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혀끝에 올렸다.
스스로 얼마나 곱씹고 인정해야 이렇게 되는 것일까.
페리얼은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어떤 말도 그녀를 위로 하진 못할 것이며 그녀는 어떤 말을 해도 그저 웃어 보일 테니까.
“하루하루, 발작이 심해지고 통증이 강해져서…… 끝이 오는 게 느껴져요.”
꺾일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심장이 아팠다.
심장이 누군가에게 난도질이라도 당하는 듯했다. 이미 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달칵.
쇠가 걸리는 소리에 카리나와 페리얼의 몸이 흠칫 떨렸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문고리는 적어도 시녀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단 들어오기 전에 문을 두드려 허락을 받았으니까.
“……밀라이언.”
낮게 읊조린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바로 세우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밀라이언이 성큼성큼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카리나를 바라봤다.
‘들었나?’
그녀가 긴장한 듯 숨을 죽였다.
괜한 허튼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설마 듣진 않았겠지.
카리나의 떨리는 푸른 눈동자가 밀라이언의 눈에도 담겼다.
카리나의 모습이 흐트러져 있었다. 급히 정돈을 했어도 땀에 젖은 머리나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나 창백한 얼굴을 숨길 순 없었다.
벌겋게 물든 그녀의 눈 밑을 보며 밀라이언이 주먹을 쥐었다.
페리얼이 난감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는 일이다.
밀라이언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몸이 뜨거워. 발작이 왔었나?”
“……네.”
밀라이언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밀어 넣었다.
그 넘칠 것 같은 감정에 목구멍이 부풀기라도 한 듯 뻑뻑하게 아파 왔다.
밀라이언이 아무런 말없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밀라이언에게서 별다른 말이 없었다.
듣지 못했구나. 안도한 카리나가 한층 편안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가 품에 카리나를 안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페리얼 칼로스.”
“왜?”
“팽에게 일전에 주문했던 거 왔으면 가져오라고 말 좀 전해 줘.”
밀라이언의 흉흉한 시선이 페리얼 칼로스를 난도질할 듯 바라봤다.
그 붉은 눈동자가 상당히 섬뜩했다. 페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무엇에 그가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넌…… 조금 있다 나 좀 보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봤을 때 아주 조금 짐작이 가는 것도 있긴 했다.
페리얼이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한동안 어디 멀리 떠나 잠적 해 있다가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해 주겠지?”
낮은 목소리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걸 카리나만 혼자 모르는 모양이다. 페리얼이 침을 꿀꺽 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개가 되겠군.’
오랜만에 한바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라이언과 페리얼은 애초부터 전공 자체가 크게 달랐다.
아카데미에서는 물론 후계자 수업을 함께 받긴 했지만 밀라이언이 검술을 맡았다면 페리얼은 예술 쪽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으니까.
“이번만이야.”
페리얼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 자신도 공작이면서 같은 공작의 심부름이나 해야 하다니.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가기 전 페리얼의 시선이 잠시 카리나에게 닿았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떨림이 멎어 있었다. 도리어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 자신은 결코 해 줄 수 없었던 일이다.
페리얼이 밖으로 나가자 밀라이언이 엄지로 그녀의 눈 밑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카리나.”
“네.”
“또 갑작스러운 발작인 건가?”
“……네.”
“그렇군.”
밀라이언이 입을 다물었다.
만나면 크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왜 속였느냐고 추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의 자신은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래서 숲에 따라갈 수 있겠어?”
“괜찮아요!”
카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냉큼 대답했다.
고개를 치켜드는 그녀를 보며 밀라이언이 입을 닫았다. 그녀가 무엇이든 보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이유…….
“그래.”
밀라이언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말없이 정리해 줬다.
죽죽하게 젖은 침대며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이불이며 그녀의 사투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혼자서 숨을 죽이고 있었을 그녀의 시간.
어둠 속에서 그저 견디고 견뎠을 시간.
너덜너덜해진 피가 묻어나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밀라이언이 엄지로 꾹 눌렀다.
“입술을 깨물면 어떡하나.”
“아…….”
밀라이언의 지적에 카리나가 서툴게 웃었다.
허물어진 그녀의 입꼬리를 보며 그가 쓰게 웃었다. 밀라이언이 카리나의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살아 있음에도 죽음을 이야기하는 심정은 어떤 걸까.
그 역시 마수 토벌을 나갈 때든 전쟁에 나갈 때든 죽음은 각오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손쓸 수 없이 찾아오는 일이다.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 공포를 속에 끌어안고 있었던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반년에서 10개월 정도 여기서 지내고 싶어요. 대신 내가 여기에서 떠날 때 파혼해요.”
“그 전에 도대체 세상 물정도 모르는 귀족 영애가 뭘 안다고 혼자서 그 험한 길을 와?”
“……아마도 이게 내 첫 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일 테니까요. ”
첫 만남의 짤막하고 삭막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당한 눈빛의 밑질 것이 없다는 표정.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까지.
‘……그때부터 였나.’
여기에 왔을 때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수도에서 출발했던 두 달 전부터 죽음을 알았던 거다. 그러니까 병에 걸린 그녀가 걱정되어 윈스턴이라는 의원이 이곳까지 발을 들였다.
가벼운 병이었다면 직접 움직였을 리가 없다. 죽음이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그가 이곳까지 온 거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 냈던 이유도 스쳐 지나가는 태풍이 됐으면 한다는 이유도…….
조각나 있던 모든 퍼즐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카리나는,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제게 파혼을 조건으로 내건 것도 아무렇지 않게 파혼 서류를 내민 것도 전부 이유가 있었던 거다.
제 끝을 알고 있으니, 자신의 마지막을 이미 알고 있기에 포기 했던 거다.
꽈악-
밀라이언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채 주먹을 쥐었다.
끔찍했다. 멍청한 자신이, 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아둔함이 한심하고 한심했다.
“밀라이언? 무슨 일 있었어요?”
말없이 어린아이처럼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카리나가 물었다.
움찔, 몸이 떨렸지만 밀라이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나?’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나가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려던 것인지 아니면 괜한 죄책감을 느낀 것인지 모르겠다.
카리나가 손을 뻗어 밀라이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래도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건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는 걸까.
“몸은 어때?”
“밀라이언이 안아 준 덕분에 나아졌어요.”
“방은…… 불편하지 않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의미심장한 물음만을 담는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불편한 것은 없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췄다.
“오늘 나랑 함께 자지 않겠나?”
“……네?”
“그대의 옆에서 자고 싶어.”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가 결국 몸을 비틀어 돌렸다.
그제야 밀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듯 일그러진 표정에 그녀가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양팔을 뻗어 그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비틀어진 허리가 제법 뻐근했다.
“무슨 일 있었군요.”
“응.”
“무슨 일이에요?”
“그냥…….”
카리나의 품에 안겨 그녀의 체향에 코를 묻었던 밀라이언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다.
“아주 슬픈 일.”